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2-05 (금) 16:56
ㆍ홈페이지 http://www.bannampark.co.kr
ㆍ분 류 신도비
ㆍ추천: 0  ㆍ조회: 494       
ㆍIP: 112.xxx.65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 신도비명(神道碑銘)


 

흠이 상투를 올리고서 장안에 유학할 때 함께 사귄 이들은 다 당시의 명류이거나 혹은 행실로 혹은 재주로 혹은 문장으로 벼슬길에 올라서 두각을 드러내 명사대부들이 되었다. 그러나 큰 사업을 이룰 국량(局量)과 천성적으로 얻은 덕을 지녀, 맑게 해도 더 이상 맑아지지 않고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으며, 겉치레를 자랑하는 자가 만났을 때 그 장기가 무색해지고 기예를 담론하는 자가 만났을 때 그 자랑함이 무색해지는 그러한 경우를 논한다면 모두 박공(朴公) 열지(說之)에게 사양해야 한다.


 

열지의 이름은 동열(東說)이고 호는 남곽(南郭)이다. 그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으니 신라 왕의 자손인데 나주(羅州)에 흩어져 사는 이들은 반남(潘南) 박씨(朴氏)이다.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은 곧은 절개로 세상에 드러났고,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은(訔)은 공업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8대조이다. 증조부 조년(兆年)은 이조정랑에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소(紹)는 사간원 사간에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김안로(金安老)는 간사하므로 다시 서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가 조정에서 밀려나 영남에 은거하던 중 별세하였으며 호는 야천(冶川)이다.


 

선고(先考) 응복(應福)은 대사헌을 지냈으며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선비(先妣) 임씨(林氏)는 선산(善山)의 명문으로 별좌(別坐) 구령(九齡)의 따님이다.


 

가정 갑자년(1564)에 공을 낳았는데, 어린아이 때 벌써 남달리 준수하여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겉은 질박하고 둔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은 총명하여 민첩하게 암기하였으므로 함께 공부하는 자들이 따라잡지 못했다. 제부(諸父) 반성군(潘城君)과 남일(南逸) 두 공이 매우 공을 중하게 여겨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면서 오직 일찍 명성을 얻을까 염려하였다. 차츰 자라면서 글을 짓고 학업을 닦아 문장이 날로 진보하였다. 신사년(1581)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고 을유년(1585)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자 제생이 온통 우러르고 사모하여 난새나 봉황을 바라보듯 하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기축년(1589)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사대부 사이에서 나오니, 관련된 자들이 많아 조정의 논의가 날로 격해졌다.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도 소장을 올려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다 두려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이 급히 상소하니 서로들 경하하기를 “이제 걱정이 없겠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과연 그 사이에 잘 조정하여 별문제가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에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어느 한 구상(舊相)이 귀양을 가 있었는데 그를 다시 서용하기 위해 그의 족형이 사간원의 수장(首長)으로 있으면서 장차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죄를 추론(追論)하여 당대의 사류를 몰아내고 구상의 입지를 좋게 만들어주려 하였다. 이에 공은 그것이 무고임을 전달하여 시배들과 서로 어긋나 병조 좌랑으로 체직되고 해주(海州) 분사(分司)에서 중전(中殿)을 호종하다가 을미년(1595)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신년(1596)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고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어사가 되어 북도(北道)를 순찰하였다. 정유년(1597)에는 병조에서 지방으로 나가 영변판관(寧邊判官)이 되는 등 수년 동안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인의 음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때 중국의 군대가 재차 출병하였는데, 백성을 갈라서 군량을 수송하고 사람 수를 헤아려 번갈아 쉬도록 함으로써 민력이 쇠진하지 않고 촌락이 평온하였다.


 

무술년(1598)에 부친상을 당하고 경자년(1600)에 상기를 마치고서 시강원 사서가 되었으며 신축년(1601)에 홍문관의 수찬ㆍ교리가 되고 문학ㆍ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임인년(1602)에 검상ㆍ사인이 되고 사성(司成)ㆍ상례(相禮)ㆍ통례(通禮)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되고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 황주는 의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하여 험한 요해처(要害處)로 이름이 난데다 대대적으로 부역을 치르는 때를 만났으나, 재력의 대소를 비교하고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일정한 한계를 세우고 서로간에 조화롭게 하여 하나같이 균등하게 하였으므로, 민가는 병들지 않고 관가의 용도는 항상 넉넉하였다. 힘써 먼 장래의 일을 위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세밀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일이 다 성사되어 정사가 맑고 송사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하는 말이 “백년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어사가 특별한 치적이 있다는 것으로 계문하자 임금은 옷감을 주어 표창하였다.


 

임기가 차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서열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대마도의 왜노가 가강(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설로써 화친을 요구하고 두 병졸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들은 임진년에 능을 범했던 적도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권세 있는 재상이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삼기 위해 장차 종묘에 고하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려 하자, 공은 상소하여 말하기를 “교활한 적들은 거짓이 많습니다. 만일 서울까지 잡아 왔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적에게 기만을 당한 것이 되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정면으로 그 간교함을 꺾으소서.”라고 하였다. 선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함께 의논할 것을 명하였는데 오직 오성(鰲城) 이공의 헌의만이 공과 합치하였다. 결국 형틀에 묶어 잡아와 국문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가뭄이 들어 구언(求言)할 때 공이 어떤 이를 대신하여 상소하면서 나라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깊이 개진하여 당시의 금기 사항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권세를 휘두르던 재상이 미워하였다. 또한 그 동류 중에 공을 쳐서 제거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결국 감히 가해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처결하면서 청렴을 권장하고 혼탁한 풍조를 없애 온 도내가 엄숙해졌으며, 다시 돌아와 형조 참의가 되었다. 무신년 겨울에 충주목사(忠州牧使)에 제수되었고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했다. 상제를 마친 뒤에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모사하여 소장을 울려 퇴계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공격하자, 유생들이 모두 분개하여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 아뢰자 폐주(廢主)가 진노하여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죄를 주려고 하니, 제생이 앞을 다투어 옥에 갇히겠다고 청하고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공은 요속(僚屬, 지위가 낮은 관리)들을 인솔하여 유생들은 예로써 불러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말하였으나 폐주는 따르지 않았다. 공은 다시 봉사(封事)를 올리려고 하던 중 미처 올리기 전에 예조 참의로 체직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서 자청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고을의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서로 배척함으로써 유감과 원한이 쌓여 원수간으로 변해 그대로 수십 년이 되었으나 관가에서 제어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그 고을의 장로(長老)를 불러다가 타이르고 우선 규율을 세운 뒤에 고을에서 준수한 선비를 뽑아 교화시키고 다듬어 인재를 만들고 글을 가르쳐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으므로 공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 토호(土豪)가 잠잠하고 유업(儒業)이 크게 일어나 엄중(淹中)ㆍ직하(稷下)와 같은 칭송이 있었다.


 

계축년(1613) 여름 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위할 계획으로 큰 옥사를 일으켜 선조(先朝)의 노신들이 거의 일망타진되었고 공의 아우 금계공(錦溪公)과 흠(欽)도 체포되었다. 얼마 후에 그 화가 공에게까지 파급되어 심리에 부쳐져서 공초에 응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이 나 들것에 실려 나왔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천계(天啓) 임술년(1622) 가을에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59세였다. 9월 병오일에 양주(楊州) 금촌(金村) 사좌(巳坐)의 자리에 장사지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신씨(申氏)는 고령(高靈)의 대성(大姓)으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인데, 진실하고 청순하며 조촐하고 안존하여 내조를 잘 하였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호(濠)는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부인은 흠(欽)의 딸로서 2남 2녀를 두었고 계배(繼配)는 윤헌민(尹獻民)의 딸이다. 그 다음 황(潢)은 사간원 정언으로 대사간 홍서봉(洪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다. 그 다음 정(渟)은 목사 송일(宋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다. 장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윤순지(尹順之)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예조좌랑을 지낸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갔고, 1녀를 두었다. 호의 딸은 진사 이수인(李壽仁)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세모(世模)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은 겉모양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풍채가 옹골차고 원대하며 도량이 크고 넓었다. 솔직하고 천진스러워 어떠한 한계가 보이지 않았고 의기가 드높아서 금석처럼 확고하였으며 침묵을 견지하여 함부로 담소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서로 맞는 자에게는 한번 마음을 주면 변치 않았다.


 

부모 형제간에 효우(孝友)는 천성적으로 타고나 꾸며서 할 필요가 없었고 친족간에 화목한 것은 자연적으로 우러나 그에 미칠 자가 없었다. 남의 선을 선으로 여기는 것은 잘 하고 남의 악을 미워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치밀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남들은 마음을 갖고 애써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공은 일상적으로 생활화하여 여유만만하였고 세속에서 지혜를 짜 권모술수를 부려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공은 비천하게 여겨 행여 때가 묻을 듯이 멀리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태평하고 온화하여 덕이 높은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선대는 명망과 덕을 대대로 이어왔다. 야천공(冶川公)은 바른 도와 굳은 절개에다 학문을 겸비하였는데 소인의 배척을 받아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나, 그 법도가 남아 있고 가정 교훈이 폐해지지 않아 공의 제부(諸父)들이 다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일국의 국모가 되자 반성군이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여러 종자제(從子弟)가 영달하여 줄줄이 관직을 가졌는데, 공은 그 사이에 처하여 진실되고 삼가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냈으므로 한 집안의 노소가 다 공을 표준으로 삼았다.


 

공은 문장에 힘을 들이지 않았으나 의취가 본디 높았고 제반 전적을 섭렵하였는데 단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갔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서부터 명 나라와 국조(國朝)의 제도, 역사 사실이며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능히 그 시비를 판가름하였으므로 아무리 고사에 밝은 박사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어제(御製) 문자를 맡아 지을 때는 화려하면서도 전중하고 시를 지을 때는 맑고 산뜻하여 법도가 있었다. 물러나 고향에서 살 때에 오성(鰲城) 이공(李公)도 동교(東郊)에서 지내며 수시로 내왕하였다. 이공이 귀양갈 때 공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증정하기를 “평생에 지닌 죽여의로 자릉대에서 그댈 보내네[平生竹如意, 相送子陵臺].”하였는데, 이는 사고(謝翶)가 문산(文山)을 보낸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서 구사한 말이 처절하고 감동에 겨워 사람들이 다투어 전송(傳誦)하였다.


 

공이 작고했을 때 흠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 속에 “참으로 질박한 것은 꾸밈없이 원만하고 성실한 법인데 공은 그 전부를 타고났고, 매우 화기로운 것은 순수하고 평탄하며 크고 너그러운 법인데 공은 그 진수를 지녔다. 이름은 높아지는 데에 관심이 없이 내실을 기하려 했고, 행실은 겉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이 진실되게 하려 했고, 언어는 달변에 관심이 없이 바르게 하려 했고, 재주는 민첩한 것에 관심이 없이 신중히 하려 했으며, 속에 비단 옷을 입고서 행여 그 문채가 드러날까 꺼려하였고 청렴함을 간직하고서 행여 그 자질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였다. 공순한 만석(萬石)의 풍치이고 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 하였다. 아, 이 말은 과장한 것이 아니니 어찌 후세에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없겠는가. 공을 아는 사람이 나만한 자가 없고 보면 공의 신도비에 새길 글을 어찌 감히 짓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고금 인물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공 같은 이 그 어찌 옛 현인들보다 못하겠는가.

공의 벗이 명을 지어,

이 신도(神道)를 빛낸다네.

                                                                        신흠(申欽)이 지음.

 

   
 
    N     분류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5 신도비 환재 휘 규수 신도비 대종중 2016-02-05 283
14 신도비 평도공(平度公) 휘(諱) 은(訔)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624
13 신도비 문강공(文康公) 휘(諱) 소(紹)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688
12 신도비 졸헌공(拙軒公) 휘(諱) 응복(應福)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54
11 신도비 서포공(西浦公) 휘(諱) 동선(東善)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526
10 신도비 남곽공(南郭公) 동열(東說)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94
9 신도비 금계군(錦溪君)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朴公 신도비명(神道.. 대종중 2016-02-05 448
8 신도비 약창공 박엽 신도비 대종중 2016-02-05 507
7 신도비 문정공(文貞公) 분서(汾西) 휘(諱) 미(瀰)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86
6 신도비 금주군(錦洲君) 휘(諱) 정(炡)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48
5 신도비 문정공 서계(西溪) 휘(諱) 세당(世堂) 묘갈명(墓碣銘) 대종중 2016-02-05 466
4 신도비 문효공(文孝公) 만휴당(晩休堂) 휘(諱) 태상(泰尙) 신도비명 대종중 2016-02-05 530
3 신도비 충헌공(忠獻公)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 준원(準源) 신도비명.. 대종중 2016-02-05 551
2 신도비 충희공(忠僖公) 금성위(錦城尉) 명원(明源) 신도비명(神道碑銘) 대종중 2016-02-05 423
1 신도비 숙헌공(肅獻公) 좌의정(左議政) 휘(諱) 회수(晦壽) 신도비(神道.. 대종중 2016-02-05 57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