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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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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가 묻힌 부산에 생긴 태극기 공원 多大浦 자료

박영효 태극기.jpg


박영효가 묻힌 부산에 생긴 태극기 공원 多大浦 자료
                                                                 2006/03/20 19:51
                         박영효가 묻힌 부산에 생긴 태극기 공원
                            파란만장한 삶 다대포 바닷가에 묻히다

얼마전 부산 금정구 경부고속도로 구서 IC 만남의 광장에 태극기 소공원이 만들어져, 초대형 태극기 게양대 주변에, 120여평의 태극문양 공원이 꾸며졌습니다.

고속도로 입구로서 부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눈에 띄는 곳입니다.

왜 태극기공원이 부산에 있는 것일까요?
역사를 알면, 전국 어느 곳보다도 부산이 태극기와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태극기는 19세기 말 개화시대에 탄생한 우리 국기인데, 당시 부산은 개화파들의 근거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오가던 기선들은 인천을 출발하면 필히 부산을 거쳐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때마다 개화파들은 부산에서 며칠씩 숙박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선박은 연료용 석탄을 보급해야 하므로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머무른 곳은 지금 부산시 중구 신창동에 있던 동본원사(東本願寺·지금은 대각사인데 원래 이곳은 조선왜관 시절 일본왜사가 머무르던 곳입니다)였습니다.

개화의 혁명가 김옥균은 이곳에서 일본을 오갈 때 마다 여기 머물러(10회 정도) 갑신정변을 모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극기를 만든 분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걸쳐 살았던 인물 박영효(朴泳孝,1861∼1939·철종의 사위)인데, 그는 죽은 뒤 부산에 묻혔습니다. 그의 묘가 있던 장소는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의, 다대동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100미터쯤 떨어진 곳입니다.

현재 작은 숲이 있고 공터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具氏묘가 두 기 있어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지금은 사유지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중추원 부의장이던 박영효는 자신의 묘터를 생전에 찾았는데, 여기 다대포가 명당임을 알고 묘터를 만들고 가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대학교 개교때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 영혜옹주와 함께 합장된 그의 묘는, 그가 사망한 1939년부터 1958년까지 19년 동안 여기 다대포에 있었습니다. (혹자는 1964년까지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1964년은 땅이 매도등기된 날로 보입니다.)

혹자는 그가 명당을 찾는다고 하여,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폄하(貶下)하지만 동아일보 사장까지 지낸 그가 그가 명당이나 찾는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박영효가 파란만장한 삶의 현장인 서울을 떠나 조용한 바닷가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봅니다.

박영효는 생전에 2번의 망명, 1번의 유배, 여러 번에 걸친 암살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1894년 고종이 보낸 암살대를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데, 혁명의 동지 김옥균은 그 마수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이 유포되어 고종은 선왕 철종의 사위인 그를 무척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추대될 만큼 민(民)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1958년 영락한 박영효의 손자 박찬범이 어려운 가계형편으로 이 다대동의 박영효 묘터를 팔았습니다. 그날 묘터 개장(開葬)을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묘안에는 회칠이 되어 있었고, 박영효와 영혜옹주의 유골은 파낸 뒤, 다대포 무덤 곁에서 바로 화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극기의 창시자 박영효의 유택(幽宅)은 부산에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그의 영혼도 부산에 머물러 있다고 봅니다.

혹자는 한일합방후 후작 작위을 받은 박영효를 친일파라고 하지만 저는 그를 친일파로 보지 않습니다.

개화운동후 갑신정변의 주모자로서 그의 노선은 가장 확실한 개화의 길이었는데, 민비와 고종이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의 주장을 따랐다면 한일합방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가 친일지위인 중추원 부의장을 맡은 것은 1930년대부터 죽기까지 약 9년간입니다. 그 전에 그는 영연방처럼 자치독립을 모색했습니다.


그는 1907년 매국노 이완용과 대립해 군부내의 반양위파 장교들을 이끌고 고종 퇴위에 찬성한 이완용 등 친일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순종과 일본세력에 의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었습니다.

1년 간의 유배 후에도, 상경이 금지되어 마산에 머물러 있을 때 한일합병을 맞았는데, 그 때 그는 다대포의 묘터를 보았던 것으로 저는 추정합니다.

그는 태극기를 만들었고, 그는 가장 효율적인 개화운동을 펼쳤으며, 일제시대에 조선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또 제국주의시대 인도나 중국, 중동,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대부분 나라들이 열강의 식민지였으니, 개화가 늦은 우리 나라는 식민지화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었습니다.

박영효가 정말 친일파라면 그가 제정한 태극기는 왜 바꾸지 않는 가요?
이번에 부산에 생긴 태극기공원이, 부산에 그 뼈를 묻은 박영효와, 부산에서 갑신정변을 꿈꾼 기린아 김옥균 등에 대한 관심이 좀 일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006. 1. 19. KBS / 이양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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