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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한가람
ㆍ작성일 2020-02-26 (수)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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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박영준가족 결혼이야기

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씨 딸 박천민씨 가보 2,129점 기증




<박천민 씨의 할아버지 박찬익 씨(뒷줄 오른쪽)1940년 백범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과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 부부(앞줄 양쪽) 등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위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3년 박 씨 부모의 결혼 증서로 임시정부가 최초로 발행했고 김구 선생이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붉은색 종이에 적혀 있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19702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 불이 활활 타는 2층 단독주택 앞에 박천민 씨(60·)가 서 있었다. 당시 박 씨의 나이는 17. 그의 어머니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1층에서 궤짝 두 개를 끌고 나왔다. 어머니는 다급하게 너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이걸 지켜라. 이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보란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불이 꺼질 때까지 꼼짝 않고 궤짝을 지켰다. 교복과 책이 불에 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뒤 불은 꺼졌지만 2층은 모두 타버렸고 1층은 물바다가 됐다. 일주일 뒤 박 씨는 중학교 졸업식에 사복을 입고 갔다. 그 대신 그가 지켰던 궤짝은 무사했다.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지방을 돌아다니던 박 씨가 잊고 있던 궤짝 앞에 다시 선 것은 50대 후반 무렵. 노환으로 몸이 편찮아진 어머니가 그에게 가보를 맡긴 것이다. 6·25전쟁 때 어머니가 궤짝 속 물건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켰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궤짝을 열자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을 누볐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한 아름 쏟아졌다. 박 씨의 아버지 남정 박영준(19152000)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박 씨의 어머니 신순호 (19222009)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신규식의 조카이자 광복군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박 씨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남파 박찬익(18841949)이다.

200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뒤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 씨는 궤짝 속 자료를 비롯해 부모의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박 씨가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는 2,129점에 달한다.

기증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박영준과 신순호 의 붉은색 결혼증서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부부를 맺고로 시작하는 증서에는 주례 김구, 증혼 조소앙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결혼식은 19431212일 중국 충칭 우스예항 임시정부 청사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강당은 독립운동가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는 한국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이날 신부가 입은 중국식 전통 의상 치파오도 기증됐다. 이 밖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사진, 단군 영정, 광복군 훈련 사진 등 다양한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박 씨가 기증한 자료는 23일부터 1025일까지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라는 주제로 전시될 예정이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박 씨의 가족사 자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 자체라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국사 교사를 지냈던 박 씨는 어머니는 과거 중국에서 학교 다닐 때 중국인들로부터 망국노라고 불린 것을 내내 가슴 아파했다그 말을 다시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신순호  박영준


 

 




박찬익 (朴贊翊 ,)1884 1 2 ~1949 3 9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

호는 남파 (南坡 ), 아명은 박창익 (朴昌益 )이다 .

동량 (오창공 )-(금양위 )-세교 -태두 -필하 -사정 -형원 -종악 (우의정 )-만수 -제민 -대양 -영주 -봉서 -찬익 -영준 -천기 .천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박봉서 (朴鳳緖 )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

1904 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 박원호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

1907 년 초에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 박호원 등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야학을 조직하였다 .[1]


 

1908 4 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 년에 졸업하였다 .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 ,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

1918 11 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등 38 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1]

1919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

같은 해 4 23 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

1921 3 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 7 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1]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

1922 2 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

1926 9 31 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 .[1]


임시정부 활동

1929 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

1930 10 월 중국 국민당 제 4 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

1932 5 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

1932 6 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1]

이후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왔다 .[2]

1934 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 [1]

6 월경부터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은 김구와 불화가 생겼고 , 더욱이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3]

1938 7 월 이시영 ,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 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 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 한편 1942 10 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 .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

1943 5 월에는 김구 ,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


 

해방후

1945 8.15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

1946 2 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 년 중국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

1948 4 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

1948 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


 

사후

1949 3 9 일 서울 창신동에서 사망하였다 . 1963 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993 11 19 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朴英俊 (1915--2000)

임시정부 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시작으로 한국광복군 제 3 지대 훈련총대장 등을 지내며 항일운동 을 벌였다 .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광복회고문 등을 역임했다 .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지낸 애국지사 박영준 2000 3 27 일 오전 8 시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 85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수상

아들 ; 박천기

; 天敏 (대원예고 교사 ) 사위 이흥권 (인천지법 부천지원장 )

2000 3 27 일 타계한 애국지사 박영준 (85 예비역 소장 )옹 은 1930 년대부터 중국에서독립군으로 활약했고 , 건군이후에는 초대 정훈감을 지낸 군의 원로다 .

특히 박장군의 부친은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남파 박찬익 (48 년 작고 )선생이어서 이들은 부자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 4 2 녀중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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