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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6 (토)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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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 행적

6세 휘 박은(朴) 1370(공민왕 19)~1422(세종 4).


자(字)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家乘.號 漁隱)
묘(墓)     파주 문산읍 당동리(坡州 汶山邑 堂洞里)

고려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의 아들이며,
이곡(李穀=목은 이색의 아버지)의 외손이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魚孝瞻)의 장인이다.
문음(門蔭)으로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를 받은 뒤,

1388년(우왕 11)문과에 2위로 급제하여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 후덕부승1391년(공양왕 3)에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1392년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가 되어 고과에 정최의 성적으로 좌보궐에 서용
1394년(태조 3)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있을 때 태조의 다섯째아들 방원(芳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1397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이듬해에 발생한 무인정사(戊寅靖社),
             즉 제1차왕자의 난 때에는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방원의 집권을 위
             하여 지방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왕자의 난에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방원이 왕세자가 된
1400년에는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그를 보필하고, 좌산기상시에 오른 뒤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조 전서(典書=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3등으로
             반남군(潘南君:뒤에 潘城君)으로 봉하여졌다.
그뒤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한성부윤,승추부제학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 6)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사
             (明使)를 예의로 잘 접대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이듬해에 진향사(進香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에 옮겼다가
1409년에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마쳤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게 되어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으며,
             겸 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어 옥무(獄務)의 신장정수
             (訊杖定數)를 1차 30인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고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考功)행정제도를 개선하였다.
1416년에는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 입각(入閣)의 예에 들게 되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沈溫)과 대립되어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1422년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講經)을 채택하도록 강력히 주장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니,
초시에 제술(製述)을 주장하는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의 학통과 다르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엠파스 한국학중앙연구소



禑王    11년 1385    진사시 합격
        14년 1388    문과 급제 하여 후덕부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태조 3년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박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
    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외람히도 어리석은 사람이 지나치게 알아주심
    을 받아, (錦州) 3년의 임기를 면하고 조정으로 들어와 문하부(門下府) 간관
    (諫官)의 영광을 받았는데, 갑자기 동료의 탄핵을 받게되었으니, 실로 나의 잘못
    으로 스스로 취한 것이나, 다시 군직(軍職)을 받게 되었으니, 오직 공(公)이
    용서한 덕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말과 행실이 그릇될까 두려워하며, 외롭고 가난하고 병까지 있는 몸이나,
    뜻과 기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대접하지 아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
    하를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각하는 임금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
    요 나라와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아니요, 노둔한 자 밝을 때에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객이 수없이 드나들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이 드나들 것이
    로되, 진실로 뜻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렇게 하지 아니하리오.하였다

태조 6년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박은이 下職에 있을 당시 그를 무
     척 구박했던 계림군 유양이 후에 국법을 어겼을 때 박은이 이를 다스리면서도
     복수 커녕은 오히려 구명을 했을정도로 도량이 넓었다)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박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은이 만일 당신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
     한 당신과 같게 될 것인데, 어찌 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 하였다. 얼마 되
     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양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하여 본국에 배반하였다 하고
     헌부(憲府)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었다 그때 집정은 생각 하기를, “은은 일찍
     이 양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잘 적발할것이라 하고 <은을 사헌 시
     사에 임명하는> 인사가 있은 것이다. 은이 대(臺)에 오르게 되자, 양이 뜰 아래
     서 쳐다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은이 반드시 그전
     원망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리(刑吏)가 결안(結案)을 가지
     고 은에게 나오니, 은이 붓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은이 어찌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는 데 빠지게 할 수있느냐.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아
     니 하여, 아무 일 없이 양을 보호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
     뒤에 유양이 정승(政丞)이 되어 은에게 이르기를,양은 진실로 소인이었다. 그대
     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치려고 한것이 오래였다라고 하였다. 집정은 은
     을 미워하여 지방으로 내보내어 (知春川事)가 되었다.


정종 2년 8/4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은(朴은)은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
태종 1년 1/15 형조전서에 임명되고, 형조전서(刑曹典書=判書) 박은 은 정성
     과힘을 다해서 여러 번 충성을 바치어 翊戴佐命 하였으니, 3등으로 칭하하고,
     부처는 1등을 뛰어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1 등을 뛰어 음직을 주고, 직계아
     들이 없는자는 조카와 사위를 음직을 주고, 밭 80결 노비 8구, 2품 이상은 백
     은 25냥, 3품 이하는 은대(銀帶) 1요(腰),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3명, 진
     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한다.
태종2년 호조 전서로 전임되고,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는데, 교
     서를 내려 포장하였다. 병,리 두 조의 전서(典書=判書)를 역임하고,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더 받고, 관계를 올려 반남군(潘南君)에
     봉하였다.
태종2년 1/20 박은(朴 )을 강원도 도관찰출척사(=觀察使)로 삼았다.
태종3년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태종6년 1/25 박은을 전라도 도관찰사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
에서 환자(宦者) 황엄(黃儼)을 보내서 제주(濟州)의 동불(銅佛)을 구하여, 간 데마다 위세를 부리므로, 여러도의 관찰사가 위세에 눌려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오직 은이 예(禮)대로 대접하니, 엄도 흉악한 버릇을 거두고 감히 방자하
게 굴지 못하였으며, <서울에> 돌아와서 태상 에게 사뢰기를,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 뿐이라 하였다.

태종7 9/12 중국에 朝見 하는 데 수행하는데 박은 이 가는 것을 전송하고,
     9/13 반성군 朴은 鷄林君 李升商을 보내어 명나라 서울[京師]에 갔는데,
            朴은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제문(祭文)을 받들었다,
태종8 10/1 참지의정부사로 사헌부 대사헌을 겸임 하였다
     이때 하윤(河崙)이 좌정승(左政丞)이 되어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재하 고, 우정승 이하는 다만 서명할따름이었다. 朴은 은 일이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하륜의 앞에 나아가서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 하다가, <자기의 의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형조판서로 임명되고,

태종9년 2/25 박은(朴 )을 반성군(潘城君)으로,
태종10년 11/1 박은()을 불러 지의정부사로 삼고, 왕명을 받아 평양성(平
         壤城) 수축을 감독하고, 공사가 끝난 뒤 준공을 보고하니, 태상왕은 조정
         관원을 보내어 선온(宣 )과 표리(表裏)를 내려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

태종12년12/13(갑자) / 반성군 박은의 본향을 나주로 정해 주다 》
반성군(潘城君) 박은(朴은)의 본향(本鄕)을 나주(羅州)로 내려 주었다. 박은은 본
래 나주 임내(任內) 반남현(潘南縣) 사람인데, 이제 예(例)에 따라 임내(任內)를 혁파(革罷)하여 나주에 합치었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으니 박은의 청을 따름이었다. 뒤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封)하였다.

태종13년 6/5 금천군(錦川君) 박은으로 겸 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를
    13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서 봉하고, 겨울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 하였다. 이때 옥사를 판결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형장으로> 그 정상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심문 하는 형장이 일정한 수가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형장 밑에서 무을 구하여 얻지 못하리오.하고, 곧 임금에게 계하여 심문하는 형장은 한 차례에 30 대씩으로 정하여, 일정한 법을 만드니,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관계 가 (崇政)으 로 오르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태종14년 2/10 박은(朴 )을 금천군(錦川君) 겸 판의용순금사사 )로 삼았다.
태종16년 5/25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고,
태종16년 6/4 안성 부원군 이숙번에게 농장에 거주하게 하다. 이숙번의 죄를 청하
는 여러 상소문 안성 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에게 명하여 농장農庄)에 거주하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우의정 박은(朴 )과 병조 판서 이원(李原)을 불러서 이숙번(李叔蕃)이 범한 죄상을 유시(諭示)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고, 여러 대신 들이 날마다 나아가 다투어 이재의 의논을 드리고 두려워하고 몸둘 곳을 모르고 분주(奔走)하였으나, 이숙번은 병을 핑계하여 여러 달 동안 대궐에 나오지 아니하였다.이날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숙번은 근래에 어찌 하여 출입하 지 않는가?; 하고,
지난 5월 25일에 신이 마침 강무(講武)의 상소(常所)를 하나로 정하는 일 때문에 명(命)을 받고, 이숙번의 집에 이르니, 이숙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정사는 어떠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박은(朴;)이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하니, 이숙번이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말하기를 박은은 일찍이 내 밑에 있었는데 명이 통하는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은 필시 어찌 하여 나를 버리고 박은을 천거하였는가,하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종16년 11/2 좌의정으로 올라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고
태종17년 6/12朴은은 바로 黃丹儒의 육촌제(六寸弟) 이지성(李之誠)의 증손(曾孫)으로
태종17년 12/3 좌의정(左議政) 박은(朴은)을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
태종18년 6/7 좌의정 박은(박은 )을 세자사(世子師)로 삼고
세종원년 8/11 박은을 좌의정 영경연사(左議政領經筵事)로,
    3년 12/3 좌의정 朴은이 병으로 사직(辭職)하였다.
    3년 12/7 朴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을 삼고이보다 먼저 朴은이 병이 위중하니, 두 임금께서 (金益精을 보내어 이원에게 묻기를,박은좌의정이 병이 위중하니, 누가 이를 대신 할 만한가

세종3년12월 병으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서 요양하였는
데,병이 짙어지자 태상이 약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계속하여 내선(內膳)을 내 리고, 또 내옹인(內饔人)을 그의 집에 보내어 명하기를 박은조석 반찬을 그의 원하는 대로 하여 주되, 내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게 하라.하고, 태상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게하였다.
박은이 태상의 병환이 오래 간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의 병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성명하신 임금은 만년을 살아야할 터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세종4(1422) 5/9 금천 부원군 朴은의 졸기

     금천 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은)이 졸(卒)하였다. 은의 자는 앙지(仰止)요, 전라도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요, 고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다. 난 지 여섯 살 때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라났다. 조금 장성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읽고 19세 때에 급제하여 후덕부 승(厚德府丞)에 임명되고, 여러 번 전임하여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임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할 때, 밖으로 나가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제일이었으며, 좌보궐(左補闕)로 전임되었다가 태조 3년에 또 외임으로 지영주사(知永州事)가 되었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외람히도 어리석은 사람이 지나치게 알아주심을 받아, 금주(錦州) 3년의 임기를 면하고 조정으로 들어와 문하부(門下府) 간관(諫官)의 영광을 받았는데, 갑자기 동료의 탄핵을 받게 되었으니, 실로 나의 잘못으로 스스로 취한 것이나, 다시 군직(軍職)을 받게 되었으니, 오직 공(公)이 용서한 덕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문이 넉넉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말과 행실이 그릇될까 두려워하며, 외롭고 가난하고 병까지 있는 몸이나, 뜻과 기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이미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하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각하는 임금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요, 나라와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요, 노둔한 자질을 밝을 때에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객이 수없이 드나들어,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이 드나들 것이로되, 진실로 뜻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렇게 하지 아니하리오.”

하였다. 태조 6년에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당신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한 당신과 같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 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조정에서, 양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하여 본국에 배반하였다 하고 헌부(憲府)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었다. 그때 집정은 생각하기를,

은은 일찍이 양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잘 적발할 것이라하고, 〈은을 사헌 시사에 임명하는〉 인사가 있은 것이다. 은이 대(臺)에 오르게 되자, 양이 뜰 아래서 쳐다보고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은이 반드시 그전 원망을 갚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리(刑吏)가 결안(結案)을 가지고 은에게 나오니, 은이 붓을 던지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는 데 빠지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아니하여, 아무 일 없이 양을 보호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 뒤에 양이 정승(政丞)이 되어 은에게 이르기를,

“양은 진실로 소인이었다. 그대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치려고 한 것이 오래였다.”

라고 하였다. 집정은 은을 미워하여 지방으로 내보내어 지춘천사(知春川事)가 되었다. 태조 7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상이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사헌 중승(司憲中丞)에 임명하였다. 정종 원년에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가 되었다가, 곧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2년에 공정왕이 태상을 세자로 책봉(冊封)하자,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과 세자 좌보덕(世子左輔德)을 거쳐서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에 전임되고, 태상이 임금이 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에 임명되고, 태종 원년에 호조 전서로 전임되고,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는데, 교서(敎書)를 내려 포장하였다. 병·리(兵吏) 두 조(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더 받고, 관계를 올려 반남군(潘南君)에 봉하였다. 2년에 강원도 관찰사, 3년에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승추부 제학(承樞府提學)으로 전임하고, 4년에 면직되고 반성군(潘城君)에 봉하였다가 곧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공신은 외임으로 내보낼 수 없다 하므로 정지하였다. 6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에서 환자(宦者) 황엄(黃儼)을 보내서 제주(濟州)의 동불(銅佛)을 구하여, 간 데마다 위세를 부리므로, 여러 도의 관찰사가 위세에 눌려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오직 은이 예(禮)대로 대접하니, 엄도 흉악한 버릇을 거두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으며, 〈서울에〉 돌아와서 태상에게 사뢰기를,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 뿐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중앙으로 불러올려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하고, 8년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사헌부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이때 하윤(河崙)이 좌정승(左政丞)이 되어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재하고, 우정승 이하는 다만 서명할 따름이었다. 은은 일이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윤의 앞에 나아가서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다가, 〈자기의 의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형조 판서로 임명되고, 9년에 반성군(潘城君)으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겸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되고, 10년 왕명을 받아 평양성(平壤城) 수축을 감독하고, 공사가 끝난 뒤 〈준공을〉 보고하니, 태상왕은 조정 관원을 보내어 선온과 표리(表裏)를 내려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판서로 전임되었다. 3년에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서 봉하고, 겨울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였다. 이때 옥사를 판결하는데 여러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형장으로〉 그 정상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심문하는 형장이 일정한 수가 없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형장 밑에서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리오.”

하고, 곧 임금에게 계하여 심문하는 형장은 한 차례에 30대씩으로 정하여, 일정한 법을 만드니,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았다. 관계가 숭정(崇政)으로 오르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6년 3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고, 5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고, 11월에 좌의정으로 올라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하고, 18년에 태상왕이 임금에게 선위하려고 하였으나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은이 〈그 뜻을〉 짐작하여 알고 심온(沈溫)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임금의 의향을 그대가 아는가.”

또 말하기를,

“임금의 처사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끝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내선(內禪)한다 할지라도 아무 탈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온이 은의 말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이 은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고, 더욱 온과 말한 것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곧 태상왕에게 계하였다. 태상왕이 선위한 뒤, 임금이 태상왕께 사뢰기를,

“은이 어느 날 온에게 내선한다는 일을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은은 순결한 신하가 아닙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내선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은이 직접 이것을 들은 까닭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

하였다. 심온이 죄를 받게 되자, 은이 태상께 계하기를,

“온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자기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하니, 태상은 듣고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기를,

“은은 자기 반성은 할 줄 모르고 온의 세력부린 것만 허물하는가.”

하였다. 김점(金漸)이 항상 조정에서 은을 보면, 반드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대의 등용한 사람은 다 그대의 집에 드나들던 자요, 우리들의 부탁한 사람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니 옳은 일인가,”

하니, 은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은이 비록 친척을 많이 등용하였으나, 조정의 명사를 다 뽑아 썼으므로, 남들이 심히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은은 취마의 재주가 있고, 임금의 의향을 잘 맞추어 나갔다. 세종 원년 봄에 태상이 평강(平康) 등지에 거둥할 것을 내심으로 작정하고 은과 유정현(柳廷顯)·이원(李原)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호위하는 사람을 간편히 하고, 잠시 동안 평강에 행행(行幸)하려고 한다.”

하니, 정현이 말하기를,

“이제 농사가 한참 성하여, 비록 호위할 사람을 간편히 한다 할지라도, 두 임금이 거둥하면, 민폐가 많을 것입니다.”

하고, 은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심히 옳습니다.”

하고, 원은 두 사람의 말을 어름어름하여 두었다. 태상이 전지(傳旨)하기를,

“영의정의 말은 내가 공경하여 듣고, 좌의정의 말인들 또한 어찌 망령된 신하라 하겠는가.”

하였다. 은의 얼굴빛이 크게 변하여 정현과 서로 좋게 지내지 아니하였다. 3년 12월에 병으로 의정(議政)을 사임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 자택에서 요양하였는데, 병이 짙어지자 태상이 약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계속하여 내선(內膳)을 내리고, 또 내옹인(內饔人)을 그의 집에 보내어 명하기를,

“조석 반찬을 그의 원하는 대로 하여 주되, 내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게 하라.”

하고, 태상이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환관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였다. 은이 태상의 병환이 오래 간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의 병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성명하신 임금은 만년을 살아야 할 터인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작고한 연령이 53세이다. 사흘 동안 정사를 보지 아니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시호를 평도(平度)라 하였는데, 강기(綱紀)를 펴 다스려 나가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義)를 재량할 줄 아는 것을 도(度)라 하였다. 은은 식견이 밝고 통달하며, 활발하고도 너그러우며, 의논이 확실하였다. 내외의 직을 역임하여 업적이 심히 많았는데, 태상왕이 크게 소중히 여겨,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그를 참여시켰다. 아들은 박규(朴葵)·박강(朴薑)·박훤(朴萱)이었다.


    작고한 연령이 53세이다.    사흘 동안 정사를 보지 아니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시호를 평도(平度)라 하였는데,
    강기(綱紀)를 펴 다스려 나가는 것을 평(平)이라 하고,     (布剛治紀曰平)
    마음이 능히 의(義)를 재량할 줄 아는 것을 도(度)라 하였다. (心能制義曰度)


朴은 年譜
1370    戊戌生 高麗 恭愍王 19年
1375     6세    부모님 돌아가시다. (禑王 元年)
1378     9세    判 崇福都監事
1385    16세    會試 2等 第 1人 進士
1388    19세    殿試사 丙科 第 2人及第 權知典校 校勘
1389    20세    朝奉郞 通禮門判官 正五品 (恭讓王 卽位)
1391    22세    奉善郞試 通禮門副使 正四品
1392    23歲    奉善大夫 開城少尹            奉列大夫 知錦州事 兼 勸農防禦使
1393    24歲    通德郞 左補闕知製 敎
1394    25세    朝奉大夫 知永州事            河陽監務 兼 勸農兵馬團練副使
1395    26세    知 永州事 兼 勸農防禦使
1396    27세    朝散大夫 知 永州事 河陽監務
1397    28세    奉正大夫 司憲侍史直 修文 中訓大夫 知 春州事 加平朝宗監務 兼 勸農團練使
1398    29歲    試 司憲中丞
1399    30歲    通訓大夫 判 司水監事 兼 知 刑曹事
1400    31歲    仁寧府 左司尹 世子左輔德
     5月     通正大夫 左散騎常侍 寶文閣 直提學知製 敎
     8月     忠州牧使兼 勸農兵馬團練使
     12月     嘉善大夫 刑曹典書 修文殿 直提學
1401    32歲 翊戴左 命功臣 戶曹典書 兼 典醫監事         兵曹典書 吏曹典書
     7月     推忠翊戴左 命功臣 嘉靖大夫 潘南君 寶文閣         提學 兼 判 典醫監事
     12月     潘城君
1402    33歲 江原道 觀察使 黜陟使
1403    34歲 漢城尹 承樞院 提學
1404    35歲 潘城君 鷄林尹 兼 勸農管學兵馬節度使        寶文閣提學 兼 判 典醫監事
1405    36세 差獻官 祈雨于白嶽
1406    37歲 全羅道觀察使 同參知 議政府事
     7月     左軍都摠制府 同知 摠制 集賢殿提學        
1407    38歲 資憲大夫 兼 判 勸農寺事
     7月     兼 判 禮賓寺事
     9月     明 皇太后 崩 進香使 赴京使
1408 39歲    兼 判 勸農寺事 嘉靖大夫參知         議政府事 兼 司憲府 大司憲
                與委官 二相 刑曹參議 司諫院齊座
1409 40歲    兼 判 內贍寺 典醫監事 全羅道巡察使
     10月     慶尙道巡察使 寶文閣提學 兼 判義勇巡禁司事    西北面都巡問察里使 兼 兵馬都節制使 平壤尹
1410 41歲 兵曹判書 集賢殿 提學 兼 判 訓練館事
1411 42歲 司憲府大司憲 戶曹判書 兼 判典農寺事 潘城君
1413 44歲 正憲大夫 錦川君 兼 判 司宰監事        錦川君 兼 判 義勇巡禁司事 參贊議政府事
1414 45세 集賢殿 大提學 僞奴婢辨正都監提調     錦川君 右軍摠制
1415 46歲 崇政大夫 錦川君 兼 集賢殿 大提學
1416 47歲 判 中軍都摠制府使 推忠翊戴同德 佐 命功臣
             大匡輔國 崇政大夫 議政府事 右議政兼修文殿     大提學 領 經筵事 世子傅 錦川府院君 左議政
             勳階兼職 幷兼 領書雲觀事 世子師 兼 判吏曹事
1417 48세 領 春秋館事
1418 49歲 世子師
1419 50歲 文科殿試讀卷官 議策題 左議政 領 經筵事 世子賓
1420 51세 國葬都監 都提調
1421 52세 病遞 左議政
1422 53歲 壬寅 5月 9日 卒 停 朝時三日
             寅時 太宗昇遐
     諡號 平度 落點 布綱治紀曰 平 心能制義 曰 度
    *初葬于 楊州南 中良浦 燕山시 以其地 爲懷陵古遷于 廣州 北龜川面 高多岐里 癸 左原 1496年 8月 壬辰日
             行狀成
    1982년    坡州市 汶山邑 堂洞里 亥坐 巳向 緬奉
1500庚申 7月24日 孫 崇質撰 墓碣銘 肅宗 年 月 日 9世孫 世采撰 神道碑銘
1758庚寅     13世孫 志源 尹 廣州時 改堅新表撰 陰記
1804甲子     13世孫 準源 建別廟于 迪昆里 宗家右邊    
1831辛卯     15世孫 周壽 重建
高宗 年     15世孫 珪壽 移建于 宗家左邊
1950 6月     兵火

*1901年 7月 15日 文集成
*1907         潘陽世稿刊行(文正公 朴尙衷. 平度公 朴은
             參判公 朴葵 三世稿合刊)
*2004년 6月 26日 平度公 朴은 祠堂建立 遷位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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