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박찬익 아들 독립운동가 박영준 신순호 결혼증서
결혼증서
진품명품 오늘의 마지막 의뢰품은 문서 한 점.
김구, 조소앙, 민필호, 엄항섭....
문서에 적힌 위대한 이름만으로 감동을 주는데,
이 문서의 정체는 바로 독립운동가 박영준, 신순호 부부의 결혼 증서다.
1943년, 임시정부가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
독립운동가의 두 집안이 만나 결혼한 동지결혼.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의 딸과
임시정부 외교를 담당한 박찬익의 아들이
역경 속에서 맞이한 경사다.
문서 한 장에 임시정부의 애환과 역사가
가득 담겨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해지게 한다.
동지결혼의 결혼증서를 알아본다.
9월 8일 KBS 진품명품에
독립운동가 박찬익옹의 아들 박영준과 며느리 신순호의 결혼증서가
진품명품시간에 공개 되었다.
독립운동가 박찬익옹은 오창공파로 경기도 장단 출신
부윤공의 찬오씨 증언에 의하면
일본 강점기에 박찬익씨댁의 재산을 비밀히 처분하여 독립자금에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부친(학서옹)에게서 들었다고 하고 오창공 종손도 확인해 주었다.
朴英俊(1915--2000)
임시정부 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광복회고문 등을 역임했다.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박영준翁 이 2000년3월27일 오전 8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85세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
(중앙일보 2000/4/1)
2000년 3월27일 타계한 애국지사 박영준(85 예비역 소장)옹 은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독립군으로 활약했고, 건군이후에는 초대 장훈감을 지낸 군의 원로다.
특히 박장군의 부친은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남파 박찬익(48년 작고)선생이어서 이들은 부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4남2녀중 막내로
1915년 중국 퉁징(용정)에서 태어난세서 태어난 박장군은 어린 시절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15세 때인
1930년 상하아러 부작정 부친을 찾아가 독립운동가로서의 길를 걷기 시작했다,
부친의 명을 받고 박장군은
1938년 지하 항일조직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1942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한후에는 대일무장 투쟁을 하기도했다,
1943년 신규식의 질녀이자 임정요인인 신건식의 딸인 순호(79)와 결혼했다.
순호씨는 “당시임정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자연 스렵게 가까워졌다” 면서 “그분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고 회고 했다,
1945년 박장군이 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을 맡았을 때 동료였던 장호강장군은 “당시 조국을 찾겠다는 박장군의 뜨거운 의지에 부하들은 물론 동료들도 감동했다,”고 회심했다.
해방후 박장군은 3년간 중국에 남아 현지 한국인 보호에 주력했다. 중국인 탄압에 앞장섰던 일부 한국인들이 ‘망국노로 불리며 잡단 테러의 대상이 됬기 때문이다.
박장군이 평소에 “우리민족이 다시는 忘國奴 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배경과 무관치 않다.
1948년 귀국한 박장군은 12월 국군 소령으로 특별임관 했다. 광복군계급이 중령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강등된 셈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특히 건군 초기 국군 간부의 주력이 일본군 출신으로 짜여저 있었는데도 “새나라를 지키는데 과거는 중요치 않다”면서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1952년초 정훈감을지낸 박장군은
1961년 현역으로 한국전력사장에 임명 됬다가 63년 사장직에서 무러났다. 이후 광복군동지회 회장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
딸 천민씨는 “평소에는 다정하고 자상했지만 아버지의 출퇴근시에는 문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고 규율을 중요시하는 박장군의 단면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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