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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3 (수)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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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정일기[ 南征日記 ]

• 이칭별칭 남정록

• 유형 작품

• 시대 조선

• 성격 유배기행록

• 창작·발표연도 영조 때

• 작가 박조수

정의

조선 영조 때 박조수(朴祖壽)가 지은 유배기행록.

구성 및 형식

1책. 필사본. 「남정록(南征錄)」이라고도 한다.
지은이의 할아버지인 성원(盛源)이 1775년(영조 51) 11월 17일(음력)에 집의(執義)였던 남강로(南絳老)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그날로 대사간에서 파직됨과 동시에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에 손자인 지은이가 당시 65세인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낸 일들을 일기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내용

내용은 귀양길을 가면서 경험한 여러 일들과 유배지에서 있었던 일들 및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였는데, 중요한 일이 있었던 날들은 매일 기록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때에는
‘초이일 지십일일’ 등과 같이 모아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귀양살이한 본인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고 배행자(陪行者),

곧 유배죄인을 모시고 따라가서 같이 고생한 아랫사람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유배문학작품 중에서도 몇 편 안되는 국문산문작품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또한 이 작품은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흑산도를 무대로 한 유배문학작품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맞춤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로도 높이 인정받을 만하다.


참고문헌

• 『국문학개론(國文學槪論)』(김준영, 형설출판사, 1974)

• 「남정일기(南征日記)를 살핌」(최강현, 『월촌구수영선생화갑기념논총』, 198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조선 후기 영조 때 박조수(朴祖壽)가 지은 유배기행록. 1책. 필사본.

<남정록(南征錄))이라고도 한다.

아직 그 전문이 학계에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지은이의 할아버지인 성원(盛源)이 1775년(영조 51) 11월 17일(음력)에

집의(執義)였던 남강로(南緯老)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그날로 대사간에서 파직됨과 동시에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에 손자인 지은이가 당시 65세인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낸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내용은 귀양길을 가면서 경험한 여러 일들과

유배지에서 있었던 일들 및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였는데,

중요한 일이 있었던 날들은 매일 기록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때에는 '초이일 지십일일'등과 같이 모아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귀양살이한 본인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고 배행자(陪行者),

곧 유배죄인을 모시고 따라가서 같이 고생한 아랫사람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유배문학 중에서도 몇 편 안되는 국문산문작품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또한 이 작품은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흑산도를 무대로 한 유배문학작품 중

에서는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맞춤범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로도 높이 인정받을 만하다.



작품해설

조선 후기 영조 때 박조수(朴祖壽)가 1778년에 지은 유배기행록.

박조수의 할아버지인 성원(盛源)이 1775년 11월 17일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집의(執義)였던 남강로(南絳老)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그날로 대사간에서 파직됨과 동시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에 박조수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낸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유배문학(流配文學) 작품이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남행록 南行錄>이며, 원작품명은 <남뎡일긔>이다.


내용은 지은이의 조부 박성원이 1775년 11월 17일에 올려 유배의 원인이 된 상소문을 먼저 국역 소개하고,

당시 정국의 옳지 못한 점을 지적한 뒤 조부의 유배가 결정된

11월 17일 그날로 길을 떠나 과천(果川)→공주→전주→나주→무안→암태도를 지나

흑산도(黑山島)에 12월 1일에 도착하여 위리안치의 벌을 받다가

 1776년 1월 12일에 2일자로 해배된 소식을 듣고,

13일 출발하여 암태도→다경포→나주→전주→예산→면천을 지나

 2월 2일에 서울집에 이르기까지의 경험사를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19세 휘 성원(盛源) 1711~1779 응천-동민-환-세성-泰迪-弼鼎-師漢-盛源-宗祿

자는 공무(公茂). 승지 세성(世城)의 현손이고 사한(師漢)의 아들이며, 외할아버지는 김창협(金昌協)이다.

1743년(영조 19)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는 차대(次對)할 때 왕에게 주달(奏達)한 말의 기록을 고치려 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그뒤 복관되어 사서(司書)․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 41)에는 대사간에 재직시 이담(李潭)을 논핵(論劾)하다가 죽음을 당한 남강로(南絳老)의 신원(伸寃)과 그 복작(復爵)을 청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연설가관 筵說可觀》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영조(英祖)19년(1743년), 알성시(謁聖試) 을과2(乙科2)

생년(生年) 1711년, 신묘

자(字) 공무(公茂)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부(父) 박사한(朴師漢)

조부(祖父) 박필정(朴弼鼎)

증조부(曾祖父) 박태적(朴泰迪)

외조부(外祖父) 김창협(金昌協)

형(兄) 박정원(朴正源)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

관직(官職) 옥당&(玉堂&)

《박상록(朴相祿) 英祖) 44 (1768) 식년(式年進士)

【합격등위】 3등 0035

【본인성명】 박상록(朴相祿)

【본인 자】 천여(天與)

【본인생년】 갑인(甲寅) 1734

【본인거주】 경(京)

【본인구존】 중시하(重侍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과목】 일부(一賦)

부친성명】 박성원(朴盛源)

【부친품계】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관직】춘천(春川)/행도호부사(行都護府使)

【부친관직】鐵原鎭管/병마동첨절兵馬同僉節制使)


영조19 4/07 고시(考試)를 마치고, 한광조(韓光肇)․이환(李渙)․박성원(朴盛源)․신회(申晦)

김양택(金陽澤)․최태형(催台衡) 등 6인을 뽑아 즉일로 방방(放榜)하였다.

22 8/19 박성원(朴盛源)을 설서로 삼았다.

24 8/19 박성원(朴盛源)을 정언으로,

27 6/10 박성원(朴盛源)을 사서로,

30 12/14 박성원(朴盛源)을 교리로

31 4/05 박성원(朴盛源)을 지평으로 삼았다.

39 9/19 박성원(朴盛源)을 집의로

11/25 박성원(朴盛源)을 필선으로

11/29 박성원(朴盛源)을 집의로,

40 5/19 박성원(朴盛源)을 교리로

영조40 8/07 박성원(朴盛源)을 수찬으로,

41 1/05 박성원(朴盛源)을 사간(司諫)으로,

6/15 박성원(朴盛源)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영조41 10/23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徐命膺爲大司憲, 朴盛源爲大司諫, 金瑞應爲持平, 權穎爲獻納


44 3/23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11/04 박성원(朴盛源)을 승지로 삼았다.

12/18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49 1/29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

영조51 11/12 박성원(朴盛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조52/01/02 임금이 남강로를 복직시키고 박성원을 석방하다 》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남강로(南絳老)의 벼슬을 회 복시키고 박성원(朴盛源)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강로가 이담(李潭)을 탄핵한 것은 온 세상의 공론인데 형륙(刑戮)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세월이 오래 갈수록 더욱 슬퍼하였고, 박성원은 홀로 상소하여 그 억울한 죄를 풀어 주기를 청하다가 또 섬에 귀양 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렇게 명하였다. 대성인(大聖人)이 해와 달처럼 누구나 볼 수 있게 허물을 고친 것이 사책(史冊)에 빛난다 하겠다.”】

영조52/01/05 도총관 이계가 새로 제수된 자신의 자급을 거두어 주도록 청하다 》

도총관(都摠管) 이계(李?)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남강로(南絳老)의 벼슬을 회복시키고 박성원(朴盛源)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신 것은 곧 우리 대조(大朝)께서 성덕

(盛德)과 지선(至善)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높고 두터움이 같은 것이니, 억만년 끝이 없는 복이 이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신은 송축(頌祝)하는 끝에 또한 두렵고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남강로의 일이 있고부터 신이 대각(臺閣)에 들어간 것이 무릇 여러 번이었습니다마는, 감히 한번 말하여 천심(天心)에 감통(感通)하지 못하였습니다. 박성원에 대한 계청(啓請)으로 말하면 신이 실로 맨 먼저 내었습니다마는, 그 연약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성은(聖恩)을 저버린 죄는 신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장 뒤에 구계(舊啓)를 멈춘 것은 전의 허물을 뒤미처 속죄할 수 없는데, 도리어 이 때문에 영예를 가져와 총명(寵命)과 은포(恩褒)가 상례(常例)를 멀리 벗어났고, 원정(元正)에 은택이 지극히 인자한 하늘에 충만하여 국가가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이 된 것으로 말하면 모두 성충(聖衷)에서 스스로 결단하신 것인데, 도리어 여러 번 은유(恩諭)를 내리시어 신이 한번 말한 것으로 인연하여 깨달으신 바가 있는 듯이 하시었으며, 어제 임문(臨門)하여 수하(受賀)하신 것은 더욱이 죄진 천신(賤臣)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굽어살피고 대조께 여쭈어 신에게 새로 제수된 자급(資級)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왕세손이 답하기를,

“불고(不孤) 두 자는 이미 접때 경에 대한 비답(批答)에 하유(下諭)하셨거니와, 나는 일전의 연주(筵奏)도 불고 가운데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정조01/09/19 박성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다

정조2/ 01/23(갑신)

○ 戊戌正月二十三日午時, 上詣孝明殿。晝茶禮入侍時, 行左承旨鄭民始, 右承旨李鎭衡, 左副承旨朴盛源, 右副承旨李敬養, 同副承旨申應顯, 記事官鄭東浚·徐龍輔·金勉柱, 以次陪從。上具衰服, 詣孝明殿, 親行晝茶禮。儀註上同 仍還內, 諸臣以次退出。




21세 휘 朴祖壽 1-582 세성-태적-피정-사한-성원-종록-조수

순조 13/07/27 지례(知禮) 전 현감 박조수(朴祖壽),

족보( 증 이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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