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ㆍ작성자 박찬승
ㆍ작성일 2016-03-26 (토)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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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족보(임오보와 첨추공 諱 濠와 육우당 휘 회무)
첨추공 휘 호(濠) 방조께서

인조16년 (1638년戊寅) 영천(榮川) 지금 영주군수로 부임하여 저의 13대조 육우당 회무(檜茂) 선조를 상면하시고 우리 집을 방문하여 완벽한 가첩을 보시고 첫 족보 만들 것을 제의 하셨다고 하니 성종 7년 1476년 안동 權씨성화보(成化譜)17세기 문화유씨 가정보가 첫 체계적인 족보라고 하니 우리 종중은 조금 늦으나 첨추공께서 인?! ? 병인 년 부임 첫해부터 목사 송곡 대하(大夏) 방조께서 대략 정리해놓은 보첩과 회무 선조에 완벽한 우리 집 가첩을 참조해서 각처에 사는 종족을 찾아 대동보가 영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첨주공께서는 성품은 위엄이 있고 관대하시고 가정에서는 부모님에게는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에는 독실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하니 육우당 선조와는 같은 진사로써 모든 것이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대동보가 시작되는 1638년 무인 년부터 족보가 끝나는 1642년 임오 년까지 영주군수로 4년 간 재직 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첨추공 배경을 살펴보면 친가로 부친은 장원급제하시고 여러 고을 수령하신 남곽공 동열 이시고 종조부께서는 선조에 국구 이신 반성부 원군 휘 응순 이며 종조부 5형제가 인품이나 자질이 모두 우뚝 하시여 모두 높은 벼슬을 하신 오응이라고 전해 지고있습니다. 그리고 부친 형제분들과 백숙부 형제분들 역시 17동으로 반남박씨 전종중을 빛낸 인물들이며



첨추공 처가를 살펴보면 장인은 인조 조에 4대 문장가이며 영의정까지 지넨 문정(文貞)공 상촌 신흠(申欽)이며 처남 역시 부마인 동양위 신익성이니 이런 위치에 있는 첨추공께서 대동보 때문에 그 긴 세월동안 소백산 죽령 하 조그마한 고을군수로 군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고 임오보를 끝내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아직도 영주 구성공원에 선정비가 남아있다고 전해 들었으니 후손들께서는 혹시 영주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은 더듬어 올라가면은 연원(淵源)이 있고 뿌리깊은 나무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 또한 충실해 조상에 적덕(積德)은 필히 자손에 미쳐 첨추공 후손들이 대대로 훌륭한 사람이 많아 종중을 빛냈다고 들었습니다.



영남에 뿌리내린 우리 가문은 당숙께서는 6.25바로 직전에 영남에서 공장을 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굳이 나주근교 영산포에 주(株)전남주정이란 공장을 설립하신 것이 지금 생각하니 첨추공과 육우당에 오랜 세교 때문이고 지금 생각하고 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부친을 따라 영산포에 자주 가보았는데 꽤 큰 공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외조부께서는 증 영의정이신 충정공 휘 권벌의 후손으로 마지막 소백산 사고 참봉으로 한일 합방 바로 소백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서책들을 규장각으로 옮겨 대여 형식으로 100여권을 그중 귀중본 오창공 기제잡기 기제사초를 일본으로 빼돌렸다고 들었습니다. 기제 사초는 임진왜란 때 국왕에 파천을 호종 하시면서 기록한 책으로 민족 문화 추진위원회에서 국역하였고 서계 사변록 색경 연암 저서 몇 편을 두고 국역하였고 소고 박승임 36번 남계 박세채 132~142 금석 박준원 255 환재 박규수 312등 민족문화 추진위원회에서 국비로 국역예정인걸로 알고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순서도 없고 힘있는 자손들에 장난인지 기다리지 못하고 저의 선조 소고 선생은 우리 문중에서 국역중이니 곧 발행될 예정입니다.
내가 아는 것 이외에 책들이 있으니 각 소 종중에서 귀중 본은 국역 추진하시고 대종중에서 지원해서 판매해도 대종중에 이익이 있을 것 같고 또 자라는 2세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화재 예를 들면 기오정 같은 보존 가치가 있는 오래된 건물 비석 전각등 소종중에서 지방문화제로 지정 받도록 노력하시고 대종중에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업들이 종중에 정신을 지키고 가문을 지키는 일입니다.



해주 정씨문중에서 정문부에 북관대첩비를 찾기 위해 백여 년이나 일본에서 빼돌려 신사에 보관중인 것을 찾기 위해30여 년이나 끈질긴 노력 끝에 대종중과 정부에서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은 해주 정씨 들것이 아니라 의병장 정문부 그리고 함경도민들이 똘똘 뭉쳐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꺾은 우리민족의 유산이며 국보입니다. 우리 종중도 문화유산은 보호하고 홍보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한 시대는 유한하나 우리종중과 종족은 영원한 것 문중에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파쟁과 시기와 모함이며 독선과 아집입니다.
이젠 새로운 도유사님 아래 화기 만당 한 종중 발전을 기원하면서



육우당 휘 회무(檜茂)
소고 박승임에 장손으로 태어나 날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시고 커갈수록 기질이 청명하고 덕성이 순수하여 집에서는 소고공 승임(朴承任)과 부친 취수옹(醉睡翁)휘 록(漉)에 엄격한 가학으로 부모에게 효성과 형제간에 우애 그리고 친척간에 화목했고 스스로 발분 하여 학문을 깊이 탐구하여 조부 소고공께서 장차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라고 기대가 컷 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소고공은 여러 번 소인배들에 모함을 받아 양제역 벽서 사건으로 봉고 파직 당하고 고향에 돌아오면은 배우고 자하는 사람들이 문전에 신이 가득하여 신을 놓을 수 없이 문전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조부 소고공이 풍수지리와 예언에 대가인 격암 남사고와 만나 수 년 내 큰 병화가 있을 거라고 예언하고 나라가 위란에 처하면은 제자 그리고 손자 종손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이라도 아끼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침중 과묵한 조부에 벼슬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알고 조부 소고공이 호당에 들어 중앙에서 부제학 병조참의 대사간 도승지를 두 번 하시면서 서울에서는 집 한 칸도 없어 남의 집을 빌려 살았다고 하며 지방관으로 현풍현감 풍기군수 춘천부사 여주목사 경주부윤         황해도관찰사 강화 유수 전라도 관찰사 (미취임)
마지막 대사간으로 바른 소리를 하시다가 창원부사로 좌천 끝날 때까지 어려운 시기에 정2품에서 삼품 또 사품까지 강등 당하면서도 척신 윤원형 일당들을 탄핵하시고 정자나 류에 좋은 시 같은 것을 판각해서 걸면 뜯어버리라고 하시고 지방관으로 계시고 떠나온 뒤에 선정비가 서면은 목민관으로써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없애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조부 소고공께서 70에 세상을 떠나자 인근노복들 까지도 모두 슬피 울었다고 백암 김륵 문집에 전하고 있습니다.

조부 소고공이 돌아가시고 수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을 주민들이 아버지 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니 17세에 나이로 군관자격으로 참전하시고 소고 선조에 대다수에 제자들이 봉기하여 영주 지방은 외적이 들어오지 못해 백성들은 평시와 같이 농사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자 중에 윤흠도 형제가 동해안에서 소천으로 넘어와 봉화영주로 처 들어오는 왜군을 막다 형제 모두가 전사해 충신 정려 문이 섰으며 원종훈 일등공신만 열거하며 백암 김륵 죽유오운 안촌 배응경등 많은 선비들이 살신성인에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아버지 록께서는 의병장 제봉 고경명의 장남 고종 후처에외삼촌 호남 제봉 고경명은 금산 전투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와 전사하고 맏아들
고종후는 금산 전투에서 살아남아 부친과 동생에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 재차 의병을 모집해 출정하고 호남의병장 고경명에 마상 격문은 선비들이 돌아가면서 읽고 울면서 외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고경명의장남 고종후와 육우당과 내외종 간임]



장남 고종후도 진주성이 함락되자 충노 봉이와 귀인과 같이 장마로 불어난 남강물에 투신 자살 했다고 합니다.진주남강은 호남의병장 김천일 부자 논개등 수마는 애국충혼을삼켜버리고 오늘도 유유흐르고 잇고         장흥고씨 제봉 가문에 고경신등 무려 9명이나 전사 또는 자살했다고 하니 참으로 위로는 나라에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목숨을 바쳐 충효 가문을 빛내고 자손 만대에 자손에게 긍지와 나라사랑하는 사표입니다.



조선4대문장가에 한사람인 좌의정 월사 이정구 정기록 서문에 충 효 열 모두 갖추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가문이 천년을 두고 다시 있을까 하고 쓰고 있습니다.

정유재란으로 왜군들이 광주 제봉종가를 불지르니 식솔을 거느리고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용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 댁으로 피난 와 살아남은 막내아들 청사 고용후가 영주 형수에 외가에 와서 소고 사당에서 육우당과 같이 공부해 진사 장원급제 후 안동 부사등 여러 관직을 마다하고 남원부사로 내려가 부친과 형 식솔들에 충과 효와 열을 알렸다고 합니다. 무청사며 무제봉 이라고 한답니다. 언젠가는 시간이 있으면은 광주 표충사에 가볼 예정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휘 록께서 금릉위 추천으로 휘 록도 음사로 금부도사 사근도 찰방에 제수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모든 마음을 비우고 91세에 향수를 누리면서 맏아들 육우당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다고 하였답니다.


육우당 께서도 인조2년 반정공에 불만으로 이괄난이 일어나자 향인들이 육우당을 추천 의병장으로 추천하자 책을 덮고 붓을 던지고 동생 삼락당 종무와 함께 참전하시고 정묘호란 후금이 3만 대군이 침입하자 진사로서 의금부 도사로 왕이 강화로 파천하자 왕을 호종 하시고 인조반정 1등 공신 이귀와 최명길등은 화의를 주장하나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아니하면은 앞으로 더 큰 화를 면치 못한다고 척화를 주장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피를 토하는 우국에 상소를 올리고 사의를 표하고 고향에 돌아와 위기 지학 하시고 수기하던 중에 병자호란 청군10만 대군이 쳐들어와 또 나라에 병화가 휩싸여 왕은 또 남한 산성으로 피난하고 청군들은 백성들에 제물을 약탈하고 온 장안이 난장판이 되니 또 영주에서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아 싸우러 한양을 향해 제천 청풍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군 용골대에게 무릅을 꿇고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목놓아 통곡하고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의병을 해산함



그 당시 육우당 제종제 휘 남무께서는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으로 남한산성 및 쌍령 전투에서 중과 부적인 청군 10만 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시고 자손 마저 절손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육우당께서는 돌아와 영주에서 8KM떨어진 궁향벽초 조부 소고 선영 하에 수은정 이란 정자를 짓고 세상사람들과 교제도 끓고 송,회,죽,매,난,국을 심고 호를 육우당이라 하고 화초에 키우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중에 첨주공께서 인조 16년 영주 군수로 부임하셔서 첫 족보를 제의하여 종중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도유사는 금양위 휘 미이시고 첫 족보 발문을 받으러 한양 왕복 천리 길을 오셔서 발문을 받고 각 문중에 통문 하여 수단 하시고 나무를 베어 판각(나무에 도장 파듯함)하여 우리 종중 첫 족보 임오보가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이번 족보에 참여하시는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철저한 검증 후 수단 하시고 좋은 족보를 만들어 주시고 자자손손 자랑스런 족보가 되도록 바랍니다.

연안 이씨들 싸우는 것은 멋대로 혼란시기에 만들어 가짜 연안이씨가 끼여 종중 땅을 욕심낸다고 하니 어느 쪽 말이 옳은지 혼란스럽고 시비가 있으면은 분명 흑과 백 있는 것이며 잘 만든 남의 족보도 참조 요망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염려 스러운 것은 나주 박씨들이 남한보다 북쪽 황해도 지방에 많이 산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세양공 둘째 자제분과 저의 선조 휘 록 선조를 자기들 조상이라고 이상한 조작기미가 보이니 각자 조상들이 남의 조상에 조작 당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시기 바랍니다.



나이 칠순 이 가까운데 요즘 조용하여 조상들에 이력을 살펴보니 바른말을 간하다가 귀양간 사람 못마땅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그 날부터 아침저녁 때 거리를 걱정하신 분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2년이나 옥고를 치르시고 또 나와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피해 다니시고 원호처에서 건국공로훈장 애족장 훈장을 찾아가라고 원호처에서 찾아다닌 4종숙 인서씨, 종조부께서는 몇 집 재산이 독립운동 하러 다니시다가 다 없어져 어려서 고통을 받던 일 백부 그리고 여러분이 만세 부르다가 퇴학당해 학교도 못 다닌 사건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영주 우리 종중 주도로 평도공 신도비 그리고 묘전비를 쓴 향전 난선 4종숙 옆에서 먹을 갈든 일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서 덧없이 보낸 세월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머리는 반백이 되고 부끄럽구려



육우당께서 돌아가시자 향인들이 한천서원에 동생 종무와 제향 하시고 국조 인물 고에 의사 박회무로 부릅니다. 육우당 정자가 담이 허물어지고 지나다닐 때 허무하더니 수년 전 국고보조로 나라에서 수리해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우당, 삼락당 형제분에 문집 1,2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2007.3.17
                인천우거에서 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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