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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3 (수)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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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선생의 애국충정
潘南先生의 爲國忠情
왜 반남선생은 목숨을 걸고서 사명(事明=親明)을 주장하고 사원(事元=親元)파에게 항거했을까.
이를 알기 위하여 고려(高麗)말기(末期)의 시대 사항을 대략(大略) 더듬어 보면 고려가 원래 원나라를 섬겨오다가 명나라 태조(太祖)가 세력(勢力)을 확장해오니 원나라는 자기 스스로 수도(首都)를 버리고 파천(播遷) 한 것으로 생각 됨니다. 그리하여 공민왕(恭愍王) 통치 18년(1269)에 사명(事明) 하기로 선회 하였던 것이다.
또 제주도에는 원(元) 세조(世祖)가 말을 방목하던 곳인데 명(明)이 원(元)을 물리치고 나서 임밀(林密)을 시켜서 말(馬)을 번식 시키도록 영을 내려 놓은 상태에서 채빈(蔡斌)을 사신(使臣)으로 보내와서 말 2000필을 조공(朝貢)하라고 하니 임밀이 왕에게 아뢰기를 “말이 모두300필(匹) 뿐인데 2000필(匹)을 조공(朝貢)하라고 하니 말이 2000필(匹)이 못되면 황제(皇帝)가 문책(問責)할것이며 우리들은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명나라 사신인 임밀(林密)과 채빈이 되 돌아가게 돼니 밀직사 김의(金義)를 시켜 말 300필을 몰고 요동(遼東)까지 가라고 보냈으며 또 동지 밀직사 장자온(張子溫)으로 조공가는 도로를 사통케 하였으며 오계남(吳季南)으로 요동(遼東)을 수비하게 하였던것이다.
공민왕23년(1374)에 자제위의 소년집단과 익비(益妃)와의 불륜이 드러남으로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이 공민왕을 시해(弑害)하니 태후(太后)는 왕씨종친 중에서 후사(後嗣)를 옹립(擁立) 하려 했는데 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이 국권(國權)을 장악하려고 신우(辛禑=우왕(禑王)) 를 세우코저하나 의론(議論)이 미결상태 인데 밀직사인 왕안덕(王安德)과 영령군인 유(瑜)等이 이인임의 뜻을 따라 큰소리로 왕의 대군인 우(禑)를 후사로 정했는데 이를 두고 누구를 세우리오 하니 이인임(李仁任)이 백관(白官)을 거느리고 우를 옹립하였는데 어떤자가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자고로 군왕(君王)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宰相)이 그죄를 받는것이니 皇帝가 만약 선왕(先王)의 사고로 군사를 이르켜 문책(問責)을 한다면 공이 면하지 못할것이니 차라리 원나라와 화친하는것이 좋을것 같다 하니 이인임(李仁任)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찬성사 안사기(安師琦)기를 시켜서 김의(金義)를 회유(回誘) 하여 蔡斌등을 죽이고 말을 빼앗아 원으로 도망가게해서 화친을 시도 하다. 11월에 왕이 시해당하니 조공도로를 사통시키기위해 갔던 장자온(張子溫)과 선공판서 민백훤으로 명(明)으로 가서 부고(訃告)도 전하고 전왕(前王)의 시호(諡號)도 받아오라 했는데 김의(金義)가 명사(明使)를 죽이고 도망을 가니 장자온등이 안주에서 되돌아오다 이르게되니 사람들이 의구심(疑懼心)이 생긴것인데 판밀직사 김서(金湑)를 원나라에 보내서 선왕의 초상(初喪)을 고하니 신우원년(1370) 정월에 선생(先生)과 정몽주,정도전 등이 선왕(先王)의 시해(弑害)와 채빈(蔡斌)의 죽음등을 명(明)나라에 자세히 알려서 의혹(疑惑)이 없도록 해야지 아니하면 생민(生民)이 화(禍)를 입을것이다 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함으로 누구를 보낼것인가 하니 선생이 판중추부사 최원(崔源)에게 왕이 시해를 당한것을 고하지 아니하면 황제(皇帝)가 의심이나서 문죄(問罪)한다면 온나라가 화를 입을것인데 재상(宰相)은 고할 생각을 아니 하니 경(卿)이 사직(社稷)을 위해서 가면 어떨까 하니 최원(崔源)이 한번 걸음하여 사직이 안정된다면 가리라 하니 이인임에게 최원의 의견을 말하니 할수 없이 최원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 시기(時機)에 변방에서 북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심왕(瀋王) 고(暠)의 손자인 탈불화(脫不花)를 옹립 하러 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신우전에 보면 2월에 원의 사자 눌합(訥哈)이 와서 묻기를 “전왕이 무자(無子)라고 들었는데 누구를 사위(嗣位) 할것인가‘ 라고 하니 이인임이 서둘러서 백관을 거느리고 효사관(孝思館)으로 가서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에게 우왕(禑王)을 섬길것을 맹서(盟誓)하다. 그 시기에 김의를 사주하여 채빈을 죽이게한 안사기가 돌아 왔는데 이인임이 후한 대접을 하니 드디어 선생이 상소하기를
“김의가 사신(使臣)을 죽인 죄를 당연(當然)히 문책(問責)해야 함에도 재상(宰相)이 김의와 동반한자를 심히 후대하는것은 안사기를 시켜서 김의가 채빈을 죽인 증거이니 만약 그의 죄(罪)를 바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그화(禍)가 사직(社稷)에 미칠것이다”. 라고 하다
또 한편으로는 회판사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서 태후에게 말하기를 눌합(訥哈)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너의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 청하기를 왕이 죽었는데 후사(後嗣)가 없으니 심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자 하니 제(帝)가 이국(爾國=너의나라= 고려)의 왕으로 봉하려 한것이지 왕이 유자(有子)면 심왕을 보낼 필요가 없다. 하더이다 하니 태후(太后)가 이인임(李仁任)을 불러서 내가 듣기로는 재상(宰相)이 김의(金義)를 북원(北元)으로 보낸지가 오래된것 같은데 경(卿)은 모르고 있었던건가 하고 물으니 드디어 선생(先生)의 상소(上疏)는 도당(都堂=의정부)으로 내려보내고 안사기(安師琦)를 순위부(巡衛府)로 하옥(下獄)하려하니 안사기(安師琦)가 도망가다가 민가(民家)로 들어갔는데 추적하는자가 그곳에 도착하게 되니 죄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 패도를 뽑아서 자살을 하다.
이인임(李仁任)이 종친과 문무백관들과 연명하여 우왕(禑王)을 옹립한 사실을 원(元)나라에 올리려 할때 선생과 임박(林樸)과 정도전(鄭道傳) 등은 선왕(先王)이 명(明)나라를 섬기기로 책정 하였는데 지금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 함은 부당(不當)하다고 서명(署名)을 아니하다.
을유(乙酉) 4월에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우문관(右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다.
5월에 원나라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오면서 말하기를 공민왕(恭愍王)이 원을 배신하고 명(明)을 섬긴 고로 왕을 시해한 죄(罪)를 용서한다 하니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등이 좋아하니 김구용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등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만약 원나라 사자를 맞이하면 온나라 신민(臣民)이 난적의 죄를 짓는것이니 훗날 무슨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왕(先王)을 뵈오리까하다.
이인임(李仁任)이 다시 일어서면서 글을 받지않고 정도전(鄭道傳)에게 원(元)의 사신을 맞이하라고 명령하니 정도전(鄭道傳)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 오든지, 아니면 결박하여 명(明)으로 보내리라”하고 원사(元使)를 맞이함이 부당(不當)함을 설명하는데 말투가 불손하거늘 이인임이 화가나서 정도전을 유배 보내려 하니 우왕과 태후가 위로하면서 회유하니 이인임이 일어나 나가버리다. 일이 이렇게 되니 선생(先生)과 정몽주(鄭夢周)등이 원사(元使)을 맞이함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항거한것이다.
정몽주의 疎曰“ 신이 들으니 천하와 국사를 경영하려면 먼저 계획을 정해야하며 계획이 미정이면 인심이 둘로 나누어 지나니 인심이 나누어지면 백가지가 화를 당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동방은 바다가에 위치해 있는데 고려태조가 당나라 말엽에 일어나서(건국하여) 중국을 예사 하였는데(중국을 섬겨왔는데) 섬긴것은 천하의 義主(의로운 임금)로 보았기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원씨가 난을 피해 도읍을 스스로 옮기므로 명나라가 크게 번성 하여 사해를 다 차지 하므로 상왕(上王)이 천명을 알고서 상국(上國)으로 받드니 황제(皇帝)가 가상히 생각 하여 왕(王)의 작위(爵位)를 봉해 준지 6년이 지난 이때에 새로 왕이 즉위한 지금에 적신 김의(金義)가 천조의 사신을 예송하다가 중로에서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로 도망가서 원씨와 모의하여 심왕을 드리려고 (심왕을 추대하려고 ?)하는데 이미 천사(명의 사신)를 죽이고 또 군주를 배신하였으니 죄역이 심한지라 마땅히 그 이름을 밝혀 그 죄를 상고하면 천자가 아래로 방백의 개 토살을 시킨 연후에야 그만 둘것인데
나라에서 시키지 않이한 김의의 죄를 짓지도 않이하고, 도리어 김서(金胥)를 시켜 원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오계남은 국경을 지키는 신하인데 요동을 정돈 하러간 삼인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장자온등은 김의와 일행인데 요동에서 일어난 사실을 알리지도 않이하고 공연히 환국했는데도 가만히 두고 문책도 아니하고 이제는 원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대신들이 예로 맞이할 공론을 하니 이를 말하자면 원에서 오는 사자는 맞이하기 싫은 쓸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원씨는 실국한지 오래며 먼길을 오는것은 한낱 먹거거리를 구하려고 오는것이며 명분으로 심왕을 세우려함은 자기네 이(利)를 취함이라 끊어버리면(거절하면) 우리의 감함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려 들면 도리혀 굣끼를 부릴것(교만케 만들것이니)입니다. 소문을 들으니 그의 조서(詔書)에 공민왕이 원(元)을 배반하고 명을 섬기는 대역죄이나 공민왕이 죽었으니 죄를 용서한다는데 우리는 본래 죄무(罪無)한데 무슨 용서를 받는다는 말인가 국가가 만약 예로 대접하여 보내면 이는 온나라 신민이 죄없는 대역죄로 소문이 사방에 퍼질것이니 이것을 어찌 참겠습니까 항차 명나라 조정에서 김의(金義)가 저지른 일을 듣고서 죄를 문책(問責)아니하면 반드시 우리가 사신을 적으로 보고 죽였다고 여겨서 만약 죄를 문책 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르켜서 수륙(水陸)으로 병진해오면 국가에서 무슨말로 대답하리오
볼이 없이 오는 소적 때문에 천하의 병사를 움직이는게 될것이니 이는 지극히 자명한 이치이며 사람들이 밤낮으로 묘당에 모여서 할말이 없을 것인데 이리되는 것은 어렵지 아닛하게 알수 있는 일입니다. 요전번에 사소한 변고가 있을 당시에도 재상과 백관들이 조정으로부터 힐책(詰責)을 당한 사실이 있었는데 지금 김의와 내통을 도모하고 상국과 절교한다면 난관에 처할것입니다 안사기가 정황을 인식하고 자살한것입니다.
안사기가 이미죽은후 조속히 계획을 세워서 민중의 분노를 해소시켜야 하는데 지금까지 문책도 아니하고 있으니 인심이 흉흉해서 다른 변고가 일어날까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복유전하 께서 결단을 내려서 원사를 잡아드려 원나라 조서를 몰수하고 오계남과 장자온과 김의와 행동을 같이한자들을 결박하여 명경(明京)으로 보내서 애매(曖昧)한 죄를 변론안해도 저저로 밝혀져서 이미 약속한데로 요동을 정돈하고 나서 군사를 양성해서 원나라를 정벌한다고 소문을 내면 원씨의 유민들이 멀리도망 가서 자취를 감출것이니 그리되면 국가의 복록(福祿)이 무궁할것입니다(고려사 정몽주전)
선생이 상소 왈(曰)
신이 관원으로 시종한지 여러해 되었습니다. 시종하면서 간언을 함은 예부터 내려온 제도입니다. 그런데 오는일을 말하려니 적지 아니한데 신(臣) 직책이 간관(諫官)이 아니라고 해서 감히 말을 아니하고 관직에 머므를것만 생각하리오 또 어찌 명예(名譽)를 얻기 위하여 입을 다물겠습니까. 재상과 백관들의 언로를 크게 열고 민생을 위한 대책을 말하라는데 지저린 신의 생각으로도 민생위한 대책이 많으나 나라의 대세가 불안하면 노력하여도 성과가 없을것입니다( 명을 등지고 원으로 돌아감을 말함)
지금의 형세를 말하자면 나무를 많이 쌓아놓고 그 밑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서 잠자는 형상이니 어찌 안심하리오 유식한자는 통탄아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왕이 죽고 장사도 지내기전에 명나라 사신(使臣)이 국경에 있는데 원을 섬기자는 공론을 이르켜 인심을 현혹시키는 자가 누구이며 (누가 이인임(李仁任)의 문책이 두려워서 원을 섬기라는 말들과, 안사기(安師琦)를 시켜 김의(金義)가 채빈을 죽이게한일들을 말함) 요동을 정돈하러가서 사람을 죽이게한 자는 누구이며(오계남이 요동을 정돈할 임무로 보냈는데 장자온과 김의와 합세해서 명나라사신을 죽임) 말을 와전시켜서 요동의 군인이 사신을 맞이하고저 하는척하고서 도망을 가서 사신을 도와 주지못하게 한 자 누구인고, 선왕이 사신을 호송하도록 명을 했는데 들지 안니하고 김의와 합모하고 대신의 말을 선왕의 명인양 여겨 안주에서 임의데로 돌아온것은 누구인가 (장자온이 사신을 호송하려 보냈는데 안사시가의 기별을 받고 김의(金義)를 사주하여 채빈을 죽이게하고 안주에서 돌아옴) 서북군이 요동을 공격하려한다고 말한자 누구이고, 김의의 서신을 째서(찢어서) 입을 다물게 하고 또 사람을 임의로 죽인 반적자의 어미를 영치하고도 문책을 아니함은 무슨일입니까.(지윤이 김의(金義)의 서신을 왕에게 상달아니하고 이인임(李仁任)에게 준 일과 김의(金義)의 모와 처를 옥에 가두고 죽이려하니 헌사들이 김의는 반역죄인이지만 부녀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죽이지 마십시요”하다 ) 김의가 배반한지가 한달이 지났는데도 조정에 알리려 하지도 아니함은 무슨 일입니까 최원이 사신으로 가는것이 과연 대신의 뜻입니까 (선생과 정몽주가 최원을 사신으로 갈것을 권해서 보냈다) 이제 또 원나라사자가 김의와 같이 반역을 한자가 같이 왔는데 반적이 스스로 돌아왔는데 그도 죄가 있는데도 본국에서 문책을 아니합니까. 그런즉 김의가 반역 한것은 반드시 지시한 사람이 있는것인데 이는 국가의 존망이 위급한 계기입니다.형편이 이러한것을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도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로움을 알수 있는데 지금말하고 있는것은 아직은 화가 미치지는 아니했으나 심한 화(禍)를 당할까 두럽습니다.
이치로 말하자면 은혜를 입은곳을 따르는것이 길하고 반역을 따르는 것이 흉하며 세력을 말하자면 명은 강하고 원은 약한것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아는 사실이라 순리(順理)를 버리고 역리를 따르는것은 천하에 못할짓이며 강세를 배반하고 약세를 따르는것은 잘못된 계획입니다. 신하가 되어서 선왕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천자의 사신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고 달아났으니 죄악이 이보다 더 큰것이 있겠습니까. 한두사람의 신하들이 심성(心性)이 불충(不忠)하여 매국(賣國)을 해서라도 자신의 이익(利益)만 취하려하니 이는 그 죄악이 국가의 화로 전가 될것이며 반드시 사직이 멸망하고 민생이 몹시 피곤해 질터이니 어찌 통탄하지 아니하리오 형세가 여기에 이르럿으니 전하(殿下)께서는 두 셋 신하들이 충직한 말을 듣고 조속히 판단하여 대처 하지 아니하면 장차 사직은 어떻게 되며 생민(生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릇 사람이란 이를 취하고 해를 피하며 생을 좋아하고 사(死)를 싫어함이 인지상정인데 신인들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스스로 헤아릴수 없는 위협을 무릅쓰고 감히 말함은 충심이 지극함으로 극해를 입는것을 생각하지 아니함인데 항차 명예를 위함이겠습니까. 또 관위를 탐내겠습니까.
마땅히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굽어 살피시고 대처해서 사직이 편안하고 민생이 혜택을 입으면 신의 일신이 만번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얼마안가서 선생이 다시 상소해서 이인임의 사원(事元)의 주장이 잘못이니 죄를 벌할것을 청하는데
왈(曰)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것이 무슨 죄책이 있드라도 모면하기 위함인데 지금에 모면 할수 없는 대죄가 네가지 있음을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능히 알고 있는데 어찌 대신(大臣)이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한가지 힐책당할 일이 두려워지면서 의리를 돌보지 못한즉 환(患)을 피히기 위해 못할것이 없는 고로 마음이 어두어져서 비록 남다른 지능(智能)이 있더라도 도리어 우자의 소견만 못하나니 신이 청하건데 몇가지 죄상을 면할수있는 방도를 진술하나이다. 구분것을 버리고 순리를 따라서 명나라를 섬기는것이 선왕의 뜻입니다. 선왕이 돌아가신날에 북원을 섬기자는 공의를 하니 신자로서 군부를 배반함이요 전하로 하여금 상국에 죄를 짓게하니 그죄가 한가지요
오계남이 북방을 진압하라고 했는데 사람을 임의데로 죽이고 요동을 정돈하는 사람에게 말을 지어서 그 군대를 놀라게 해서 그 군대가 죄당을 엄호해서 화를 자초하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것이 그 죄가 두가지요
김의가 사신을 죽이고 명나라에 조공할 말을 탈취하니 천하에 대악인이라 사람들이 목베기를 원하는 자인데, 이제 김의와 같이 반역한 자가 왔는데 그 죄상을 구문하지 아니하여 그죄가 국가에 파급되어 종사가 멸망하고 생민이 화를 입게되니 그 죄가 삼이요
김의가 반역한지 달이 넘도록 조정에 알리지 아니하며 또 최원의 명나라 행차를 감히 왕명을 어겨가면서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함이 여러달이되어 대국이 더욱 의심이 나도록 하니 그죄가 네가지입니다.
네가지 죄가 있음에도 벌하지 아니하고 모두 같이 그화를 받아드리려 함은 무었 때문인가요 전하께서 진실한 대신중 충직한자와 의론하여 판단하면 그 죄가 반드시 돌아갈곳이 있으니 그 득죄한 자를 잡아간두워서 대신으로 하여금 치죄(治罪)하게 하여 천자가 그사실을 살핀즉 어찌 이수(理數)를 분별하지 못하리오 종사와 생민의 안위가 이 한가지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이기회를 잃으면 후회 하여도 도리가 없습니다. 하니 말이 심히 충직하도다
우헌납 이첨과 좌정언 전백영등이 또한 상소 왈(曰)“ 수시중 이인임이 김의와 음모하여 천자의 사신을 죽이고 요행이 죄를 면하려 하니 이는 국인이 절치(切齒) 통분하는데 오계남은 요동을 정돈하는 자인데 임의로 사람을 죽이고 장자온은 김의가 사신을 죽인것을 고하지 아니했으니 마땅히 죄를 추국해야 하는데 이인임이 문책아니함이 한가지 죄이고
근자에 찬성사 지윤(池奫)이 서북면에 출진했다가 김의의 서신을 갖이고 와서 주상께 상달하지 않고 은밀히 이인임에게 주어서 전하가 여러번 찾고 분부한 뒤에도 민중에게 의혹이 나게한 죄가 두 번째 이며
원나라에서 온 서신을 지윤이 말의 요지를 삭제해 베껴서 전하에게 드리고 원래온 글은 이인임에게 주어서 이인임이 즉시 주상에게 알리지 않은죄 삼이며
백관과의 동맹한것이 전부가 전하의 의중인것 처럼 원과 밀통하여 심왕을 왕으로 세워서 후일에 화를 면하기 위하여 반복해서 농간을 부린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이인임과 지윤은 이와같은 화를 이르켰으니 청하건데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등을 주살(誅殺)하고 또 오계남과 장자온의 죄(罪)를 바로 잡아서 천자(天子)에게 사신을 보내어 알리소서. 라고 상소하니 이첨은 지춘주사로 전백영은 지영주사로 좌천시키다. 어시(於是)에 응양군 의 상호군인 우이렬과 친종호군 한리가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상서하기를 간관들이 재상을 논죄한것은 상세히 모르고 한일입니다. 간관이 옳다면 재상이 죄가 있고 재상이 무죄면 간관의 잘못이니 이를 판정해 보소서 하니 드디어 이첨과 전백영을 하옥하고 지윤과 최영으로 하여금 국문하고 연하여 선생과 전록생(田祿生)을 최영이 태장(笞杖)형으로 국문했는데 선생과 전록생은 심한 참변(慘變)을 당했는데 이인임(李仁任)이 이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유배(流配)를 보내라고 했는데 모두가 유배중에 졸(卒)하니 선생이 향년(享年) 44세인데 이때가 우왕원년 을묘 7월 초5일이다
이인임이 이첨과 전백영및 방순과 민중행 박상진(朴尙眞)등을 유배보내고 또 김구용 이숭인 정몽주와 임효선 염정수 염흥방 박형 정사도 이성림 윤호 최을의 조문신등은 모함하여 유배(流配)를 보냈다.
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1391)에 겸 전의시승인 방사랑이 시무 십일사(이시대에 힘써야할 11가지)란 상소문(上疏文)를 했는데 그 첫째 해결과 재를 말하기를 훈렬한 사람에게 사기를 도와주는것이 사직을 만세토록 부지할수있는 주석이요 충의한 사람의 기를 꺽는것은 만세에 난적으개 부월(鈇鉞; 부월은 왕이 장수에게 생사의 권한을 주는 도끼)을 주는것과 같습니다. 원하노니 작금에 공이 왕실에 있고 충이 사직에 있음에도 불행하게 모함을 입고 형육(刑戮)으로 운명한 분들이 안우와 이방실과 김득배와 박상충같은 사람인데 직계를 추가로 보증하고 小牢(송아지) 작은 물건이라도 특사하여 정혼(貞魂)을 위로함이 옳습니다하니 왕이 받아드리다
선생의 휘 는 상충(尙衷) 이요 자는 성부며 성은 박씨인데 나주군 반남현인 이다.
증조부의 휘는 의(宜)인데 급제이며 조부의 휘는 윤무(允茂) 인데 진사이며 고의 휘는 수(秀)인데 밀직부사와 상호군을 역임하였으며 검교군기감을 지낸 김정(金晶)의 여(女)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이 고려 충숙왕원년(1332년 원나라 지순2년) 공암현 마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반남현 서쪽 10리에 있는 마을인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선생의 유지라 말한다)
소시부터 성품(性稟)이 심후(深厚)하며 민첩해서 경사에 능통하였으며 속문(屬文)을 잘쓰고 또 시를 잘지으므로 재명이 크게 드러났다.
계사(癸巳) 공민왕2년(1353년;원나라 지정(至正) 13년) 국자감시에 응시했는데 여러사람들이 모두 선생이 장원(壯元) 하리라 믿었는데 방목(榜目)에 명의가 오르지 않이 하니 밀직공(密直公)이 실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불효(不孝) 하도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진사는 겨우 향역을 면하는 소영(所榮)이니 내가 곧 급제하리라” 하드니
과연 그해 을과에 이등으로 발탁(拔擢)되니 (고려사를 살펴보니 공민왕시대에 계사년 오월에 이색(李穡) 등과 같이 급제자가 5명이라 하다) 밀직공이 즐거워하면서
“효도하도다 오자(吾子)(내자식이여)여 라고 하였다.” 그이듬해에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學諭)등 세가지 직을(세차례 전임하여) 거쳐 국자(國子) 박사(博士)가 되고
무술년(1357년)에 상서도사에 이임되고 신축(辛丑)년 선덕랑으로 승진되어 대부시승(大府寺丞)을 지내고
임인(壬寅)년에는 승봉랑으로 옮겨서 봉차서(봉차서)의 령(令)을 지내고
계묘(癸卯)년에는 전의주부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조봉랑에 가자되면서 전교시승(전교사승)을 지내면서 장복(장복(章服: 무늬있는옷)을 하사 받았다.
그해 7월에 금주의 수령으로 나가서 삼년동안 치적을 이루었다.
기사(己巳)년 이월에 내직으로 들어와서 통직랑에 제수되어 삼사(三司)의 판관(判官)을 지냈는데 판관으로 있으면서 예조정랑에 제수되고 성균관 박사를 정미(丁未)년 12월까지 겸직하다가 병오(丙午)년에 국학을 마암의 북쪽으로 옮기니 이로부터 묘(廟)와 무(廡)에서 경서에 능통한 명유(名儒)를 선발하여 다른 관직과 겸임시키면서 인재를 육성하니 (文治가 일어났는데 선생이 제일먼저 피선되여 이후로는 매번 겸직을 하게 되다.(유백유가 찬술한 선생의 행장에 있음)
같은 시기에 경서를 가르친 선비로는 영가(永嘉)(안동) 김구용과 오천(烏川;영일) 정몽주 밀양(密陽) 박의중 과 향산 이숭인 등이 모두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산 이색이 수장(首長)으로서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니 무신(戊申)년 봄에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선생과 제공들이 분담하여 경전(經典)을 수업하고 매일 강의를 마치고 나서는 의의(疑義)가 있는 부분을 서로 토론하며 모두가 극진히 하였는데 이공이 변석(辨析)하고 절충(折衷) 하면 요지를 정주(程朱)의 학설에 부합하도록 힘쓰니 이로부터 동방의 성리학이 대흥하였다.(양촌 권근이 찬술한 이목은 행장에 있음)
또 선생은 이존오와 정도전과 김제안등과 더불어 서로 벗하고 친하여 강론함이 쉴 날이 없었다, (이존오전에 있음)
을유(乙酉)년에 조열대부에 승진되어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지냈다.
명나라 태조 사(四)년 신해(辛亥) 공민왕(恭愍王) 삼십이년(1371년)에 중의대부에 제수되고
태상소경 보문각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임자(壬子)년 겨울에 봉상대부로서 전리총랑을 역임하니 모두가 성균관의 직강을 겸직 하였다.
계축(癸丑)년 칠월(七月)에 모부인(母夫人) 상을 당했으며 십이월에 다시 중현대부에 승진되여 전교령을 지냈다. (행장에 있음)
고려의 말엽에 사대부가 부모의 복(服)을 백일만에 탈상을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삼년상을 마치고저 하였으나 부득이(不得己) 관직에 나아갔는데 육미(肉味)를 삼년상을 마칠때까지 먹지 않았다.(정인지가 쓴 고려사에 있다.)
성균관 사예로부터 전교령에 이르기 까지 모두 지제교를 겸직하다 갑인(甲寅) 겨울에 왕부인(王府印)에 들어가서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많은 의견이 인용되였으니 그당시의 명현(名賢)이다(행장에 있음) 선생이 일찍 부터 말히기를 “인생이란 한번 낳았다가 한번 죽는것인데 의리(義理)에 죽는것이 옳다”고하다(아들 평도공(平度公) 유문(遺文)에있음)
선생(先生)은 가정(稼亭) 문효공 이곡(李穀)의 여(女)에게 장가를 들어 생(生), 일남(一男) 일녀(一女)인데 남(男)의 은(訔)은 무진년 1388년 급제하여 좌명공신에 참여하였으므로 선생을 숭정대부 문하시랑찬성사 판호조사 수문관학사 지춘추관사 반남군에 증직되었다가 그후에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겸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판호조사금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선생(先生)은 천성이 침묵하여 말을 적게하고 정수(뛰여나게 우수함) 하면서 강개(잘못을 보고 참지못함) 하여 큰 뜻을 품었으며 경서에 박통하였고 더욱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였으며 한가로히 집에 있을때는 책을 보고 말을 항상 산업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고 겸해서 운명학(運命學)을 사수(師授)하지 아니하고 자득해서 남의 길흉(吉凶)을 십중팔구(十中八九)를 적중하다.
집에서는 효우하고 나라에서는 충의하며 위관에는 부지런하며 삼가서 늘 성적을 이루고 털끝만한 혐의를 받지안하며 불의(不義)로 부귀함을 보기를 아주 없인여겼다.
선생(先生)은 정사에도 장점에 있으며 나라의 향사(享祀)날에 예(禮)와 의전을 맡은 사람들이 행사(行祀)할 때 착오(錯誤)를 여러번 이르켜 예무를 맡은 제공(諸公)이 고정하고저 하나 이루지 못한것을 선생(先生)이 구전(舊典)을 참작해서 선후의 차례를 정하여 문부(文簿)를 성치하니 근거가 있어서 착오를 아니하게 되어 임효선이 예무담당인데 매일 그공을 치하하기를 “박선생((朴先生)의 문부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예를 담당하리“하니 그정통함이 이와 같드라
전조에는 과거를 볼때 응시할 선비를 미리 임명해서 선발했는데 기유(己酉)년부터 구법을 개혁해서 중원의 제도를 시행했는데 시험보기 하루전에 주문과 고시등 관원을 임명한 故其做題를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갑인년 봄 임시시험 볼때 염정수가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박상충과 정몽주가 아니면 누가 능히 정하리요 하드니 바로 염정수는 주문으로 임명되고 박, 정 양공은 고관(考官)이 되니 이로보면 그문장이 뛰어남을 알수있다. 일찍이 시를 지어서 대언인 임박에게 기증했는데 曰 충신과 의사는 대대로 상전하는데 종묘와 사직과 생민이 오백년을 이어왔네 어찌 간인들이 매국할것을 요량했으리 앉아서 역당들을 보고만 있으며 편히 잠을 잘것이냐 하니 임박이 대답을 못하다. 대개 선생의 행적과 문학이 한시대의 드러난 분들과 서로가 추복하였으며 그졸함에 국인이 슬퍼하고 사림에서는 더욱 애석해 하다. 혼자서 생각해 보건데 선생의 시문 수편이 東文選에 실려있고 사적의 대개가 고려사에 기재되여 있을뿐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문자가 흐틀어져서 추고할 수가 없은즉 이에 감히 모집된 글자만을 걷우어 기록한것이 대략 如右하니 이보다 더 난상 논의하여 더 갖출 선비가 있기를 바라나니
이상은 현석선생께서 숙종조에 선생님의 시호(諡號)를 노의하는 자료롤 작성한것을 근거로 번역 성문(成文)한 것인데 비재(非才) 천학(淺學)하여 표현이 원활하지 못한점 독자(讀者) 제현(諸賢)의 양혜(諒惠 諒解)를 바라오며 다만 왜 목숨을 걸고 강세(强勢)에 저항(抵抗)했는가를 알기 위(爲)한 목적(目的)입니다. 상고(詳考)해 보니 간신(奸臣)들은 자기 일신(一身)의 구명도생을 위(爲)하여 국가의 존립(存立)은 아랑곳없이 못할짓이 없는데 충신은 목숨을 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극명하게 들어나며 우암선생이 반양세고(潘陽世稿)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자고(自古)로 국가가 망(亡)에는 불세지인(不世之人=세상에 더없이 좋은사람)이 출현하여 부지하려 노력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을 죽이고 종족(宗族)까지 화(禍)를 당해가면서 명절(名節)을 드리우니 그 공이 한때에 미치지 못하나 그 가르침은 영세에 힘 입는다는 말이 새삼스러우며 우리후손된자 이 가르침을 각자 명심하고, 아직 까지는 세인(世人)이 모르는 분이 많으니 우리 조상에 이러한 분이 계심을 긍지를 갖이고 알리면서 살아갑시다.

2007년 1월 上澣 松川 寓舍에서 後孫 興陽 謹譯
鄭道傳이 潘南先生靈位에 올린 글 (祭文)
아아! 선생의 삶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아(疑訝)해 하였는데 선생이 돌아가심에 사람들은 더욱 의아해하도다. 세속에 살면서 말을 잘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여기며 또 그런 사람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시대에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유연하기가 갈대 같으나 선생은 그렇하지 아니하도다 침묵해서(과묵해서) 말이적고 오직 정의를 지키고 시세(時勢)에 부응할줄 모르니 소인들이 이 때문에 의아해 합니다. 선생은 눌(訥)하고 둔(鈍) 한것 처럼 현자를 두둔하고 세력에 아부할줄 모르는 도다. 사람들은 이록(利祿)이 있는 곳이면 온세상이 다 따르는데 선생(先生)은 그러하지 아니하고 차라리 구학(溝壑; 구렁, 구덩이)에서 굶어 죽을지라도 구차스럽게 利益을 취하지 아니하며 차라리 비천(卑賤)하게 일생을 마칠지라도 망령(妄靈)되게 불의를 구하지 아니하며 선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비록 머슴살이를 하든 거러시(거지)라도 친한 친구처럼 좋아하고 악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비록 조맹(趙孟)과 같은 세력을 가진자라도 질시하며 원수처럼여기니 소인들이 의아해 하도다.
선생(先生)은 오(迃;굽을오, 굽다.어귀장) 하며, 망(妄 망령이듬)하여 죽음을 당했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죽기를 두려워하고 삶을 소중히 여겨 치욕을 무릅쓰고 애걸하면서 부르짓거늘 선생은 그렇지 아니하도다 의리를 지키면서 편히 죽었도다. 차라리 호랑이에게 물려도 불의로 삶을 구걸하지 아니하도다 내몸을 죽여가면서도 나의 정도를 지키고 굴(屈)하지 아니하니 이것을 보고 소인들은 선생을 어리석음인가 의아해하도다
그러나 군자들은 말하기를 선생은 정도를 지켰도다 군주를 존중하고 백성을 보호하려고 했는데 세상이 받아드리지 못했고 의로운 정신은 몸에 사무쳐 있으나 뭇 소인들은 그를 모르니 한스러우며 충직한 말이 간절한데도 주상이 받아드리지 않이하니 이로 인하여 선생의 운명이 빗나갔으니 시기를 잘못 맞남이로다 선생은 선하시매 가(可)히 복록을 누리면서 세상을 마치어야 하는데 그 명을 다 누리지 못하였으니 후사(後嗣)에게 유경(遺慶)은 드리워 질것이나 자신은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선생이 불행하시매 이도 또한 의아해 하도다
그러나 나는 저 소인들의 의심이 모두 잘못임을 알며 모두 선생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道)가 행(行)하고 불행(不行)함은 시세이며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자기에게 있음이 않이니, 이것이 선생의 운명인것을 어찌하리오 자신은 정의를 행할뿐이다.
선생의 생애를 나는 신임하고 선생의 죽음을 나는 더욱 신임 하노라. 선생은 욕심이 많거나 야비한 사람과는 같이 귀(貴)해지려고 하지 않고 간사하고 망령스러운 자들과는 같이 살려고도 아니한즉, 그 죽음으로서 그 몸을 보전함이요, 그 불귀로서 오히려 영화를 여기니 무엇을 의심하리오.
그러면 무었 때문에 슬피울고 백성들이 선생의 혜택(惠澤)을 못입은데 대한 울음이요 우리들이 정도를 의지할곳 없음을 슬퍼하는 울음이오 우리들이 본받을 곳이 없음이 슬퍼서 우는것이니 사자를 위한 울음이 아니요 생자를 위한 울음이니 울면서 말하되
“ 아 아 ! 슬프도다 선생님이여 이제는 그만이로다. 시기를 못맞남이요 ! 사람들은 선생님을 다 모르도다 세도(世道)가 험난(險難)함을 민망히 여겨 차마 말을 아니 할수 없었도다.
그 미소(微小)한 체구(體軀)로 어찌하여 저 성난 파도와 풍랑을 막으려 했는가 험난(險難)한 파도에 휩쓸려 빠져도 구해내지 못하여 마침내 운명(殞命)하였네 사람들은 선생을 이렇게 호평하는데 일시적으로는 오명일세, 구차스러우나 돌아가실곳은 마련되있으니 심중을 편히하소서 후세에는 높이 현달할것이나, 우매(愚昧)한자는 알지못하리라 우리들은 의리를 등지고 살고 있으나 도무지 의지할곳을 몰라 당황하노라.
아 아! 살아 있음이 면목(面目)이 붉어지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슬프도다
오호라 구원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선생님 있는 곳으로 가리라
2007년 1월 上澣 朴 興 陽 謹譯




5世 諱 朴尙衷 文正公 (1332--1375) (충숙왕1--우왕1)

--민족문하 대사전--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金九容)(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李詹) (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田祿生)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삼가하며 사람이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朴 尙 衷 年譜
1353 恭愍王2 文科及第
1354 恭愍王3 成均館 學諭. 博士 종9품
1358 恭愍王7 尙書省 都事 정7품
1361 恭愍王10 先德郞 大府寺丞 종6품
1362 恭愍王11 承奉郞 奉車署令正 정6품
1363 恭愍王12 朝奉郞 典校寺丞 典儀主簿 종5품
7월 知錦州事
1365 恭愍王14 通德郞 三司判官 정5품
1367 恭愍王16 禮儀正郞 정5품
1369 恭愍王18 朝列大夫 成均館 司藝 知製敎 종4품
1371 恭愍王20 中議大夫 大常寺少卿 寶文閣應敎 成均館直講 知製敎 정4 품
1372 恭愍王21 奉常大夫 兼職如前 정4품
1373 恭愍王22 中顯大夫 典敎寺令 知製敎 종3품
1374 恭愍王23 知貢擧 (考試官)
1374 知王府印 參聞國政
1375 禑 王 1 遣判 宗簿寺事 崔源 如京師 告恭愍王之喪 上疏
奉順大夫 判典敎寺事 右文館直提學 不署呈北元書(정3품)
再上疏 李仁任 事北議之罪請誅之
禑 王 1 7월5일 被逮杖流 知靑敎驛 卒
1391 恭讓王3 12월 典醫寺丞 士良上疎請褒贈賜祭
1401 太宗 1 贈崇政大夫 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 平度公策勳封君后推恩
1416 太宗 16 贈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使兼經筵事
錦城府院君 平度公拜相后推恩
1681 肅宗 7 宋時烈筵啓 贈諡號 文正
1681 肅宗 7 腏 五冠書院
1685 肅宗 11 賜額
1694 羅州潘溪書院建立 賜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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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 중에서 문정공의 기록 발췌(拔萃)
§ 박상충(朴상衷)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릇 향사(享祀)는 예의사(禮義司)가 다 맡았으나 전일(前日)에는 문부(文簿)가 없었음으로 여러번 착오를 일으켰는데 박상충(朴尙衷)이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條目)을 지어 손수 써서 사전(祀典)을 삼으니 그 후로는 이 책임을 이은 자가 얻어 의거할 바가 있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전교 령(典校令)을 제수하니 때에 사부(士夫)들이 부모상(父母喪)을 100일만 입고 곧 벗었으나 박상충(朴尙衷)은 3년을 마치려 하매 얻지 못하고 드디어 직(職)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까지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에 김의(金義)가 조정(朝廷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는데 그 후에 김의(金義)의 수종자가 왔거늘 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가 후하게 대우하는지라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김의(金義)의 사신을 죽인 죄는 마땅히 심문하여야 될 것이거늘 재상이 그 종자를 대우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니 이는 사기(師琦)가 김의(金義)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것입니다. 그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니 이제 만약 그 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사직(社稷)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하니 태후(太后)가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리어 안사기(安師琦)를 베어 머리를 저자에 달았다. 이인임(李仁任) 등이 또 종친(宗親)과 기로(耆老)와 백관(百官)과 더불어 연명(連名)하여 글을 만들어 장차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 하거늘 홀로 박상충(朴尙衷)이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선왕(先王 공민(恭愍))이 이미 남조(南朝 명(明))를 섬기기로 책(策)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북조(北朝)를 섬기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름을 쓰지 않았다. 조금 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북원(北元) 사신이 오거늘 박상충(朴尙衷)이 또 상소하여 물리칠 것을 청하기를,
신(臣)이 수년간 시종(侍從)의 1원(員)으로 있었으니 시종관(侍從官)으로 말을 함은 옛 제도입니다. 근자에 일을 가히 말할 것이 적지 않으나 신이 감히 말하지 않음은 어찌 직책이 간쟁(諫諍)이 아니라 하여 남의 직책을 침범함을 염려함이며 또 어찌 명성(名聲)을 가까히 함을 싫어하여 침묵함이리요. 지금은 언로(言路)를 크게 열었으매 재상(宰相) 백집사(百執事)가 얻어 말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대개 백성에 편리한 꾀를 듣고자 함입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나라 백성을 편케 할 꾀가 많으나 대세가 편치 않음이 있으면 비록 백성을 편케 하고자 하나 가히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정히 이른 바 섶을 쌓아 아래서 불을 질러 놓고 그 위에 잠을 자면서 불이 미처 타지 않음으로써 편안하다고 하는 격이니 식견(識見) 있는 선비는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요. 선왕(先王)이 방금 세상을 떠났으나 장사하지 못하였고 대명(大明) 사신이 아직 국경에 있거늘 문득 북(北)을 섬긴다는 이론을 일으켜 인심으로 하여금 현혹(眩惑)케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정요위(定遼衛)에서 보낸 사람을 함부로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며 거짓말을 선창하여 정요 군인(定遼軍人)으로 사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도망가게 하고 돌보지 않게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선왕(先王)이 명하여 사신을 호송케 한 자가 김의(金義) 뿐이 아니며 대신(大臣)으로서 선왕(先王)의 명(命)을 받아 안주(安州)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돌아온 자가 어떤 사람이며 서북군(西北軍)으로써 정요위(定遼衛)를 치고자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김의(金義)의 편지를 찢어서 입을 멸하고 이른 바 사람을 함부로 죽여 일을 낸 것과 반적(叛賊)의 모당(母黨)을 두고 묻지 않은 것은 어찌함이며 김의(金義)가 반(叛)함이 달이 넘어도 조정에 아뢰지 않고자 함은 어찌함이며 최원(崔源)의 사명을 받듦이 과연 다 대신(大臣)의 뜻에서 나왔음인지요. 이제 또 듣건대 북방(北方)이 사람을 시켜 김의(金義)와 같이 반(叛)한 자와 더불어 함께 온다 하니 반적(叛賊)이 스스로 돌아옴은 어찌 몸에 죄가 있어도 본국(本國)이 묻지 않으리라 함이 아니리요. 그러면 김의(金義)의 반(叛)함은 반드시 그렇게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이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한 큰 기틀이라 사세가 이와 같으니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그 이해와 시비가 있는 바를 알 것이거늘 지금 말하는 자가 조금도 이에 미치지 않음은 죄를 심히 두려워함입니다. 이치로 말하면 순(順)을 따르면 길하고 역(逆)을 좇으면 흉하고 형세로 말하면 남(南)은 강하고 북(北)은 약하니 이것은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대개 신(信)을 버리고 역(逆)을 좇음은 천하(天下)의 의(義)가 아니요 강(强)을 버리고 약(弱)을 향함은 오늘날의 계책(計策)이 아닙니다. 신자(臣子)가 되어 선왕(先王)의 대국(大國) 섬기는 뜻을 위반하여 천자(天子)의 사신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았으니 죄악이 누가 이보다 더 심하리요. 그런데 한두 사람의 신하가 마음에 불충을 품고 나라를 팔아 스스로의 이(利)를 도모하고 그 죄악으로써 나라에 화(禍)를 전가(轉嫁)시켜 반드시 종사(宗社)가 멸하고 생민(生民)이 문드러져 죽은 뒤라야 그만두려고 하니 가히 통탄하지 않으리까. 사세가 이에 이르렀는데 전하(殿下)께서 두 세 대신(大臣)의 충직(忠直)한 자와 더불어 일찍이 분변하고 처치하지 않으면 장차 종사(宗社)를 어찌하오며 장차 생민(生民)을 어찌 하겠나이까. 또한 이(利)를 따르고 해(害)를 피하며 생(生)을 좋아하고 사(死)를 싫어함은 모든 사람의 같은 뜻이온데 신이 어찌 풍병(風病)을 앓는 자이리요 마는 이제 스스로 불측(不測)의 주륙(誅戮)을 각오하옵고 감히 말함은 충분(忠憤)이 지극하오매 그 해(害)됨을 돌보지 않음이오니 하물며 명망을 가까이 함이오며 관(官)을 침범함이오리까. 만약 전하(殿下)께서 신의 말을 곡진히 살피시어 처치함에 있어서 종사(宗社)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며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길이 힘입게 하시면 신의 한 몸은 일만번 죽어도 한(恨)이 없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또 상소(上疏)하기를,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김에는 죄책을 면하도록 함이 옳은 것이온데 지금 면하지 못할 큰 죄가 네 가지 있사오니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능히 알 수 있거늘 어찌 대신(大臣)으로서 알지 못하리요. 그러나 한갖 힐책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고 의리를 돌아보지 않으면 무릇 가히 환(患)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 않음이 없을 것인 바 그러므로 마음에 가린 바가 있으면 비록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하여도 도리어 어리석은 자의 보는 것보다 못하오니 신은 청컨대 그 죄를 헤아려서 조정에 죄책을 면할 방법을 베푸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위곡(委曲)하게 순종하여 대명(大明)에 복사(服事)함은 선왕(先王)의 뜻이 있거늘 선왕(先王)이 돌아가신 날에 드디어 북(北)을 섬기자는 의론을 선창하여 신자(臣者)가 되어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전하(殿下)로 하여금 상국(上國)에 죄를 얻게 하니 이것이 그 죄의 첫째요 오계남(吳季南)이 북방(北方)을 진수(鎭戍)할 때 정요위(定遼衛)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말을 만들어서 그 군사를 놀라게 하고는 이에 그 죄를 가리고자 악에 당(黨)하고 화를 불러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니 그 죄의 둘째요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고 진헌(進獻)하는 말을 빼앗아 반(叛)하였으니 천하(天下)의 큰 죄악이라 사람마다 죽이기를 원하는 바이거늘 이제 김의(金義)와 같이 반(叛)한 자가 왔는데 곧 추궁하여 힐문치 않아 그 죄로 하여금 국가에 미치게 하여 비록 종사(宗社)를 멸하고 생민(生民)을 죽여도 생각하지 않으니 그 죄의 셋째요 김의(金義)가 반(叛)한 지 달이 넘어도 조정에 알리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최원(崔源)이 가려 하는데 감히 임금의 명을 어기게 하여 국경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여러 달로 늦추어 대국(大國)으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죄의 넷째입니다. 네 가지 죄에 그 한가지만 있더라도 족히 이로서 죽일 것인데 하물며 이 네 가지 죄가 있음에도 능히 죄주지 않고 같이 그 화를 당하고자 함은 어찌함입니까. 전하(殿下)께서 진실로 능히 대신(大臣)의 충직한 자와 더불어 의론하여 분변하시면 죄가 반드시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오니 이미 그 죄인을 얻으면 곧 잡아 가두고 대신(大臣)을 시켜 표문(表文)을 받들어 천자(天子)께 주달(奏達)하여 살피기를 기다리시면 천자(天子)께서 총명하여 어찌 분변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안위(安危)가 이 일거(一擧)에 있사오니 한번 이 기회(機會)를 잃으면 후회[臍]한들 어찌 미치리까.
라고 하였다. 간관(諫官)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이 또한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論)하니 이첨(李詹) 등을 옥에 내려 국문하매 박상충(朴尙衷)이 그 말에 연좌되므로 옥에 가두고 매쳐 귀양보내니 중도에서 죽었는데 나이 44였다. 성품이 침묵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다.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평상시에 다만 책만 보고 말이 산업(産業)에 미치지 않았고 겸하여 성명(星命)에 통하여서 사람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 집에 있어서는 효우(孝友)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며 삼가하고 사람이 불의(不義)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일찍이 시(詩)를 대언(代言) 임박(林樸)에게 보내니 그 시(詩)에,
&#985170;충신(忠臣) 의사(義士)가 대대로 서로 전하여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이 500년이 되었는데 어찌 간인(奸人)이 능히 나라를 팔아 앉아서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편이 잠자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리요
라고 하였으나 임박(林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우물우물하고 말았다. 아들은 박은(朴은)이다

§ 전록생(田祿生)
○ 신우(辛禑) 초에 간관(諫官)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을 벨 것을 청하니 우(禑)가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을 옥(獄)에 내리매 말이 전록생(田祿生)과 박상충(朴尙衷)에게 연관된지라 매쳐 귀양보내니 모두 길에서 죽었다.
§ 이존오(李存吾)
이존오(李存吾)의 자(字)는 순경(順卿)이요 경주(慶州) 사람이니 용모와 자태가 단정하며 정결하고 간묵(簡)하여 말이 적었다. 일찍이 학문(學問)에 힘써 강개한 지절(志節)이 있었다. 나이 10여 세(歲)에 12도(徒)에 예속되어 강물이 넘친다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니 큰 들이 다 함몰하였으나 높은 산은 홀로 의연하였다.고 하매 식자(識者)가 기이(奇異)하에 여기었다.
○ 공민왕(恭愍王) 9년에 급제하여 수원 서기(水原書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선보(選補)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과 더불어 서로 벗하고 친하여 강론함이 쉴 날이 없으니 크게 사람들의 칭상(稱賞)한 바 되었고 여러번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었다.
§ 이색(李穡) ①
이색(李穡)의 자(字)는 영숙(穎叔)이니 찬성사(贊成事)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과 달라 글을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이미 명성이 있었다. 이곡(李穀)이 원(元)에 벼슬하여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매 이색(李穡)은 원나라 조정 관원의 아들로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에 보충(補充)되어 재학(在學)하였는데 3년만에 이곡(李穀)이 본국(本國)에서 죽었으므로 원(元)으로부터 분상(奔喪
<공민왕> 16년에 성균관(成均館)을 중영(重營)할 때 이색(李穡)으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겸(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삼고 생원(生員)을 더 두매 경술(經術)의 선비인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을 택(擇)하여 모두 타관(他官)으로써 교관(敎官)을 겸하였다.
§ 정도전(鄭道傳) ①
정도전(鄭道傳)의 자(字)는 종지(宗之)요 검교 밀직 제학(檢校密直提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여 충주 사록(忠州司錄)에 선임되고 여러 번 옮겨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잇달아 부모 상(喪)을 당하여 묘(墓)에 여막(廬幕)을 지어 복상(服喪)을 마치니 불러서 대상 박사(大常博士)를 제수(除授)하였다. 왕이 몸소 종묘에 제사할 새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도형(圖形)을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만들게 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 예문 응교(藝文應敎), 성균 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였으며 문학(文學)으로 칭찬을 받아 왕이 매우 사랑하였다.
김의(金義)가 제(帝)의 사신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는데 현릉(玄陵)의 부음(訃音)을 듣고 갑자기 다른 생각을 내어 사신을 죽이고 호(胡 북원(北元))에 달아나 가거늘 경(卿)이 정몽주(鄭夢周), 임박(林樸), 박상충(朴尙衷)과 더불어 집정(執政)에게 사뢰기를, 선왕(先王)이 돌아가시고 천사(天使)가 돌아가지 못하니 일찍 조정(朝廷)에 알리지 않으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라 하였다.

§ 이인임(李仁任) ①
이인임(李仁任)은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의 손자(孫子)이다. 음서(蔭敍)로 전객 시승(典客寺丞)에 보임(補任)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7년에 좌부승선(左副承宣)을 제배(除拜)하였는데 8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의주(義州)를 함락하매 왕이 이인임(李仁任)을 명하여 서경 좌무사(西京左撫使)를 삼아 이를 방비케 하였다가 적(賊)이 평정(平定)되매 공(功)을 2등(等)으로 책봉하였다
신우(辛禑) 원년(元年)에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 사예(司藝) 정도전(鄭道傳) 등이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985170;속히 사신(使臣)을 보내 <공민왕의> 상(喪)을 고함이 마땅하다.&#985171; 하니 이인임(李仁任)이 말하기를,
&#985170;사람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리니 누가 가겠는가.&#985171;박상충 등이 판종 부사(判宗簿事) 최원(崔源)에게 말하기를
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였는데 상(喪)을 고하지 않으면 황제(皇帝)가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만약 혹 죄(罪)
를 물으면 일국(一國)이 모두 그 화(禍)를 받을 것이데 재상(宰相)이 그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 그대가 사직(社稷)을 위하여 가겠는가 하니 최원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진실로 편안하다면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끼리요 하는지라
박상충 등이 그것을 이인임(李仁任)에게 고하니 할 수 없이 이를 따랐다. 때에 변보(邊報)가 있었는데 북원(北元)이 장차 군사로써 심왕(瀋王) 왕호(王暠)의 손자(孫子) 탈탈불화(脫脫不花)를 고려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이인임(李仁任)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효사관(孝思館)에 나아가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에 맹세하기를,

간관(諫官)이 그른 것이니 변백(辨白)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거늘 드디어 이첨과 전백영을 옥(獄)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池奫) 등을 시켜 국문하니 공사(供辭)가 박상충, 전록생(田祿生)에게 관련되므로 최영(崔瑩)이 전녹생, 박상충(朴尙衷)을 매쳐 국문하기를 매우 참혹히 하매 이인임(李仁任)이 말하기를,
이들을 꼭 죽일 것은 없다. 하고 이에 귀양보냈는데 모두 도중에서 죽었다.
이첨과 전백영 및 방순(方旬), 민중행(閔中行), 박상진(朴尙眞)을 곤장 쳐 유배보내고 또 김구용, 이숭인, 정몽주(鄭夢周), 임효선(林孝先), 염정수(廉廷秀), 염흥방(廉興邦), 박형(朴形), 정사도(鄭思道), 이성림(李成林), 윤호(尹虎), 최을의(崔乙義), 조문신(趙文信) 등도 자기를 해치려 꾀하였다고 모두 귀양보냈다

<가정집> 고려 말기의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시문집
목판본. 20권 4책. 초간본은 1364년 아들 색(穡)이 편집하고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간행하였으나 병화로 없어지고, 1422년 후손 종선(種善)이 중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판본이 소실되자 후손 기조(其祚)가 1635년 대구에서 세번째로 중간하였으며, 지금 전해지는 책은 1662년에 후손 태연(泰淵)이 전주에서 20권 4책으로 중간한 것이다.
원나라에서의 오랜 관직생활에서 보고 듣고 조사한 내용을 기록하였으므로, 당시 원(元)나라와 고려와의 관계 및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1973년 4간본을 대본으로 하여 성균관대학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近思錄> 1370(공민왕 19년) 李仁敏이 중국의 근사록을 복간한 책,
보물 제262호. 목판본. 4책. 경북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의 권정우(權廷羽) 소장. 이 책은 판식이나 자체(字體)로 보아 원판(元板)을 본떠서 새긴 듯하다. 제14권 제15장 끝에 성산이씨간우진양(星山李氏刊于晋陽)이라는 전문(篆文)이 새겨 있고, 그 다음의 종형인(鐘形印) 안에는 홍무 3년(洪武三年), 정형인(鼎形印) 안에는 이노숙(李魯叔)을 각기 인문(印文) 모양으로 새겨 놓아 간행자와 간행연대 간행처를 밝혔으며, 경술기축삭성산노숙근지(庚戌己丑朔星山魯叔謹識)라고 자서(自署)한 발문이 있다.
이 글에서 보면, 당시 진주목사 이인민이 경술년(1370년)주로 부임할 때에 사예(司藝) 박상충(朴尙衷)이 기념으로 《근사록》을 인민에게 선사하였다. 인민은 평소 이 책을 구하려고 하던 중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진주에 와서 이를 곧 중간하였다. 고려본이 극히 희귀한 오늘날 비록 중국판의 복각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함은 물론이고, 중종 때 유신(儒臣)인 권

벌(權틜)의 수택본(手澤本)이라는 점과 정조가 친히 서문을 지어서 붙였다는 데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높다. 즉, 권벌이 평소에 애독하여 늘 소매에 넣고 다녔다고 하며, 중종 때에는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까지 하였다는 유래를 알게 된 정조는 권벌의 후손인 권만(權萬)에게 명하여 궁중으로 책을 가져오게 하여 보았고, 1794년(정조 18) 1월에는 <어제충정공권벌수진근사록서(御製忠定公權틜袖珍近思錄序)>를 지어서 승정원좌부승지인 서영보(徐榮輔)에게 명하여 글씨를 써서 후손에게 보내어 오늘날까지 간수해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문정공의 기록 발췌(拔萃)
태조1 8/23 김승득(金承得)이 박상충(朴尙衷) 등을 지윤(池奫)에게 무함(誣陷)하여 모두 외방(外方)으로 폄출(貶
黜)되었는데, 李崇仁도, 또한 대구현(大丘縣)으로 폄출되었다.
세종4 5/9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朴은 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세종13 3/12 고려 말기에 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최표(崔彪)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
中)의 무리들은 비록 산직(散職)을 당하여도 교관(敎官)이란 명칭으로 성균관에 임명되어 도학(道學)을 강론하니, 사부(師傅)의 직임이 핍절되지 않았고 수업하는 무리도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중종17 3/1 당시의 재상들은 모두 권신간신이었으니 이인임(李仁任)같은 사람은 오로지 편당 심기만 일삼고
국론(國論)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비록 박상충(朴尙衷)의 무리가 있었지만 말한 일이 모두 쓰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중종19(1924) 2/12 전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삼공(三公)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을 부르라.하였다. 전교하기를,
세자빈을 자전(慈殿)께서 이미 간택하셨는데, 박호(朴壕)의 딸만큼 합당한 사람이 없다. 다만 가문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매, 영상 남곤(南袞) 등이 아뢰기를,박호의 아비는 박강(朴薑)이고 강의 아비는 박은(朴) 인데 다 훈신으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습니다. 박은의 먼 조상인 박상충(朴尙衷)은 전조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고,
숙종7 1/21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송시열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송시열이
박세채(朴世采)이상(李翔)윤증(尹拯)을 불러서 고문(顧問)에 대비할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시열이 또 말하기를,정몽주와 같은때에 박상충(朴尙衷)이 있었는데, 정의롭고 매우 충성 스러웠으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명신 이었습니다. 그런데 간신의 무함(誣陷)을 받아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니, 이 사람은 우리 나라에 공을 끼친바가 매우 큽니다. 새가 유곡(幽谷)에서 나와 교목(喬木)에 옮기듯이 선왕(先王)의 높은도(道)를 배워 오랑캐를 배척하고, 중국을 존숭(尊崇)하여 동방인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예의(禮儀)가 있음을 알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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