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ㆍ작성자 박대서
ㆍ작성일 2019-01-17 (목) 10:59
ㆍ추천: 0  ㆍ조회: 189       
ㆍIP: 59.xxx.11
오창집을 읽으며

요며칠전 부터 미세먼지가 극심하여 초미세먼지 경보발령 문자도 오고해서 집에서 쉬면서 오창집을  꺼내  틈틈히 보고 있습니다.

사실 매일 쉽니다.


선조를 호칭할 때 어느 선조는 시호를 부르고 어느 선조는 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시호는 사후에 받는 것이 대부분이라 본인이 좋아라 지은 호를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지난 11월 오창공 휘 동량 선조님 시제에 참례하고 '오창집' 이라는

좋은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역사시간이면 누가 무슨 책을 지었느니 하는데 그걸 볼 수도 없었는데...있어도 못 읽지만요...

평이하게 쓰신 시에 번역까지 하셔서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습니다.


오창공께서는 20여년간 안치라는 유배를 셔서 외로움이 구구절절 배어있는 시가 많습니다. 

20년간 도성을 떠나 시와 술과 자연과 함께 외로움을  달래가며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첫머리에 분진이란 찾아보니 통진의 신라 때의 옛이름입니다. 

미세먼지도 사라졌다기에 책장을 넘기다가 불현 듯 책을 옆에 끼고 으로 봉주할아버지의 숨결을 찾아 나섰습니다. 

봉성리 입구에 작은 공원이 있고 앞산이 봉성산(전류산이라고도 했다)이고 시에 나오는 대로 앞에 개천도 있고, 오른쪽으로 돌면 봉주할아버지께서 술을 싣고 오신 나룻터 전류리포구가 있습니다. 전류리포구에서 뭔가 포장해 가는 사람이 있어 물어보니 숭어랍니다.


봄바람 불면 다시 와서 한잔 해야겠습니다.


오창공께서는 호를 기재. 오창. 봉주 셋을 쓰셨는데 봉주가 왠지 가장 친근한 느낌이 드네요. 봉성산을 둘러보시고 봉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오창공께서는 글도 잘 쓰시고 중국어에 능통하셔서 선조 때에 외교관을 하셨지요. 그래서 그런지 시를 일기 쓰시 듯 쓴거 같아요. 선조 수릉관을 하셨는데 이거 대단한 거더라구요. 후임 왕이 선왕의 수릉관을 한 공이 크다고 특별대우를 하더라구요. 수릉관 아래에는 능참봉이 있는데 직급은 낮아도 이 역시 대우를 하고 또 아무나 하는게 아니더라구요

1612년 광해군 4년 (43세)의금부 판의금부사. 추관(推官)으로 있을 때, 무고사건이 있어 연루자들을 용서하려다가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직첩을 도로 받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1613년,44세) 계축옥사 때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해  또 문외출송되어,  1614년(45세)에 이곳 통진으로 옮겨오신 것으로 연결연결 되어진다. 무고사건에 대해 다음에 알아보겠습니다.


같은 일로 유배를 간 신흠과 모기얘기를 시로 써서 편지를 보냈는데 재미있습니다.


맏형 휘 동망은 1615년 49세에 성절사로 가다가 길주에서 돌아가셨는데 이 때 신흠이 만사를 썼다. 두분이 절친이셨구요.


한바퀴 돌면서 복숭아 과수원을 찾아 보았는데 봉성리에는 없고 전류리 도로변에 한 곳이  있어요.


한 3년 이곳에 계시다가 이후 조정에서 1616년(47세) 아산으로 멀리 보내는데 이 때 신흠은 춘천으로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를 간다.

북청과 강진 유배는 호된 형벌에 속한다.


이 때 님이신 휘 동열*께서는 나주목사를 끝으로 반남에 귀향하시어 중풍으로 병환에 계시다가 1622년 58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나이드신 소실을 맞이하여 정답게 지내신다고 쓰셨는데 오래 사셨나봐요. 남곽공 집안에서  '무명조비' 이 분께  술 한잔 올리시는게 어떠실지..

병수발 드셨을테고 임종도 정부인 할머니와 함께 보셨을 거란 생각이 들고, 할머니 92세 까지 사셨으니 서로 의지하며 오래 사셨을 겁니다.

형을 사랑하는 동생분이 시로써 증언하신 내용이니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시에 있길래 생각해 본 것이니 탓하지 말아주십시요.

실은 저도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런 소실이 있다면 좋겠구나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뭔...


오창공댁하면 술맛을 빼놓을 수 없지요. 봉주할아버지께서 술을 항상 드실 수 있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그윽한 맛의 술을 맛보여 주시는데 낮술에 약한지라 혀끝으로만 살짝 맛을 보았는데 여기저기 탄성이 나오더라구요. 지난해에는 예의 깍듯하시고 여러분 모두 좋아하시는 대종중의 일꾼이신 민우님께서 저에게 특별히 셔서 달빛을 벗 삼아 홀짝 했답니다. 만드신 분, 주신 분, 안드시고 주신 분 모두 감사합니다.


이후 봉주할아버지는 아산으로 옮기시고 아드님들과 함께 고용산을 오르셨다(52-3)고 쓰셨습니다. 산 바닷가 고기잡이배에서 갓 잡은 고기를 회를 떠서 술 한잔 하시고 회맛이 좋다고 하셨지요. 또 올라가시기로 하였는데 추워서 포기하셨다네요. 당시 옷이 솜바지였지요. 요즘 옷 잘나오지요. 제사상에 먹을 것만 차릴 것이 아니라 옷도 입으시라고 올려드리면 안될까요. 태운다고요? 물려입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엔 아산 고룡산에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한시와 함께하는 선조님 발자취 따라".. 같이 가실래요?


이 책에 시들은 지은 날짜별로 구분하여  편집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마도 낱장으로 된 시들을 묶어서 편집하자니 옥에도 티가 있다고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1623년(54세)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강진현으로 안치를 명하였다가 1627년 부안으로 옮겼다. 1632년(63세)에 충원으로 서울 가까이로 옮기고(인조 10년 6월 25일 1632년 ), 1633년(64세)에 안치에서 풀려나 시골로 가서 1635년에 별세하시었다.


시골이 통진인지 반남인지 모르지만 ...64세이 이르러 오랜 안치 생활 끝에 시골로 가셨네요. 안치는 일정한 장소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유배보다 자유로웠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요.

이 유배기간 동안 금양군께서 수시로 찾아뵈며 모셨다고 하네요.


이 시들을 유배기간에 지으것이 말씀하시기를 '후손들이 내가 살아온 모습을 보라는 뜻이지 임금을 원망한 것이 아니고 물러나 내 인생을 뒤돌아보고자 한 것이라' 하셨다.



성혼 선생이 말하기를 "한 배를 타고서 다른 의견을 내다가 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에 출사를 나섰다고 하시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부끄럽다 하시었다.




이 책을 '한국고전종합 DB'에 수록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P.65 하단으로 옮길 건데 교정 미필)

금양위 미가 숙부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네요.

(광해 7년)

   
이름아이콘 박대서
2019-01-25 13:23
옛날 책들은 오른손으로 넘겨가며 읽어야 했지요.
이 오창집 역시 1. 2권 합하여 2권 뒷부분 부록 1.2부터 보셔야 이해 하기가 쉽겠습니다.
다음 기재잡기를 보시고 1권 시집을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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