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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hangaram
ㆍ작성일 2016-03-26 (토)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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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문의 평도공 과 청송심문의 안효공

반남박문의 평도공 과 청송심문의 안효공
(潘南朴門의 平度公과 靑松沈門의 安孝公)
                                             전 부도유사 남곽공 후 정서(丁緖)


<참고>
본글은 1998년 1월 종보에 실렸던 글을 타문중과 시비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종보를 파기하고 본글을 삭제한후 새로히 종보를 발간했다.
타문중과 아무런 시비가 될 이유가 없고 , 필자가 오창공이 쓰신 기재잡기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을 옮겨놓은 글인데 조선사를 이해못한 몇몇분의 기우(杞憂)로 인하여 사장(死藏)된 글로서,
안효공의 죽음은 역사학자 모두가 태종의 왕권강화 정책으로 인하여 죽게된것을 인정하는 사건인데,
안효공과 그 후손이 역사시실을 왜곡(歪曲)하여 우리 반남박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 한것이다.
이것을 해명하는 글인데 몇몇분이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로 글을 삭제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 평도공에게 죄를 씨우는것이 아닌가 생각되기에 늦은감은 있으나 종보에는 못올랐지만 이마당을 통하여 잘못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글은 전 부도유사 정서님에게 허락은 받지않았으나, 너무나 좋은 글이기에 올려 놓았습니다
정서님께서 이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가람




우리 반남박씨 6세조이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 호 조은(釣隱)1370-1422)께서는 시호(諡號)가 평도공 이시다.
우리 반남박씨 와 함께 조선조 대성의 반열인 청송심씨의 심온(沈溫)은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자 중옥"仲玉"?-1418)께서는 시호가 안효공 이시다.
평도공 과 안효공, 이 두분 은 이조 세종 조에 좌의정과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함께 국사를 다루는 사이였다.
안효공 은 세종의 장인으로서 1418년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옥사(獄事)에 휘말려 의주(義州)에서 수원(水原)으로 압송 되여 죽음을 받았다.
안효공 이 자진(自盡)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유언(遺言)을 남김으로써 청송심씨 들은 이후 우리 반남박씨 와 의 결혼을 기피하는 관행(慣行)을 남겼다.

"吾子孫 世世 勿與 朴氏 相婚也"
(오자손 세세 물여 박씨 상혼야)
우리 자손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

당대의 국반 가문 사이이면서도 서로 결혼을 못하게 하는 이 유언은 그 동기가 어디에서 나왔던지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양가문의 관계를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우리선대의 오창공(梧窓公,
1569-1635 휘 동량(諱 東亮) 시호 충익공)께서 여러 사적을 추적
평도공 과 안 효공 과 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유언에 얽힌 배경 등을 기술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기록을 남기셨다.

이 기록은 大東野承 13卷 光海初喪錄 歷史舊聞(78-81p)에 있다.
     (이 기록은 대동야승 13권 광해초상록 역사구문(78-81p)에 있다.)

우리 반남박문 뿐 아니라 청송심문에도 상당한 참고가 될 것으로 여겨져
오창공의 이 기록을 옮겨 적어본다.
다만 오창공께서 이러한 양가의 관계를 조명하게 된 동기는 공께서 청송심문의 후손들과 함께 국정에 같이 참여하면서 절친한 인간관계를 맺었기에 더욱 이에 대한 사실확인의 필요성을 느끼셨지 않았나 하는 추리를 하여본다.

오창공께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던 선조(宣祖) 25년(1592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계셨다.    
난이 일어나자 공께서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義州)까지 몽진(蒙塵,왕의 피난)을 하게 된다.
이때 선조의 몽진 길에 함께 공을 세운 분으로 청송심문에서는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1551-1602 휘 友勝, 당시 刑曹正郞). 청원군(靑原君, 1546-1592, 휘 岱, 당시 左副承旨로 왜군에게 전사. 시호 忠壯公), 청림공(靑林公, 1545-1594 휘 忠謙,당시 兵曹參判, 시호 忠翼公)등 세분이 계셨다.
이들 세분과 오창공 등 네 분은 모두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사직(社稷)을 보존한 공으로 2등 호성공신(2等 扈聖功臣)에 책봉(策封)된다.
이러한 인적 교류관계가 오창공으로 하여금 양가의 불편한 관계를 다소라도 해소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쓰시지 안 하시었나 하고 여겨진다.

다음은 오창공 이 평도공 과 안효공 과 의 얽힌 전후 배경을 기술한 내용이다.

"세상에 전하여오기를"
태종이 상왕 으로 계시고 심온이 세종의 수장이 되어 중국에 갔던 시기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심온은 되돌아 와 압록강에 이르자마자 붙잡혀 수원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내 죽음을 받았다.
심온이 죽을 때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대대(代代)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우리 선조 평도공 이 그 당시 좌의정으로 계셨기에, 안효공 이 자기 옥사에깊이 개입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이를 원망하여 남긴 유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일찍이 국사교정(國史校正)에 참여하였는데 총망 중이어서 비록 그 전후사정을 다 기억하지 못하나 그 개요(槪要)는 대략 알고 있다.

도총제(都摠制) 심정(沈정)은 심온 의 아우이었는데 하루는 병조판서 박습(朴習 ?-1418 本貫 咸陽)과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병권(兵權)에 대하여
"요즈음 임금의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오므로 대단히 불편하여 한 곳에서 나오는것만 같이 못하다" 고 하였다.
이 말은 당시 태종이 셋째아들 충녕(忠寧)에게 왕자리를 讓位(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앉은 뒤에도 군대권(軍大權)은 왕에게 물려주지 않고 계속 그 권한은행사하므로 신하들이 왕과 상왕(王과 上王),두 곳에서 지시를 받아 국정을 수행하는데 대한 불편함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에는 경연(經筵, 왕에게 강의)에서 강론이 끝나면 입시(入侍)하였든 대신들이 모두 상왕궁에 가서 태종을 배알하고 경연 중에 있었든 일들을 차례로 아뢰었으며 이를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비록 경연에 참석하는 신하가 아닐지라도 재상의 반열에 드는 종관은 모두 들어가 논하는 일에 참여케 하였으므로 바깥세상의 크고 작은 일과 오고가는 모든 말을 상 왕 에게 아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심정(沈정)의 말도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든 것인데 그 말을 아뢴 사람의 이름은 잊어 벼렸으나 병조정랑 인 듯 하다. (※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였음)
이 말은 들은 상왕은 벼락같이 화를 내어 국문(鞠問)을 하였다.
국문을 하게 되니 그 말을 한 책임을 서로 떠넘김에 따라 연루자가 경대부(卿大夫) 10여명으로까지 확산 되였다.
이 결과 죄를 자복 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고 다 장차 "함께 모의(謀議)하여 난(亂)을 꾸미고,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를 묻기로 하였다.
상왕 태종은 이때 생각하기를 "이것이 어찌 심정 혼자서의 말이겠는가?
이는 반드시 심온의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집사람들이 모두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라고 여겼다.


우의정 유정현(右議政 柳廷顯, 1355-1426, 본관 文化, 시호 貞肅公)과 성산부원군 이직(星山府院君 李 稷,1362-1431, 본관 星州, 시호 文景公)등도 모두 심온의 평소 에 좋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으며 좌우의 사람들도 각각 그 허물을 말하였다.
평도공 도 말하기를 "심온 이 왕의 장인이 되여 당연히 수상이 되어야 하는데 수상은 직위만 높았지 맡은 업무가 없고 좌상은 의례 이조(吏曹)와 예조(禮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관장하고 우상은 호조(戶曹)와 형조(刑曹),공조판서(工曹判書)를관장함으로 심온 이 그의 권세 없음을 꺼려 꼭 좌상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니 권세를 탐내 법을 무너뜨리는 뜻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인정상 누가 권세잡기를 마다하겠소. 좌상의 이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박습 등은 지금 마땅히 처형하겠지만 저 심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니 누군가는 말하기를 "심온이 만약 이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숨어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혹은 "중국에 무고(誣告)하여 변란을 선동, 변을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하였고.또 다른 사람은 "몰래 본국에 돌아와 붕당(朋黨)을 만들어 난을 일으키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의주에서 압록강(鴨綠江) 위를 순찰하여 한 사람도 다니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강계 이하 연변 일대에도 지시를 내려 일률적으로 순찰을 하게 하소서" 하였다.
유정현이 말하기를 "박습 등이 이미 자백하였으니 하루도 그 처형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박습, 심청이 죽으면 심온 이 변명하여 증거 댈길이 없게 될 것이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아니하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평도공이 말한 것은 비록, 유정현이 "결단코 박습의 처형을 보류하지 말자" 고 한것과는 같지 안이하였으나 그렇다고 결정적인 말은 없었다.(주 `처형을 보류하지 말자` 는 "당장 처형하자" 는 뜻임)
상왕이 마침내 의금부(義禁府)의 결정에 따라 박습 등을 참수(斬首)하고 심온이 수원에 귀양간 뒤에 상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곡절을 묻자 심온이 대답하기를 "이런 말은 모두 신이 중국에 간 뒤에 나온 말이오니 발언한 사람과 대면하여 밝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또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박습이 이미 죽었으니 무엇으로 밝힐 수 있겠는가?
경은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죽음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니 경은 나의 뜻을 알라"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깊이 원망한 데는 유정현(柳廷顯)에게 있을 것 같고 "혼인하지 말라" 는 유명(遺命)은 박씨 가문에 대해서였다.
아니면 깊은 원한이 유정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 그 중에 있으면서도 다만 한 집안에만 전해오고 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알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지금 170여 년이 지났는데도 심씨 가문에서 대대로 지켜 감히 혼인하지 못하고 다만 현령(縣令)심융 (沈隆)한사람만이 박씨 집안의 사위가 되었는데 또한 자녀가 없었으니 괴이한 일이다.
(주: 170여 년 전이라 했으니 이 논저(論著)는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배경과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이시기는 태종말년(18년)으로 서기 1418년이다.

이씨 왕조 창건에 절대적인 역량을 발휘한 태종은 고려조 유신들의 반항을 없애는 한편 저항세력의 내부분열, 민심수습 획득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으나 내부사정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아버지인 태조와의 관계가 소원하여지면서 왕세자인 이복동생을 죽이고 아버지인 태조를 타의로 양위시킨 다음 자기 자신이 왕에 오른 분이다.
따라서 어린 왕세자를 밀었든 정도전(鄭道傳)일파의 신권주의(臣權主義)에 맞서 절대왕권주의(絶對王權主義)를 편 태종은 외부세력보다는 내부갈등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반정을 통해 이룩한 왕권이기에 자기를 향한 모반세력들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견제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왕조의 기틀을 쌓아 올렸다.
그러기 때문에 신하의 세력을 제거하여 모반의 소지가 있는 훈신 이나 종친, 외척을 탄압하거나 처형하여 왔다.
말년에는 자기 자신 정신적 불안과 불신이 겹치므로 이러한 것들이 정책에 많이 반영된다.
태종 18년에 그는 자기의 셋째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양위(왕을 물러줌)를 하고 물러나게 되는데 이 과정 또한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면을 보여준다.
당초 태종은 재위 4년이 되던 해 장자인 양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다가 재위 14년 후 이를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를 교체하게 된다.
14년이란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 받들던 친형을 제치고 왕세자에 오른 충녕대군의 입지가 너무나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진다.
왕세자에 책봉되어진지 2개월만에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인간적, 정치적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러한 난감한 처지를 잘 극복하여 세종 재위 32년 동안 탁월한 능력으로 찬란한(燦爛) 치적(治績)을 잘 쌓아 올려 정치를 안정시키고 사회와 문화를 발전시켜 후세에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받들어 진다.
이러한 일은 부왕인 태종의 뜻에 따라 진행된다.
태종은 왕세자를 바꾸는 과정에서의 반대여론을 조기에 잠재우기 위해 충녕대군으 로 왕세자를 교체하자마자 상왕으로 물러나고 왕의 자리를 왕세자에게 넘겨준다.
다만 병권 만은 넘겨주지 않고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이른바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이 죽음을 당하는 옥사가 일어난다.
사위인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왕으로 보위(寶位)오르면서 심온은 국구(國舅)로서 일략(一躍) 영의정(領議政)의 자리에 올라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 하게 된다.
심온은 이조 개국에 이바지한 청송군 심덕부(靑松君 沈德符)의 아들로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였다.
태종 8년에 그의 딸이 충녕군의 비(妃)가 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사위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이 됐다.
정권 핵심의 자리에 오른 심온이 마침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출발하는 심온의 행차 길에 나온 관원들의 수레가 광화문 육조(六曹)앞 거리에서 홍제원(弘濟院) 고갯마루까지 장사진(長蛇陳)을 이뤘다.
"세종시대의 도래" 와 함께 권력 핵심부의 영의정에게 눈 도장을 찍으려는 인파들 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상왕 태종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우리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계모(繼母)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정치 참여를 통해서 왕비나 외척의 정치참여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국구인 심온 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했을 것이다.
더구나 상왕의 거처인 수강궁(壽康宮)의 호위관(護衛官)을 상왕의 지시 없이 교체 한데서도 태종의 심기는 불편해 있었다.
이러할 때 오창공이 기술한대로 "일국 에 2군(두 임금,상왕과 세종)이 있어 두 곳에서 명이 내리는데 대한 부당성" 의 소리가 들리자 상왕인 태종으로서는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 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이에 병조판서 박습, 병조찬판 강상인, 도총제 심정(심온의 동생) 등의 죄를 다스려 먼저 화를 당했고,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심온도 따라서 화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심온의 사인에 대하여 확실히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몇 년 전 MBC-TV가 방영한 일일 연속극"조선왕조 500년" 에서는 영의정 심온이 죽을 때 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는 것으로 방영된바 있다.
그러나 오창공의 기록에 따르면 사약을 내린 것이 아니라 자진(自盡)하도록 함으로써 심온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조 실록에도 사약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이 사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내려본다.
이 옥사에 대한 직접적인 동기는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의 자리에서 왕실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왕권주의 정책에서 비롯되어졌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이 옥사가 평도공 과의 반목에서 비롯되어 졌다고 보는 것은 사건당시의한 단면만 보는데서 오는 오해일수도 있다.
따라서 태종의 심정적인 위기관리 의식과 우의정 유정현 과의 관계, 그리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세 정승의 정치권에 대한 힘 겨루기의 생리가 좌의정 이였든 평도공 에게까지 비화된 것으로 보면 된다.
필자는 우리 반남박씨 문중과 청송심씨 문중의 이 같은 갈등관계를 살피면서 아울러 양가문 에서 이조 500년 동안 배출한 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앙숙지간(怏宿之間)? 으로 잘못 알려진 양 가문의 갈등관계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조선왕조의 정치는 왕도정치이자 신분에 의해 벼슬길이 좌우되는 씨족정치이기 때문에 양가의 정치참여는 많은 참고가 될 줄 안다.
반남박씨 와 청송심씨는 흔히들 8대 국반(國班)이라고 말을 한다.
따라서 많은 인물들이 정치권의 핵심에서 국정을 맡아왔다.
청손심씨 가문은 이조 500년 동안 정승(政丞)13분을 배출하였다.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22분, 안동김씨(安東金氏)19분, 동래정씨(東萊鄭氏)17분에 이은 네 번째의 영광으로 청송심씨가 출중(出衆)한 집안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 정승가운데 영의정이 9 명이나 되어 영상수로는 전주이씨 11명에 버금간다. 또 왕비 3분, 대제학(大提學) 2분, 종묘배향(宗廟配享)한분, 대과급제(大科及第) 194분, 공신(功臣) 8분, 청백리(淸白吏) 2분 등이다.
상신(相臣)분야에서는 우리 반남박씨 가문에 비해 월등하나 그 외는 우리 반남 가문과 엇비슷하다.
다만 청손가문의 시호 받으신 분의 자료가 없어 확인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박 정서(朴丁緖)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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