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ㆍ작성자 박대서
ㆍ작성일 2020-08-10 (월)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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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에 숨겨진 할머니 한분이 계십니다

정경부인 盧氏組妣

우리 가문에 숨겨진 할머니 한분이 계십니다.
당시 최고의 명문가문의 따님이셨습니다.
바로 평도공의 첫째부인이신 정경부인 노씨 할머님이십니다.
최근에 대종중에서 <반남박씨가승>을 몇분께 배포하였다고 하기에 그동안  찾아  본 것을 올려봅니다.

初娶盧氏無子 (去)再聘朱氏...류백유가 쓴 문정공의 행장에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는 첫째부인 노씨 祖妣님이십니다.
어느 분의 따님인지 그리고 자손은 없었는지 왜 제사는 안모시는지 알아보았다.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이어붙여 두서가 없지만
1. 노씨가문과의 혼인
2. 반남박씨가승의 출현과 그 이유 등으로 살펴보았다

당시 교하 노씨 집안의 상황을 보면, 공양왕(恭讓王)의 비 순비 노씨(順妃盧氏, ?~1394)는 교하노씨 창성군 노진의 딸로 고려의 마지막 왕비이다.
좌정승을 지낸 노책(盧頙)은 1349년(충정왕 1)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55년(공민왕 4) 딸이 원나라 태자비가 되자 원나라 집현전학사에 임명되고,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이 되어 세도가로 등장하였으며, 그의 아들로는 노제·노진(盧稹)·노은(盧訔)·노영 등이 있다.
그러나 노책은 권세를 부리다가 기철(奇轍)·권겸(權謙) 등과의 역모가 발각되어 철퇴를 맞고 주살되었다.
기철은 기황후의 형제로 친원파이다.공민왕이 세자시절 볼모로 원나라에 가서 있어 원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여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 때 유배된 노진은 1372년(공민왕 21) 풀려나와 판밀직이 되어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러나 또다시 1376년 아들 노선(盧瑄)이 홍륜(洪倫) 등과 더불어 역모를 꾀하다 죽임을 당하자, 그로 인하여 장류(杖流)되었다가 곧 이어 아들  노정(盧禎), 노숙(盧璹), 노균(盧鈞)과 함께 주살되고 가산은 적몰(籍沒)당하였다. 

노씨 중 대표적인 집안이 풍지박산이 났다.
적몰된 집안이 되고나면 이후에는 가문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로 이 노진의 집안의 따님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공양왕(1345~1394, 재임 1389년 11월 ~ 1392년 7월 : 2년8개월)이 즉위함에 따라 노진의 딸이 순비(順妃)가 되자, 창성군(昌城君)에 추증되었다. 
노진의 사위가 공양왕이다.
노진의 증손자인 노윤보(盧允寶)는 공양왕때 도감판관(都監判官)을 지냈다. 
목은 이색과 교류하였으며 이색의 본향인 충남의 한산이씨 가문에 장가들었다. 한산이씨 이배(李培)의 딸이다.목은(牧隱)과 사촌남매(四寸男妹)간 이다.
왕실의 외척이었으니 가까운 인척들을 유망한 과거급제자들과 혼사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박상충, 이색 등도 잘 알고 있는 왕실 외척에서 과거 급제자 박은을 사위로 삼고자 하는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목은선생이 진사시라던가 14살 어린나이에 급제를 하니 혼인 하루 전날 까지 이집저집에서 서로 사위를 삼겠다고 다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산이씨 목은선생(1328 ~1396)의 가르침을 받은 박은을 노씨 집안에서 사위로 삼았다.
여기에서 박은의 초취 부인이 교하노씨 집안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교하는 파주의 옛지명이며, 그의 묘가 파주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노씨는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로 건너온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후손들로 모두 같은 집안이다.
박은(1370년 ~ 1422년)은 당시 급제 후 17세 전후(1385~1387년)에 혼인하였을 것이며, 이어 1392년에 고려는 망했다.
박은은 급제를 하였으나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으니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 당시에 결혼하고 대부분 처가살이를 하였다.

당시 고려의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우리 집안에는 고려시대를 알려 줄만한 글이 없으니 당시 글을 보며 추측하는 방법 밖에 없다.
700년전 글을 봅니다.
<졸고천백 제2권> 수령옹주(壽寧翁主) 김씨(金氏) 묘지명이다.
김씨(金氏)가 귀족이 된 것은 대개 신라 초기부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금궤(金樻)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姓)을 삼았다고도 하고,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라 하여 이로써 씨(氏)를 삼았다고도 한다. 자손들이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리다가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 때에 이르러 우리 신성왕(神聖王)이 크게 일어날 때를 만나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알고는 땅을 바치고 스스로 귀부(歸附)하였다. 이때 그 종족들도 많이 도성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은혜를 입고 관직을 받아 대대로 충성과 근면으로 이름이 나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번성하였다.

근래에 정승 휘 봉모(鳳毛)라는 이가 있었는데 관직은 문하평장(門下平章)을 지냈다. 그가 문하평장 휘 태서(台瑞)를 낳았고, 문하평장이 추밀부사(樞密副使) 휘 경손(慶孫)을 낳았고, 추밀부사가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을 낳았다.
밀직승지는 판태부감(判太府監) 윤번(尹璠)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돌아가신 수령옹주는 그 막내 따님이다.
14세에 명문가의 따님으로서 현숙한 성품을 갖추고 왕씨(王氏) 휘 온(昷)에게 시집을 가니, 이분은 돌아가신 예성부원대군(蕊城府院大君)으로서 현종(顯宗)의 넷째 아들이자 문종(文宗)의 동모제(同母弟)인 평양공(平壤公) 휘 기(基)의 10세손이다.
대대로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공후(公侯)의 작위를 세습하였으며, 백부(伯父) 대방공(帶方公) 휘 징(澂)은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나라의 자제들을 이끌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성을 숙위하였는데 천자가 그 노고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물건이 해마다 수백에 달하였다.

옹주는 나이 30이 되기도 전에 벌써 과부가 되었고 세 아들과 딸 하나가 모두 어렸는데, 이미 모두 가르쳐서 성장시켰고 손주들까지 안아보게 되었다.
장남 순(珣)은 회안부원군(淮安府院君)이 되었고, 그 다음 우(瑀)는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이 되었고, 그 다음 수(琇)는 낙랑군(樂浪君)이 되었다.
손자는 여덟을 두었는데, 보령군(保寧君) 증(証), 정윤(正尹) 당(讜), 서(諝), 그리고 동(詷), 정(頲)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연우(延祐)ㆍ지치(至治) 연간에 왕씨(王氏)의 딸을 찾는다는 황제의 칙지가 있어 그 딸이 선정되었는데, 지금 하남등처행중서성 좌승(河南等處行中書省左丞) 실열문(室烈問)에게 시집을 가서 정안옹주(靖安翁主)에 봉해져 있다.
그 당시 사랑하는 딸을 멀리 보내게 되자 근심과 번민으로 병이 나고 말았는데, 그 후부터 병이 수시로 나았다 발작했다 하더니 원통(元統) 3년(1335, 충숙왕 복위 4)에 병이 위독해져 아무 약도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9월 을유일에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의 아들딸들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강제로 잡혀서 서쪽 원나라로 끌려갔는데, <왕실의 친척과 같이 존귀한 집안조차도 자식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부모 자식이 한번 이별하면 아득하여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게 되고 마니, 그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이 때문에 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지금 천자께서 어사(御史)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금지하셨기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어질고 총명한 천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저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옹주만이 이 혜택을 입지 못하고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이달 갑진일에 대덕산(大德山)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대군(大君)의 곁에 부장(祔葬)한 것이다. 장사 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관청에서 돌봐주게 하였는데, 회안부원군과 창원부원대군이 예법대로 상을 치렀고, 막내아들은 황도(皇都)에 있어 미처 오지 못하였다.
두 부원군은 글을 좋아하고 문객을 아껴서 태평시대 귀공자의 풍모가 있었다. 게다가 집안과 국가의 예문(禮文)과 전고(典故)를 익히 알고 있어 왕씨들 가운데 왕실의 예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들에게 모여들었으니, 어찌 어머니의 올바른 훈도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황경(皇慶) 2년(1313, 충숙왕 즉위년) 왕이 처음으로 봉작(封爵)을 받아 즉위하는 날에 회안군이 곁에서 모시면서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왕의 보답이 어버이에게까지 미쳐 이에 수령(壽寧)이라는 휘호(徽號)를 하사하고, 이어 매달 공급하는 물자를 장옹주(長翁主)와 맞먹게 하도록 명하였으니, 이 또한 특별한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선비들 사이에 오가는 의논이, “김씨가 대군(大君)의 짝이 된 이상 그 칭호를 종실(宗室)의 딸과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반드시 이를 따지는 이가 나올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맏아드님의 문객 노릇을 오랫동안 한 데다 성품마저 노둔하여 묘지명을 요청함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씨족(氏族)의 전말(顚末)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선비들의 의논에 대하여도 아무런 숨김없이 서술하였다.명은 다음과 같다.
산은 그 터전이 웅장하고 / 山壯其址
물은 그 물줄기가 아름답도다 / 水美其濆
참 좋은 자리에다 / 有吉者兆
산소를 편히 모시니 / 有安者墳
누가 묻히고 누가 곁에 누웠는가 / 孰藏孰祔
옹주와 대군이라네 / 維主維君
천년이 지난 뒤에도 / 千載之下
이 글을 살펴보리라 / 尙考斯文

[주-D001] 금궤(金樻)가 …… 하고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주-D002] 스스로 …… 한다 : 소호금천씨는 중국의 전설 시대 제왕으로서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이름은 지(摯)이다. 금덕(金德)으로 왕이 되었다 하여 금천씨(金天氏)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소호씨(少昊氏)라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 하였다.

이것을 요약해 1335년의 당시 풍습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김신은 윤번의 딸과 혼인하여 딸을 낳았고, 그 딸은 14살에 왕온에게 시집갔다.
14살에 시집 간 후, 23살에 수령옹주 봉작을 받았고, 30세 이전에 과부가 되었다.아들 순,우,수와 딸 하나가 있었고, 손주도 보았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왕씨 성의 딸을 요구해 수령옹주의 딸이 끌려가 정안옹주가 되었다.
그래서 김씨 부인은 근심과 번민으로 병이 생겨 55세에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때는 원나라에 고려의 딸들을 조공으로 바쳐야했다.
그래서 조혼풍습이 생겨 <14살에 시집을 가서> 아들 딸 낳아 30세에 손주도 보았다는 말이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의 아들딸들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강제로 잡혀서 서쪽 원나라로 끌려갔는데, 왕실의 친척과 같이 존귀한 집안조차도 자식들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부모 자식이 한번 이별하면 아득하여 다시 만날 기약이 없게 되고 마니, 그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이 때문에 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천하에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다가 목은선생의 부친 가정 이곡 선생이 황제에게 건의하여 딸을 조공으로 바치는 것을 없애게 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어사(御史)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금지하셨기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어질고 총명한 천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저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옹주만이 이 혜택을 입지 못하고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원나라의 사위를 본 사람들은 딸 덕에 권력도 갖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기황후와 그 기씨들의 세상이 한 때 있었다.
기황후의 최측근에 박씨도 있었다.
이 당시 풍습이 비추어 알 수 없는 우리 박씨의 선조는 어떠했을까?
박씨의 딸도 조공으로 보내졌고, 일찍 혼인도 했고, 30세 정도면 손주도 보았다는 것이지요.

실제 평도공도 손주를 보았으며, 손주보다 어린 아들을 낳았습니다.
평도공이 외손녀가 있었다는 것은 류백유 행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손주의 외할머니는 初娶 盧氏라 생각됩니다.
첫아들은 남들 손주 볼 나이인 30세 이후에 보았지요.
45세면 증손도 보고, 70이면 증손자가 급제하는 것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 조상의 연대기를 계산하는데 참고가 될 내용입니다.

조선 시대에 혼인은 ‘인륜의 시작’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에서는 양천불혼(良賤不婚)· 동성불혼(同姓不婚) 등으로 혼인 법제를 강화하고, 친영례(親迎禮)를 실시해 남귀여가(男歸女家) 풍속을 고치려 했다. 
그러나 전통이 오래된 남귀여가혼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조선 중기가 지나서 반친영(半親迎) 형태로 절충되 었다지만, 이 역시 처가살이의 틀을 바꾼 것이 아니다. 남귀여가혼은 두 집 안의 긴밀한 관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부부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예에는 두 아내가 없다(禮無二嫡)’는 원칙에 따라 일부일처(一夫一妻)를 법제화했다.이에 고려 말의 다처 풍조는 사라 지게 되고, 양반 여성은 첩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즉 일부일처제로 초취 이후에 들이는 여자는 후취, 즉 첩이라는 것이다.양반 여성은 첩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 시대에 성리학과 종법(宗法)이 강조되면서 국가가 혼인을 규제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다시 처첩을 들이는 계기가 되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일탈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려말의 풍조에 따라 1392년 조선개국 후에도 정착되기 전까지 첩을 들였다는 것이다.
첩은 양인이나 천인 여성 , 즉 기녀나 노비·얼녀 출신들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첩은 처와 마찬가지로 호(戶)의 구성원이었으나 온전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자식과 함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첩이라는 개념이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취, 배 구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풍습이 그랬다.

고려가 망해가는 순간, 낙향을 결심한 노윤보는 일가친척을 이끌고 아내의 본향인 한산 서천으로 내려가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낙향을 하지 않은 노씨도 있다.
노한(盧閈)은 민제의 딸과 혼인하여 태종과 동서지간이어서 그대로 한양에서 살았다.
후에 세종 때 우의정에 올랐고, 1443년(세종 25)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노한의 손자 노사신, 그 다음 노공필....등 번성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노사신이 신숙주와 더불어 공순공(휘 崇質)을 이끌어 주었지요.

교하노씨에게는 아들이 없다고 하였는데 딸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후손이 없다면 무후(無后)라고 쓰던 때였는데, 무자(無子)라고 했으니 말이다. 당시 1413년 행장의 기록을 보아도 교하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이때 윤구를 사위로 맞아 혼인한 딸이 있었으니 첫부인의 소생이라 추측하는 것이다.
부부는 나이 서른이 되어가는데 아들이 없으니 둘째 부인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예전엔 둘째부인을 얻는데 첫부인이 출산을 하면 집안일을 해야했기에 해묵이를 하지 않고 데려왔다고 한다. 출산하고 사망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씨가 후처를 들일 것을 권유하여 주씨를 맞아들였다고도 볼 수도 있다. 
어쨋든 공이 고려말 다처풍습에 따라 고려의 풍습에 따라 첩이 아닌 부인을 둘을 맞이하였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1412년(태종 12)에 정부는 우선 병축(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 문제를 법적으로 규정했으며, 『대명률』에 의거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일을 금지시키고, 어길 경우 장형(杖刑)을 가하도록 했다.

일부일처제로 하여 고려의 풍습을 없애려는 조선에서 후처소생이 문제가 되니 태종이 이를 알고 <여경택주>라 하여 확실하게 정실로 인정해 준 것이다.
"착한 일을 많이 베풀어 가문에 경사가 이어진다"는 주역의 글에서 따온 것이 "여경택주" 이다.
그래서 족보에 기록하기를 노씨를 초취라 하고 주씨부인이 후에 <진한국대부인>이니 배(配)라고 한 것이다.
당시 사대부는 3년 안에 재혼하지 못했다. “사대부로서 처가 죽은 자는 3년 뒤라야 다시 장가갈 수 있다. 만약 부모의 명에 따르거나 나이가 40이 넘어서도 아들이 없는 자는 1년 뒤에 다 시 장가드는 것을 허한다.” 이는 『경국대전』의 규정이다.

또한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지 않는다.
실록에 태종이 조강지처를 버렸다하여 정복주(鄭復周)를 폐하여 서민으로 만들었다.
1406년(태종 6) 사 헌부에서 상언하기를, “이달 초엿새에 전 첨절제사 정복주는 본처를 버리고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의 기생첩 복덕(福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하고 후처로 삼았습니다. 정복주는 여러 벼슬을 거쳐 품계가 3품에 이르렀으니 혼례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제멋대로 행하여 선비의 기풍(氣風 )에 누를 끼쳤습니다. 바라건대 직첩(職牒)을 거두고 법률에 따라 논죄해서 풍속을 바루소서.”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정복주는 나와 나이가 같으니 지금 이미 늙었다.
그런데 조강지처를 버리고 천인을 얻어 자기 배필을 삼았으니 가증스럽지 않은가? 만일 폐하여 서민을 삼으면, 복덕과는 신분이 맞아 그녀의 사위가 될 만도 하겠다.” 하고, 곧 명하여 삭직(削職)하고 서민으로 만들었다.
이런 시기였던 것이다.

태종 7년 9월 12일 1407년 세자를 수행할 이천우 등 일행과 돌아온 사신을 위해 광연루에서 잔치를 베풀다광연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으니, 중국에 조현(朝見)하는데 수행하는 이천우·이무·이내·맹사성을 전송하고, 겸하여 남재·박은·이승상의 가는 것을 전송하고, 설미수·함부림·노한(盧閈)의 돌아온 것을 위로함이었다.
영의정부사 이화·좌정승 성석린과 종친·부마가 시연(侍宴)하였다. 술이 취하매 (중략) 두 왕자에게 명하여 술잔을 돌리게 하고, 극진히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교하노씨 중 노한(盧閈)은 서천으로 가지 않았는데, 노한은 중국에 다녀오고 평도공은 중국으로 가는데 태종이 위로연을 열어 만나게되어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다.

노씨에 대한 글을 쓰신 분으로 죽창 박원도가 있다.
승지 죽창공(휘 원도,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은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을 제수받고 의금부도사·감찰·공조좌랑을 거쳐, 1666년에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냈다.1672년 전적(典籍)·병조정랑을 거쳐 167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이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면서부터 지평 네 차례, 정언 세 차례를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남인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죄를 얻어 청주도사(淸州都事)로 좌천되고, 뒤에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옮겼다.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진하여 지평·병조정랑·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1683년 부령부사(富寧府使)가 되었다.1684년 장례원판결사, 그 뒤 형조참의·우부승지·병조참판·형조참판 등을 거쳐, 자청하여 부평현감으로 나아갔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로 생애를 마쳤다.

이 후에 아암공이 승지 죽창공의 초고를 엮고 추가로 서술하여 《반남박씨가승》이라고 하였다.

현재 족보에 "원도가보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이 바로 승지 죽창공이 쓰신 것이다.
세양공 집안에서 전해져 오던 것에 덧붙여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이를 보면 아들들도 이따끔씩 왕래를 하였다고 여겨진다.

아래 사진에서 왼쪽은 유백유의 행장이고, 가운데는 출처불명, 오른쪽은 아암공의 《반남박씨가승》에 나오는 부분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周氏라고 된 행장문을 내놓고 있지만, 류백유의 서산柳氏 족보에는 朱氏라고 되어 있어 이것을 보아 행장의 진위조차 의문이 가기도 한다.

번역해 보면,
<저정 유백유 공(문정공 사위)이 찬한 반남선생(문정공)행장에 이르기를 (평도)공의 초취 노씨는 아들이 없다고 했고, 또 공의 행장에는 단지 배위가 주씨라고만 되어있으니 두 기록이 서로 같지 않다. 또 공의 사당에 있는 신주에 단지 배위 주씨만이 있고 노씨는 없다.
9대손 승지 원도가 말하기를, 자기 선조 세양공이 전하니 노씨가 나갔다고 했다. 그 때에는 아내가 나가면 아내를 쫓는 법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씨는 모 재상 아들에게 재가하였는데 그 성씨는 매우 번창하였고 또 평도공의 친한 벗이었다.
하루는 평도공이 그 집에 이르니 주인은 죽었고 여종에게 일러 들어가기를 고하라 하고 따뜻한 술을 청했다.
그러니 노씨가 '이 사람은 복이 적은 사람인데 ...>(무명씨 제공)

저정선생이 쓴 문정공의 행장에는 노씨부인이 있고, 남편인 평도공의 행장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樗亭柳公白儒 纂潘南先生 行狀 言 公 初娶 盧氏 無子 而公行狀 只오직言周氏 二行狀阮不同 公廟又只 配周氏 而無 盧氏合積之主 九代孫承旨元度言 自其先祖世讓公薑而傳盧氏 出彼時 出妻法尙存 故耳 盧氏再嫁某宰相子 姓甚盛 亦公之親友也公一日至, 其家主人命沒洏侍婢入告 請煖酒. 盧氏曰, 此人少福 奚必乃 甭盖 恚之云.

只오직, 沒=歿 대신 쓰기도 한다. 몰락하다, 죽다, 洏 눈물흘릴 이, 奚 어찌 해, +必=해필, 하필 ; 뜻밖에 어찌, 甭 쓰지않을 용, 蓋 덮을 개 ; 여성용 치장용품으로 겉옷이나 머리에 쓰는( 例: 紫芝蓋) 의장의 한 가지, 恚 성낼 에, 云 말하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시대에 부인들이 외출할 때 말을 탔다. 귀부인 경우 노복이 셋이 딸려 말을 몰고 청개(靑蓋)*를 썼다. 검은 깁으로 너울을 만들어 쓰는데 끝이 말 위를 덮으며, 또 갓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輿)는 없다. 깁은 거칠게 짠 비단을 말하며, 요즘말로 망사와 비슷한 것이다.

<공이 어느 (추운) 날 그집에 갔는데, 집 주인은 죽고 없었다. 시녀가 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안채에 고하니 들어가서 따뜻한 술 한잔 마실 것을 청하였다.노씨부인이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뜻밖에 이러시느냐"고 치장도 안하고 나와 성을 내며 말하였다. >

여기까지가 가승의 내용입니다.
가승에 없는 내용입니다만 이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복이 없다고 하고 화를 냈다는 것은 갑자기 찾아 온 데다가 술을 청하는 것도 뜻밖에 일이니, 성을 냈다는 것이다.
정실집과 후실집이 따로 있으니 재가한 것이라고 몇백년 내려오면서 와전되었던 것이다.


<반양2선생유고집>에는 <노씨가 아들이 없어 다시 장가를 드니 주씨이다>
初娶盧氏 無子 再聘周氏...노씨부인에 대해서는 여섯글자로 짤막하게 나온다.

그런데 서천류씨 족보집에 저정선생의 문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 보니 初娶盧氏無子去再聘周氏...라고 번역을 새롭게 해야할 거(去)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한 장자 葵와 차자 ㅇ趾가 있는데, 1670년 현석공(휘 세채)은 <반양이二선생유고>에 행장을 넣으면서 去자를 빼고 아들 이름 葵와 ㅇ趾를 某라고 썼다.
류씨족보 첫부분에 있는 류백유 문집을 수록해 놓았다.
누군가 去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去자를 삭제한 듯 하다.
세양공의 아명도 소고공의 묘비명과 다르니 모른다(某)고 했다.
"금천군은 처음 노씨(盧氏)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었고 다시 주씨(周氏)에게 장가가니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따님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저는 "무후"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이 없어서>로 생각된다.

<서산류씨 족보에 기록된 행장>은 다른 분들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두분께서 질의에 답을 해주셨습니다.

錦川初娶盧氏無子去再聘周氏
1. ○두 번째 문장에서, "ㅇㅇ가 처음엔 노씨에게 장가갔는데 자식이 없자 盧氏를 버리고 다시 周氏에게 장가갔다."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거에는 '가다'란 뜻도 있지만 위 글에서는 '버리다'로 봐야 합니다.
'~去之而再聘周氏(~그녀를 버리고 그리고는 다시 周氏에게 장가갔다)'인데 之라는 人稱 대명사와 접속사 而가 생략되어 있다고 봅니다.

2. ○(1): 초취 노씨가 자식없이 (죽자) 주씨를 후취로 맞았다
(2) 초취 노씨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이혼하고 주씨를 후취로 맞았다. 조선조의 국법에 아내가 죽거나 이혼 했을 때만 재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3. 저는 류백유가 행장을 쓰면서 굳이 버렸다는 의미로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아들이 없어 한번 더 장가를 갔다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去자가 있는 <서산류씨 족보에 기록된 행장>은  <반남박씨 가승>과 <집안에서 내려오는 행장>과 해석이 다릅니다.
가승에서 노씨가 재가했는데, 훗날 재회를 했다는 것이고,족보에 수록할 때..아마도 버렸다는 표현을 그대로 쓰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을 하신 듯 합니다. 저도 그랬겄지요.
여기서는 죽었거나 이혼했거나 또는 버렸다는 것인데 가승에 보면 훗날 재회를 했단 것을 보면 계속 왕래가 있었다고 봅니다. 즉, 두집살림을 하였다는 것이지요.

류백유 행장이 1413년에 쓰여진 것이니 당시 태종이 1부1처를 법으로 묶고자 했던 시기입니다.
周氏 부인이 큰아들 박규를 1400년에 낳았으니 당시 부인이 둘이었습니다.
큰사위 안성지사 윤구는 1413년 이미 큰딸과 결혼해서 5남2녀가 있었고, 손녀딸은 여덕윤에게 출가해서 큰아글 渾과 어린아이가 또 있었답니다.
즉, 평도공은 외손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그래서 안성지사 윤구에게 출가 한 딸은 노씨의 딸이 맞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합해 보면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적서문제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라는 생각입니다.

승지 죽창공(휘 원도,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은 예송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분이다.1675년(숙종 1) 남인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죄를 얻어 청주도사(淸州都事)로 좌천되기도 했다.예송논쟁은 1660년(현종 1년) 음력 3월 남인 허목(許穆)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한 것이 1차 기해예송이고, 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이 사건이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이때 송시열이 귀양을 간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이 논쟁은 적자와 서자의 문제였던 것이다.
예송논쟁이 휩쓸고 난 후 민간부문으로 옮겨가 적서에 대한 차별이 한층 심화되고 죽은 조상에 대한 예도 고조된 시기였다.

이 반남박씨가승에 대해 좀 더 정리하고자 한다.
최초에 어느분께서 가승을 기록하셨을까?
甲子族曾組崇質..(66페이지 참조)
이 부분에서 족증조(族曾組)라하면 8세와 11세의 관계가 되는데 浩源 諱 滉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12세 靑蘿 璘께서 좌승지를 하시면서 사료를 보신 듯 하다.
그리고 이후 계속 이어쓰기를 해오다가 편수관을 하신 감정공(휘 대하)께서도 쓰시다가, 손자이자 우승지를 하신 죽창공(휘 원도)께서 "원도가보"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 정헌선생(휘 필간)이 추가로 기록하여 3권을 마무리하고, 아암공(휘 회원)께서 보태어 5권으로 분량을 늘리고 발문을 쓰시고 <반남박씨가승>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이는 아암공이 숙조 "정헌선생"을 기록하였기에 알 수 있었다.
감정공과 죽창공 그리고 정한선생과 아암공께서는 어떻게 이것을 만드셨을까?
가승이라고 하니 구전으로 전해 내려 온 것도 있고 글로 적혀 전해온 것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모아 엮은 것이다.물론 선대에서 부터 전해 온 자료나 구전으로 전해온 것이니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감정공과 손자인 승지 죽창공께서 자료수집한 것을 유배지에 가서 정리해서 쓰셨다고 볼 수 있다.
유배지가 책을 집필하는데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도 했다.모든 문헌들이 한가한 유배지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책은 정헌선생의 족보기록으로 보아 5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만 있다.
서두에 발문이 있고, 발문에 "반남박씨가승건"이라 되어있고 156페이지 분량이다.
건이라 쓰인 것은 한권이 아니라는 것이다.옛책의 권수를 건곤감리 혹은 권수가 더 많을 때에는 천자문으로 표시하였다.
그런데, 1권은 1622년 7월 3일 남곽공의 장례를 모셨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기록에는 1622년 동곽공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는데 나(我)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참석을 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장례에 참석하신 분은  편수관을 하신 감정공 휘 대하 송곡 선생이다.(1577~1623년 10월 27일)
그래서 감정공께서 이어서 쓰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죽창공은 1626년에 태어나 1690년에 돌아가셨으며, 조부의 <가보>를 이어받아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보>를 계속 이어서 쓰셨다.
그래서 <원도가보>라는 명칭으로 족보에 알려진 것이다.

아암공이 어떻게 발문의 서를 쓰게 된 것일까?발문에 보면 "숙조(숙조) 정헌선생"이라고 나오는데 계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정헌선생의 계보 참고)
죽창공 휘 원도께서 쓰신 원도가보를 이후에 아암공께서 물려받아 <반남박씨가승>이라 이름 지으신 것이라고 추측되는 것이다.
서계집에 <우승지박공묘지명>을 서계공 휘 세당(世堂)이 지었는데 모두 평도공(平度公)의 9세손으로 항렬을 따지면 형제간이 된다. 
그 묘지명에 가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게 된 내용을 짤막하게 두 싯귀절로 표현해 놓았다.

선조의 공렬을 돈독히 하였네 / 克篤前烈
이를 갈고 다듬어 / 菑之斲之
후손에게 남겨 주니 / 以遺厥孫

무엇을 남겼을까?
바로 선대의 기록을 비롯한 가보를 갈고 다듬어 쓰셔서 즉, 보태고 빼고 후손에게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승지 죽창공께서 쓰신 글을 <가승초고?> 라고 하고, 이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가승이라고 써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적서 논쟁에서 비켜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초취 노씨를 목은의 중매가 아니더라도 한산이씨와 혼인한 노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것은 지금이야 잘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성씨는 매우 번창하였고" 라고 쓰신 것으로 보아 어쩌면 노씨가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도 자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씨부인의 소생이니 당시 조선 중기의 후손들에게는 그게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 가승이 반드시 필요했다. 승지 죽창공(휘 원도)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적자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고를 남기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현석공(휘 세채)께서 "《숭효록(崇孝錄)》을 근근이 틈을 내어 이따금 살펴보는 중인데, 아직까지 1책도 다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렇듯 늙어 가는 나이에 선고(先故)의 사적(事蹟)에 대해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책이 우리 가문에 공이 있는 것은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내용 가운데 엉성한 부분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해 어찌 진선진미(盡善盡美)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요컨대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필경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정안(政案)’ 및 ‘사필(史筆)’은 원본이 있을 듯한데, 그곳에 있느냐? 보고 싶으니, 모쪼록 찾아 보내라." 라고 서계집에 기록하신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변록》을 쓰실 때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정안과 사필과 같은 글이 필요했기 때문에 딱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원본을 보내달라고 하셨으니 그 원본이 바로 가승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직접 숭효록을 편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숭효록의 저자를 박세채라고 합니다.

‘정안(政案)’ 및 ‘사필(史筆)’은 누가 쓴 것인지 혹시 승지 죽창공께서 쓰신 가승에 대한 초고가 정안과 사필 중 하나일까? 
또다른 사료가 있다는 것인데 찾아보니 소고공(휘 승임)께서 쓰신 <금천부원군 평도공정안제후지>를 볼 수 있었다. (맨끝에 수록)
그렇다면 소고공께서 좀 더 분명하게 쓰셨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다.

죽창공과 서계공은 가까이 지냈으며 죽창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니 서계공이 슬픔을 만가로 지어 남겼다.
아암공 휘 회원께서 쓰셨다는 <반남박씨가승>은 시대적으로 대략 380년 후의 기록인데 노씨 부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후에 덧붙여 쓴 것이 있다. 
아암공 휘 회원께서 사신 때는 1723~1790년 영조와 정조의 시대이다. 
또한 이 글에 사당이야기가 나오는데 별묘는 1804년에 휘 준원께서 문산 적곤리 (당동리의 옛지명) 종가 옆에 세운 것이라고 하였으니 사당에 신주가 있었는가 하는 기록을 보면 아암공 이후에 필사할 때 가필되었을 것이다.
이 가승은 그 시대에 사신 선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평도공 이하 아드님 세분의 초상화가 있었다는 대목도 흥미롭고, 대부인께서 합천 야로현으로 내려가셨다는 이야기도 출처가 이 책이라 생각된다.

모재상의 아들에게 재가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일부일처제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 축첩을 하였다는 것은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재상들을 보면 태조 때의 정승은 배극렴 영의정, 김사형 좌의정, 조 준 영의정, 정도전 영의정있고, 정종 때에는 심덕부가 있다.
태종조에는 이 서 영의정, 민 제 좌의정, 하 륜 영의정, 성석린 영의정, 이거이 영의정, 이 무 단양인 우의정, 조영무 우의정, 권중화 영의정, 이 직 영의정, 남 재 영의정, 유 량 우의정, 유정현 영의정, 박 은(朴訔) 좌의정, 한상경 영의정, 심 온 영의정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공신으로서 혈맹의 관계인데 공신의 아내를 어떻게 할 사이도 아니다. 
특히 조선 초기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데 남의 아내를 취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다시 혼인의 풍습을 돌아본다면,< 조선은 ‘예(禮)에는 두 아내가 없다(禮無二嫡)’는 원칙에 따라 일부일처(一夫一妻)를 법제화했다.
이에 고려 말의 다처 풍조는 사라 지게 되고, 양반 여성은 첩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첩은 양인이나 천인 여성 , 즉 기녀나 노비·얼녀 출신들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첩은 처와 마찬가지로 호(戶)의 구성원이었으나 온전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자식과 함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다. >
노씨부인은 본처이지만 후처에게서 난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정실자리를 스스로 물러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러났다는 것은 정실자리를 물러났다는 것이지 부인의 자리를 물러난 것은 아니다.
"내가 정실이 아니라면 남들이 자식들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이며, 출사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초기 부터 사대부의 아내들은 법으로 개가가 금지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강지처를 버릴 위인도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자부심도 대단하신 교하노씨 부인께서 한발 물러나는 지혜로운 희생을 하신 것이다.
그렇지않았다면 周氏 부인은 정실자리를 갖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도 관직에 나가는 것에 평도공의 입장이 곤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태종의 측근으로서 거슬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께서도 그 사면초가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도공께서 얼마나 인간적인 고뇌를 하셨을까?
그리고 어떤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되었을까?를...이럴때 남자는 어떠한 결정도 못내립니다.

1640년경 금양위께서 임오보를 만드실 때 240년 전의 일이었지만 교하노씨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져 내려왔다.
그리고 300년이 지난 후에 조선 중기에도 역시 족보를 만들면서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 때에 이 가승이 있어 참고가 되었다는 것인데 무명씨 말대로 족보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나 그 당시에 사실 사료도 없을 뿐더러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사료가 없는 상태였다.

또한 목은선생이 주선한 혼인을 깨뜨릴 수는 없다.
자신도 천애의 고아로 자랐으며 고려의 신하였기에 조은이라고 호를 지었을 정도인데 고려 패망과 함께 몰락한 가문의 딸일지라도 저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책이나 노진은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는데 이분들 중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후대에 족보편찬을 하면서 가문에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염려하여 역적임을 숨기려고 문중에서 삭제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교하노씨 집안은 대단한 혼맥을 이루고 있었다.
예로부터 중앙정치 무대는 혼맥의 세상이었다.그 혼맥의 세계에서 외톨이 급제자인데다가 공신도 많고 많은데 특별히 평도공이 관직에 승승장구한 이면에는 한산이씨와 더불어 교하노씨 집안의 혼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또 다른 분파 장연노씨 인물로 노영수와 노귀산 두 부자는 딸들이 모두 후궁이 됩니다.
노영수(盧英壽, ? ~ 1385년) : 고려 우왕의 비인 의비(毅妃)의 아버지. 1381년 우왕이 근비(謹妃)의 궁인으로 있던 그의 딸을 총애하여 의비로 봉하자 서운부정(書雲副正)에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고, 그의 처는 복안댁주(福安宅主)가 되었다. 그 뒤 밀직사(密直使)에 임명되고 위성부원군(威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왕이 거의 매일 그의 집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 정도로 총애를 받아 큰 권세를 부렸으며, 그가 죽자 우왕이 친히 술자(術者)를 거느리고 장지를 남교(南郊)에 정하였다 한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노귀산(盧龜山) (?~1419년(세종 1)정종 때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였는데, 태종 즉위 후에 전 왕의 신하라는 이유로 외방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곧 복권이 되었으며, 1411년(태종 11) 딸이 태종의 후궁이 됨으로써 다시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같은 해 12월 좌군총제가 되어 몇 년간 직책을 수행한 뒤, 1418년(태종 18)에는 도총제(都摠制)로서 내시위의 절제사가 되었고, 이어서 판한성부사·우군도총제 등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도총제의 직위로 죽으니, 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관곽과 종이를 내려주었으며, 내관 황숭(黃崇)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시호는 제대(齊戴)이다.
이 태종의 후궁 노(盧) 소빈이 바로 같은 노씨 집안이다.
'세종실록에 나오기를 세종 3년 10월 19일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를 파면시키고 예조 참판 하연으로 대신하다'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박은이 이르기를, "윤화는 나의 친척이다"》라는 대목과  《장윤화의 일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태상(太上)이 박은을 친척이라 하여 덮고 두둔한 때문이었다》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기록된 연도를 보면 바로 타계하시기 전 해인 세종3년(1421년)의 기록으로, 사관도 알고 있듯이 교하노씨 부인과 헤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태종과 평도공이 친척이라고 하였던 것이지요.
헤어졌다면 태종이 그냥 있었을까?
돌아가실 때까지 친척이었고 함께 살았다는 것으로 본다. 

공께서 병환으로 세종 3년 12월에 병으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자택에서 요양하였는데, 병이 짙어지자 태상이 약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계속하여 내선(內膳)을 내리고, 또 내옹인(內饔人)을 그의 집에 보내어 명하기를,
"조석 반찬을 그의 원하는 대로 하여 주되, 내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게 하라."하고,
태상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다. 

은이 태상의 병환이 오래 간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의 병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성명하신 임금은 만년을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으니,이런 애틋한 정이 군신의 관계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태종이 평도공을 가까이 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보이는 것 같다.
평도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 태종도 승하했다.

이 류백유가 쓴 행장의 노씨부인은 <정경부인 교하노씨>가 맞다.
무자(無子)라고 하니 딸이 있었다.집안에서 교하노씨 부인의 신원회복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과거에는 양반과 서자라는 족쇄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치고, 그래서 수백년동안 침묵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하더라도 이제는 과거를 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후손들은 의문을 갖게 될 것이고 또한 침묵을 강요받게 될 것입니다.

류백유의 행장에 확실히 나오고 그 이후에는 명확한 행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가승을 보고 족보를 만들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워질까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평도공 초배로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지혜로운 할머니이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논쟁이 있겠지요.
"이제와서 왜 그러시느냐"고요?
이 말은 정경부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평도공이나 진한국대부인께서도 천국에서 맘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노씨 조비님께 술잔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승임 소고집(嘯皐集)에 나오는 <금천부원군 평도공 정안의 제후지[錦川府院君平度公政案題後誌]> 입니다.

<간찰 한 통이 선조 평도공(平度公:박은<朴訔>)의 중자(仲子) 세양공(世襄公:박강<朴薑>)368)의 종가(宗家)에 보관되어 있는데, 제목은 ‘금천부원군평도공정안(錦川府院君平度公政案)’이라고 되어 있다. (소고집에는 양도공으로 되어있어 어느 시호가 맞는지 좀 더 사료가 나오길 바란다.)

대개 홍무(洪武:명<明>나라 태조<太祖>의 연호) 11년(고려 우왕 4,1378)에서 영락(永樂: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15년(태종 17, 1417)까지, 말직인 숭복(崇福)에 제수될 때부터 극품(極品)인 공상(公相)에 임명될 때까지 모든 이력이 남김없이 편록(編錄)되어 있다.
지금의 3품 이하의 관직처럼 매 3년마다 개좌(開坐:해당 관원이 모여서 회의를 함)하여 이조(吏曹)에 초본(草本)을 통보하였다.다만 여기서는 개좌가 1품에까지 적용되었으니, 아마도 당시의 법이 그러했던 것인가?행장(行狀)의 경우는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대략만 갖추어 미세한 곡절은 자세하지 못한 듯하다.
또 한 통의 간찰이 일가 집에 전해지고 있는데, 머리에 ‘금천부원군박모졸(錦川府院君朴某卒)’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이어서 ‘모자모운운(某字某云云)’하여 썼으니, 하나같이 행장을 모방하였으나 말이 조금 더 늘었고, 또 중간에 행장에 서술되지 않은 일들이 많이 실려있었다.
간간히 억양(抑揚:평가를 내림)이 있고 말단(末端)에서 결말을 맺기를 ‘자모자모(子某子某)’라고만 되어 있고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요즘 귀한 신하가 죽었을 때 사관(史官)이 쓰는 졸기(졸記:역사서 뒤에 적는 사자<死者>에 대한 간단한 평)가 정히 이와 유사하였다.
이는 필시 당시 태사(太史:사관)의 기록인데, ●얻어서 베껴낸 것이리라.
이제 정안(政案)을 위주로 하여 그 수말(首末)을 보충하여 연보(年譜)를 만들고, 그 행장(行狀)과 옛 간첩(簡帖)에 서술된 것을 뽑아서 각 연도의 아래에 나누어 기록하였다.
다만, ●행장은 이미 앞에서 전부 실었으므로 그 개괄만 대략 보일 따름이다.

●有一簡藏在先祖平度公仲子●襄度公●宗家。題曰錦川府院君平度公政案。蓋自洪武十一年。至永樂十五年。自微官崇福之除。至極品公相之拜。凡所踐歷。編錄靡遺。似若今之三品以下官。每三年開坐。報吏曹草本。但此開至一品。豈當時之法然耶。若夫行狀。未知何人所述。大槪略具。而微細曲折。似不詳悉。又有一簡傳於門族家。首書錦川府院君朴某卒。其下。連書某字某云云。一倣行狀。而稍增其語。且於中間。多載行狀所未述之事。時有抑揚。而末端結之曰。子某子某而已。他未之及。今時貴臣之死。史官書卒。政類此。此必當日太史之筆。而得以謄出者也。今以政案爲主。而補其首末。以爲年譜。其行狀及古簡所敘。因採摘分錄於各年之下。但行狀則旣全載於前。故略見其梗槪云。

승임(承任)이 말예(末裔) 후생(後生)으로서 항상 공의 평생 언행을 자세하게 얻어 듣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모갑년(某甲年)에 은대(銀臺:승정원)의 장(長)으로 승핍(承乏)369)되었을 적에 당후(堂后)에 소장(所藏)된 일기(日記)를 가져다가 살펴보았다.

국조(國祖)께서 창업(刱業)하던 초기에는 제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고 헌묘조(獻廟朝:태종<太宗>의 묘호<廟號>)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른바《일기(日記:승정원일기)》가 있게 되는데, 매우 초략(草略)하여 간혹 한 달이 끝나도록 단지 상하관(上下官)의 성명(姓名)과 사ㆍ불사(仕不仕)만 기록된 것도 있었다. 비록 간간히 한두 가지 기록한 바가 있더라도 또한 단결(斷缺)이 많아 전말(顚末)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서 공의 이름이 영락(永樂) 3년(태종 5, 1405)에 비로소 보이고 그 전에는 비어서 상고할 곳이 없었다.
3년 이후의 제배(除拜)하고 체천(遷遞)한 것은 모두 정안(政案)과 합치되었고 간혹 작은 오류가 있었다. 언론(言論)이나 시조(施措)의 경우에는 단지 몇 단(段)만 있는데, 모두 긴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臺部:사헌부)에서의 규획(規畫)과 묘당(廟堂:의정부)에서의 모유(謀猷)는 개략이라도 보이지 않으니, 직임(職任)을 수행하는 체제가 옛날과 지금이 달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하나같이 소략하기가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겨우 남아 있는 기록들은 비록 긴요하지는 않지만 또한 대략 연도 아래에 부기(附記)해 둔다.

承任以末裔後生。常悢未得尋聞公平生言行之詳。歲某甲。承乏銀臺之長。取堂后所藏日記考之國祖刱業之初。制度未備。至獻廟朝。始有所謂日記。而殊草略。至或終朔。只書上下官姓名。與仕不仕而已。雖間有一二所記。亦多斷缺。不具顚末。故公之名始見於永樂三年。其前則曠無所考。三年以後凡除拜遷遞。皆與政案合。而間或小誤。至於言論施措。只有數段。而皆非關緊。其臺部規畫。廟堂謀猷。不少槪見。將職任之體。古與今異而然歟。一何疏略之甚如是歟。其僅存者雖不關。亦略付於年下云。

367) 강좌(江左)의 청허(淸虛)함:위진(魏晉)의 교체기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좌는 강동(江東) 즉 남북조 시대 때 동진(東晉)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368) ●세양공(世襄公):문집의 목판 원본에는 ●‘양도공(襄度公)’으로 되어 있으나,《반남박씨세보》를 살펴보면 평도공(平度公)의 중자(仲子) 휘 강(薑)의 시호는 ‘세양(世襄)’으로 되어 있으므로 본문에서는 이것을 바로잡는다.
369) 승핍(承乏):인재가 부족하여 재능이 없는 사람이 벼슬을 얻었다는 겸사(謙辭)이다.>
•박승임(朴承任) 1517년(중종 12)~1586년(선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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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이콘 4kraphs8
2020-08-17 00:31
《Re》종산 님 ,
작은 글씨에다 아주 길고 긴 글,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고 복잡한 정보 제시, 끝을 알 수 없는 상상력을 동원한 장문의 논설을 읽으시느라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도 읽느라 눈이 아프고 짜증이 나서 결국 대강대강 읽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에 있습니다. 아무튼 놀라운 내용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글 쓰신 박대서님의 탁월한 문장력과 인내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름아이콘 종산
2020-08-24 22:06
제가 유백유의 호가 저정인걸 모르고 했으니 이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세양공에서 나온 가승은 밎음성이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는것 같은데 이 가승의 내용을 보고  지나간 역사를 잘잘못을 거론하는 것은 모순이 많은것 같으니 역사를 많이 아시는 종원들이 다시는 이런글이 홈페이지에 올려 역사를 외곡하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종산 드림
   
이름아이콘 4kraphs8
2020-09-01 16:50
《Re》종산 님 ,
혹시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사실을 이야기한 것 뿐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문을 잘 모릅니다만, 한문은 그 속에 나오는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아주 뛰어난 전문가도 해석할 때 가끔 잘못을 저지르곤 한답니다.
전혀 신경 쓰실 일이 아니오니 괘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kraphs8 올림.

추기: 이제 우리 대종중에서도 남아 있는 선조 관련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표준 <宗史>를 편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름아이콘 chanseo
2020-09-11 16:22
참 흥미로운(?) 주장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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