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ㆍ작성자 관리자
ㆍ작성일 2014-11-03 (월)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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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쌍용검과 돈암 박종경

 

 

조선 후기에 훈련도감 대장을 지낸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그의 저서인 돈암집’(敦巖集) 원융검기(元戎劒記)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쌍룡검(雙龍劒)을 병조판서 심상규(沈象奎)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검 8 자루중 소재를 알 수 없어 전설로만 불리던 검 쌍용검 2자루였습니다.

현충사에 소장주인 4자루(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긴 의장용검)

충렬사에 소장주인 4자루(충무공 사후 명에서 보내온 것)

그리고 실제로 충무공께서 항상 지니고 다니셨던 2자루가 쌍용검 이라고 합니다.

소재를 알 수 없어 전설로만 불리던 쌍용검이

구한말 박종경의 돈압집에서 존재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1910년 조선미술대관에서 실제로 수록한 사진까지 발견되어 쌍용겸의 시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기록에는 궁내부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만 되어있을뿐 그후에 행방을 알수 없었습니다.




元戎劒記

兵部尙書斗室沈公贈余一劒曰。此李忠武之所佩109_119d也。藏之久矣。我書生無所用。爲上將軍者乃可耳。余拜而喜甚。拔之長可丈餘。泯然無際。眞良劒也。脊有詩曰鑄得雙龍劒。千秋氣尙䧺。盟山誓海意。忠憤古今同。余驚語曰又有一枚也。安得此而合之。過十數日。忽有持劒而入告者曰。異哉此有鬻焉。與將軍所得而愛之者。何其酷相類也。余視之。沈公所贈。宛在壁上。默然良久。始問釰所從出。人自牙山縣有帶來。余曰。信乎向者沈公之言今不爽。而又得其一釰也。噫。壬辰倭冦之亂。戰必捷守必保。以基我海東中興之功。被管絃而紀太常。饗之俎豆而不朽其名者。惟109_120a忠武是已。公旣發跡於牙。及其沒葬于牙。劒又出于牙。公亡後二百有餘年。物之聚散。是固理也。而今復有合。物亦靈矣。遂亟購之。與沈公所贈同藏于匣。不使專其美於豊城二釰也。余亦書生。踈於君子之武備。惟俟後之如忠武公者傳之。歲辛未十月下澣。紀其始末如右云爾。。



병부상서 심두실 공이 나에게 검 한 자루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검은 이충무공이 패용하던 것이오. 내가 간직한 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에게나 어울리겠소." 라 하였다. 나는 그 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절하고, 그것을 뽑아보니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득하기가 끝이 없었다. 참으로 좋은 검이었는데, 칼등에 시가 있었다.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고금에 같도다.

내는 놀라서, "또 한 자루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구하여 합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십 수일이 지나서, 홀연히 검을 지니고 들어와서 고하는 자가 말하길, "신기하게도 이것을 샀습니다. 장군이 지니고 계시면서 아끼시는 검과 어찌 그리 꼭 같단 말입니까?" 라 하였다. 내가 심공이 준 검과 비교해보니 벽에 걸어놓은 것과 꼭 같았다. 잠자코 한동안 있다가 비로소 검의 출처를 물었더니, 아산현에서 차고 온 자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말하길, "믿을 만하다. 지난번 심공의 말이 지금도 어긋나지 않으니, 또 검 한 자루를 얻었구나." 라 했다. ... (중략) ... 신미년(1811년, 순조 11) 10월 하순에 그 시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노라

                               박종경,<돈암집> 6권의 <원융검기>에서

 

 

 그 뒤 이 칼은 조선군부에서 중요한 물건으로 보관해 왔다고 전해진다. 1907년경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뒤, 조선 군부로부터 이 칼을 빼앗았고 궁내부 박물관에 소장시켰던 듯 하다. 다행히도 1910년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에 수록되어 실물의 형상을 지금까지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칼은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이 가져가거나 폐기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하고, 해방이후 6.25에 이르는 사회적 혼란기에 분실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文肅공  박종경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

판서 준원(準源)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이조참판 원경유(元景游)의 딸이며, 누이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이다.

1790(정조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敎官)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 등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가 수렴청정을 하자, 지극한 총애를 입어 이듬해 홍문관부수찬으로 기용

되고, 응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규장각에서는 직각(直閣)으로부터 직제학까지, 그리고 참찬을 거쳐 판서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804년 잠깐 여주목사를 지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매일 사방에 격문이 나돌자, 당시 훈련도감에 있어서 (軍心)을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1812년 호조판서가 되어 군국기무에서 공부(貢賦)까지 실권을 쥐었다.

이때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으로부터 임금의 인척으로 위복을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 탐내고 사적인 감정으로 살인하는 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자 사직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내직에 들어

와 몇 년 후 훈련도감을 맡았다.

1814년에는 왕의 병에 시약(侍藥)한 공로로 안마(鞍馬)토지노비를 하사받았다.그가 죽자 왕은 친히 제문을 지어서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가통을 세우기 위해서 5대 이하의 유고를 모두 모아 반남박씨5세유고 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하고, 선대의 묘소에 비석이 없는 곳은 모두 비석을 세웠다. 글씨로는 박준원신도비 朴準

源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응천-동민--세성-태원-弼履--사석--윤원--종여--운수--제근--정양

                                          .--준원--유빈박씨

                                                   --종경--

                                                                --종보--周壽--齊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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