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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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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6-21 (화) 1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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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추천: 0 ㆍ조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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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P: 114.xxx.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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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영주 박계양
23세 박계양(朴啓陽) |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계양(朴 啓 陽)[1888~1937]은 1919년 봉화군 봉성면에서 독립군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혁신공보(革 新 公 報)」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박계양은 지금 영주시 고현동에서 출생하였다.
박계양은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였다. 박계양은 마침 중국 상하이[上 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응봉(鄭 應 鳳)[일명 정의극(鄭 義 極), 1895~1947]·곽덕규(郭 德 奎) 등과 함께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하여,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수하기로 계획하였다. 정응봉과 곽덕규는 1919년 9월 24일[음력 8월 1일] 오전 11시경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의 자산가 박규영(朴 奎 永)의 집에 들어가 독립군 자금을 위한 출자를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자 국가를 위해 자금을 준비해 두라고 경고한 뒤 문을 나섰다. 이들은 1919년 9월 24일 그 마을의 박용하(朴 龍 河)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돈이 없자 준비를 해 두면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그 뒤 한두 차례 다른 사람을 보내 출금을 촉구하던 중 1919년 11월 15일 박계양과 정응봉이 체포되면서 중단되었다. 이와 별도로 박계양은 한국이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하려는 계획으로 정응봉·류종렬(柳 宗 烈)과 셋이서 문경군 농암면 율수리 신철균(申 喆 均)의 집에서 「혁신공보」라는 격문을 작성했다. 한국의 독립과 서울의 독립운동 청년단의 활동 및 독립군 자금을 위한 부호들의 협조 등과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격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면사무소에 우송하거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배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15일 순찰 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문서는 배포해 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박계양은 1920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대정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20년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계양은 2009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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