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대종중
ㆍ작성일 2016-03-31 (목) 15:02
ㆍ분 류 역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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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

 

[15세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

 

1631(인조9)∼1695(숙종21)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南溪).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량(東亮)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의(猗)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49년(인조 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일찍이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고, 이이를 존경하였기에 그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자, 이에 분개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瀰), 아버지 의(漪)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었는데,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며 서인 측의 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당시 그가 지은 『복제사의(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 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서한을 보내어 윤휴를 꾸짖은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 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 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 지평(砥平)· 원주· 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문에 전념하여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였다. 또한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하여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 (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을 저술하였다.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정권교체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 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자로써 자질을 발휘한 시기이다. 이 기간 중에 윤증·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 학자들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해 비판하고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학문적 변화를 보였다. 『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세상을 떠나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 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박세채는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즉, 중화적(中華的) 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 천명을 어기고 인륜에 어긋남)의 위기의식이 만연한 시기였다.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문 생활은 이러한 시대정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영조 ․ 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삼례의三禮儀》《육례의집六禮疑輯》과 문집에 《남계집南溪集》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동국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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