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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종산
ㆍ작성일 2019-03-03 (일)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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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 연역 호장공

반남박씨의 연역 호장공후 야천공


 

  成俔慵齋叢話에서 廣州李氏昌寧成氏를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벌가문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에 문벌가문을 거론하면서 반남박씨를 예외로 할 수는 있을까? 學問.文章.任宦 어느모로 보나 반남박씨는 조선후기에 굴지의 명가임을 분명했고, 안동김씨(仙源,淸陰系). 연안이씨(月沙系). 동래정씨(林塘系) 등 유수한 가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반남박씨 역시 여느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 출발은 미미했으니, 시조 朴應珠 潘南 고을의 호장이었다. 현재 자세한 서적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그는 대략 13세기 중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활동한 인물로써 한번도 반남을 떠난적이 없는 말 그대로 潘南鄕人이었다. 이처럼 그는 한 고을의 호장으로 일생을 살았지만 반남박씨 내에서는 戶長公으로 불리며 후손들의 무한한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반남박씨 향리의 역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선 朴應珠의 아들 朴宜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손자 朴允茂 역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良醞同正을 지냈다. 그리고 증손 朴秀密直副使를 지냄으로서 鄕役보다 上京從任의 길을 걸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까지만 해도 향역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고 사회적 기반도 여전히 향리인 潘南에 있었다. 이런 정황은 朴允茂의 차제 朴麗錦城縣長을 지냈고, 朴應珠 이후 누대의 묘지가 潘南에 소재한 사실에서 증명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반남박씨 朴尙衷牧隱 李穡의 문인으로 鄭夢周와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학자 관료였다. 그 역시 반남에서 출생했으나 1353(공민왕2) 文科에 합격하여 사환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향리의 자손에서 중앙의 사대부 관료로 발돋음 하는 한편 선대의 세거지 나주를 떠나 송도로 이거하게 된다. 朴尙衷의 송도이거는 향리 가문에서 사대부 가문으로의 전환인 동시에 반남박씨 京派의 탄생을 의미했다.

 

 朴尙衷의 출세는 기본적으로 그의 유학적 소양에 바탕하는 것이었다.
전술한대로 그의 李穡에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李穡은 그의 처남이었다. 당대에 최고의 학식과 문한을 자랑하던 한산이씨 牧隱 가문의 혼맥은 朴尙衷의학문. 사회적 기반을 강화해주기 충분했다. 이런 바탕위에서 그는 鄭夢周, 田祿生, 李詹. 金九容.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한 시대의 풍문을 주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여 東文選에도 다수의 시가 전하고 있다.

  朴尙衷은 중앙의 관료로 활동한 20여년 동안 예의정랑, 판전교사, 직제학, 등 주로 학술, 문한직에 종사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해박한 예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祀禮를 편찬하는 한편 3년상을 몸소 실천함므로서, 유교적 예제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면 그의 정치적 생애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말의 격동기에 親明路線을 견지했던 그는 친원파의 거두 李仁任 일파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마침내 상소를 올려 이인임의 親元路線을 정면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상소는 親元, 親明 양파 대립의 촉매가 되었고, 신진 사대부가 중심을 이룬 친명파는 친원파의 공격을 받아 일망타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朴尙衷은 장형을 받고 유배 길에 오르던 중 靑郊驛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비명에 죽었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潘南先生으로 칭송되었으며, 그의 학술적 공로와 정치적 희생은 자손들이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며 潘南朴氏라는 문벌 가문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고리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잔손들이 정치, 사상계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숙종 연간에 그에 대한 대대적인 현양 사업이 전개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현양사업의 단서를 연 인물은 尤庵 宋時烈이었다. 1681(숙종 7) 宋時烈鄭夢周의 추승사업에 즈음하여 박상충에 대한 포증을 아울러 건의하였다. 이를 가납한 숙종은 예관(林泳)을 보내 박상충의 영전에 치제하는 한편 영의정에 추증하고 文正의 시호까지 내렸다.나아가 五冠書院(開城), 潘溪書院(潘南),에 친필편액을 내려 賜額하므로서 전조 절신에 대한 지우를 다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흥기된 후손들은 1682(숙종 8)潘南先生褒贈紀事碑를 건립하였고, 1709(숙종35)에는 潘南二先生遺稿를 간행하여 현양사업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과정에서 반남박씨 종적 유대도 강화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쟁의 소용돌이는 반남박씨의 분열을 재촉하였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노론, 소론으로 분화였다. 한편 朴尙衷의 개성무대로 반남박씨 문호를 열었다면 아들 朴訔(1370-1422)은 이를 더욱 확충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조실부모 하였지만 외숙 李穡의 보호아래 학업에 정진하여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9세에 문과에 장원한 수재였다. 일찍부터 태종 이방원과 교유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으며, 역성혁명 이후 중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1398(태조 7)에는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태종의 강력한 친위세력으로 부상하였고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에 책립되고 潘南君(後改潘城君-錦川君)에 봉해져 권력의 최상부에 존재하였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논의가 준절하여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 河崙과 불화도 있었지만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1416(태종16)에는 右議政이되어 재상반열에 올랐다. 후에는 좌의정이 되고 사후에는 平度의 시호가 내렸는데 시주인布綱治紀(),心能制義()는 그의 강직한 삶을 잘 대변하고 있다.

  朴訔 이후 반남박씨는 한동안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물론 朴訔이 마련한 훈공의 기반위에서 훈구세력으로 서의 사회적 특권을 향유하며 사환을 유지 할 수 있었지만 朴訔 이후 3대동안 한명의 문과합격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환에 있어서도 朴訔에 아들 朴葵가 비교적 고관인 禮祖參判을 지낸정도이고 손자 朴秉文은 부사직, 증손 朴林宗은 상주목사에 그쳐 환역시 크게 퇴조 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통의 훈구가문 답게 혼반은 그대로 유지되어 원주변씨(邊安烈家門). 양천허씨(許琮家門)과 통혼하였으며, 장단, 양주, 파주, 김포 등지에 별업을 마련하고 선영을 조성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반남박씨는 朴林宗의 두 아들 億年, 兆年 형제의 과거합격을 계기로 새로운 중흥을 보이게 된다. 이들 형제는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합격한 신진기예로서 청망이 있어 중앙의 요직을 두루 임명 되었다. 특히 박세당의 훈구보다는 사림파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들 박소가 문과에 장원하여 청 요직을 수행하고 趙光祖, 朴英, 金安國, 李彦迪, 등 사림파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반남박씨는 완전히 사림파 가문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다만 그의 선대가 佐命功臣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향 사림파라는 말이 더 어울릴 수 도 있겠다.

  朴紹(1493-1534)의 유년시절은 매우 고단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왼 그는 어머니 파평 윤씨를 따라 합천외가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원래 그의 선대는 박은 이후로는 한양에 세거하였으나 아버지 박조년의 사망과 설상가상 격으로 닥쳐 온 연산군의 민가 훼철령으로 인해 서울을 떠나 외조에게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호 야천 역시 외가에 있던 합천 冶爐縣의 지명에서 유래하며, 이러한 우거 과정에서 합천의 명현으로 칭송됨은 물론 합천지역의 사족안인陜川鄕案에도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청년 박소는 가야산의 산사에서 학업에 정진하여 近思錄, 性理大全, 儒家書를 두루 섭렵하는 한편 朴英(松堂), 金安國(慕齋)등 명사들을 종유하며 학식과 견문을 넓혔다. 이에 조광조등 이른바 기묘사림들에게 학행이 알려져 1519(중종14)에는 현량과에 천거되기도 했으며 동년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 박소의 문과 합격은 아버지를 이은 양대 科慶이었으며, 朴訔에 이은 두 번째 장원합격이었다.

  이후 박소는 사간원, 춘추관, 승문원, 지제교, 등 주로 언론. 문한직을 역임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관료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1530(중종25)전한 조정경 등 과 함께 권신 金安老를 탄핵하다 도리어 역공에 걸려 1531년 조종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한때 南陽村舍에 우거하다 가족들을 데리고 陜川으로 낙향한 뒤로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153442세 나이로 고종하였다. 합천과의 깊은 인연 때문인지 유독 그의 산소만은 김포선영에 모셔지지 않고 합천 화양동에 안장 되었는데, 이는 후일 華巖書院 건립에 명분이 되었다. 이처럼 박소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고 격윤을 펼쳐 보지도 못했지만 사림에서는 공로가 인정되어 領議政追贈되고 文康諡號가 내렸다. 나아가己卯名臣錄.東國名臣錄에 등재 되 무로서 사림시대의 명현으로서 칭송되었다.

이 연장 선상에서 그는 박상충과 함께 반남박씨의 양대 현조로 부각되었는데, 이런 정황은 그의 위패가 潘溪書院에 봉안되고 그의 유문이 박상충과 함께반양이선생유고(朴世采刊)로 간행된 사실에서 충분이 확인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한국학 김학수 박사가 제16회 회룡 문화제에서. 발표한내용의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西浦公后 朴 勝錫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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