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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5 (금)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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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朴承任) 명나라 사행(使行)에서 사신(使臣)이 위차(位次)를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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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임(朴承任) 명나라 사행(使行)에서 사신(使臣)이 위차(位次)를 바로 잡았다.

자(字)는 중보(重甫), 호(號)는 소고(嘯皐) 진사(進士) 형(珩)의 아들
중종12년(1517)~ 선조19(1586).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라 비상한 슬기와 번득이는 재주를 보였다. 어려서<사략(史略)>을 배우면서 『 무왕(武王)이 이미 은(殷)나라의 사나운 인군(人君) 주(紂)를 쳤으면 마땅히 은나라 종실의 어진 인물인 미자를 천자(天子)로 세웠어야 할 것인데 어찌 하여 무왕 자기가 천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까?』라고 물었고, 또 열두살 때 그아버지로부터 천인일리(天人一里)(자연과 사람의 한 가지 이치) 라는 시의 명제를 받고『 閑來點儉吾身上, 郎一乾坤備不便(한가로이 내몸 점검하니 건곤이 질서 있게 갖추어서 불편이 없네)』 이라고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십여세때 이미 글 솜씨가 볼만하여 십사세에 향해(鄕解)에 응시하려 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너무이르다고 하여 허락 하지 않았다. 그무렵 병려문(倂驪文) 오십여귀를 지어 품은 생각을 서술함에 보는 이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그로부터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중종26년(1531) 24세로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그해 4월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 벼슬에 보임되어 예문관(藝文館) 검렬에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고 이듬해 승정원(承政院) 주서를 겸했으며, 이어서 예문관 대교(待敎)에 옮겼다. 동 39년(1544) 정월에 홍문관(弘文館) 저작으로 그 칠월(七月)에 사가독서했다. 중종(中宗)이 승하하시고 인종(仁宗)이 즉위함에 홍문관(弘文館)에서 국정에 가장중요하고 적절한 당면 문제에 대하여 일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으니 대개 다음과 같다.

O 인재를 가려쓸것
O 기강을 세울것
O 궁검을 엄하게 할것
O 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면려할것.
O 사치를 억제하고 무비를 튼튼히 할것, 등이 골자이다.
    그는 수찬(修撰)에 올라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옮겼는데 동료들이 옳지 못한 사람을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에 등용하려 함으로 소고(嘯皐)가 그를 불가(不可) 하다고 반대했던바 도리어 소고(嘯皐)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옮기고 그 사람을 소고의 자리를 대신 하게 했다. 이때 진복창(陳復昌)이 소고를 자기 수중에 끌어들이고자 온갖 수단으로 꾀였으나 소고는 그 사람됨을 꺼려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이때 진복창이 大司憲이 되어 권세를 휘두르므로 소고가 탄핵하려고 했으나 동료들이 진복창의 위세에 질려 따르지 않으므로 소고는 이튼날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진복창이 이기(李기)를 부추겨 소고에 重罪를 쒸우려 할 때 이원록(李元祿)이 박공(朴公)처럼 덕망과 문장을 겸한 사람을 중별하면 조정에 人才가 고갈된다고 만류함으로 화를 면했다.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는데 환취정에서 임금을 뫼시고 호당(湖堂)의 신하들에게 춘추전을 강의하였는데 임금이 감탄하여 술과 의례경전과 통감 강목등을 하사하다.
    명종 3년(1548년)과 그 이듬해에 부모상을 거듭 당하였다. 복을 벗고 현풍현감에 부임했다. 그는 고을 유생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여 면학(勉學)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예속을 권장 인심(人心)을 순화함에 힘썼다. 이때 그 고을 일대에 잇달아 흉년이 들어 굶줄임이 심하데다가 전염병(傳染病)이 덮쳐서 부근 여러 고을이 매우 참담한 지경이었다.
    감사(監司)는 여러 고을을 구휼(救恤)하는 책임을 소고(嘯皐)에게 맡겼으니 청렴(淸廉) 성실(誠實)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불쌍히 여기는 소고(嘯皐)의 인품(人品)을 깊이 믿었음이었다. 동 12년 (1557년)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에 옮겼다. 그때 척신(戚臣) 윤원형이 권세를 잡아 국정을 휘젓는 판이어서 조정의 바른 인물은 거의 화를 입거나 소외되는 실정인지라 소고(嘯皐) 또한 이 무렵에는 하찬은 자리로 밀려나거나 문을 닫고 글을 읽으므로서 권간의 무리들을 멀리하였다. 이듬해 6월 풍기군수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다. 그해 11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봉안된 안문성공(安文成公) 향(珦)의 영정이 낡아 음으로 감사를 통하여 예조에 상신, 화원 이불해(李不害)로 하여금 다시 그리게 했으며 한편 호조에 상신하여 소수서원의 재정을 충실히 했다.
    동17년(1562) 임기가 다하여 군자(君子)감 정에 옮겼다가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이되고 이듬해 문정왕후 상사(喪事)에 국장도감이 되었으며 동 19년에는 도부승지. 경연, 참찬관에 춘추관 수찬관을 겸했고, 그해 겨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진주목사에 부임했다. 다스림이 밝아 형벌을 쓰지 않아도 도호며 간사(奸邪)한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절로 수그러졌으며, 부로(父老)를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鄕約)을 정하여 풍속을 밝힘에 힘썼다. 동22년(1567년) 명나라 융경 임금의 즉위(卽位)를 알리는 사신(使臣)을 맞이함에 영의정 이준경의 천거로 제술관에 뽑혀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으니 소고는 당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조(宣祖) 2년(1569년) 8월, 동지사(冬至使) 부사로 명나라에 갈 때 9월 12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10월 28일에 명나라 북경(北京)에 당도했다. 이번 사행에서 전(前)의 사신(使臣)들이 잘못으로 실추되었던 나라의 체모(體貌)를 회복했음은 실로 괄목할만한 그의 당당한 공로였다. 11월3일 이다. 그나라 조정에서 예(禮)를 행할 때 우리 사신의 위차(位次)가 황극문 밖에 잡류(雜類)의 아래있어 오랑캐 족속들의 사신과 같이 서게 되있었다. 소고는 자못 해괴히 여겨 그 경위를 알아 보았던바 본래는 우리 사시의 현당례(見堂禮)는 예부에서 행했을 뿐 홍여시(鴻려寺외국사절 접대를 맡은 관청)에는 없었다. 융경초에 비로서 문관(文官)으로 홍여경(鴻려卿 홍려시의 장관)을 삼게 됨으로써 그지위가 격상되었으니 응당 홍려시 현당례가 있어야 할 것인데 우리사신은 다만 전례대로 따를 뿐이였으므로 홍려경이 불쾌히 여겨 우리 사신의 자리 차례를 잡류의 밑으로 깍아 내리었던 것이다. 그랬으나 우리 사신은 잠잠히 그 서열에 안주했을 뿐 그에 대한 항변(抗辯)은 커녕 한마디 불평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오곤 했던것이다. 소고(嘯皐)는 이를 통분히 여겨 어떠한 난관을 무릅쓰고라도 나라의 위신을 깍는 그러한 모순은 단연코 바로 잡으리라는 결의로 유능한 통역 홍순언, 곽원지를 시켜 예부(禮部)에 호소하여 설득을 펴는 한편 그 솜씨 높은 문장(文章)으로 두차레나 제독주사에게 글월로 진정함으로써 마침내 자리 차례를 본래대로 회복하여 길이 恒式을 삼게 하고야 말았다. 이는 소고(嘯皐)의 애국 충성과 비상한 활약으로 이루어진 보람이었으나 거기에는 유능한 역관 홍순언의 활약이 또한 수월치 않게 작용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귀국(歸國)하는 길에 소고는 병으로 인하여 중로에 지체하게 됨에 사신이 갖어온 <中朝通報 중국관보>에 『조선(朝鮮) 사신(使臣)이 예를 그르쳐 자리의 차례를 격하시키다 』라는 사연이 있어 임금이 명나라에 가서 결례를 저지른 사실을 밝히도록 했던 바 그것이 소고의 샐책인 것으로 잘못 보고되었으나 전후의 역관을 염문(廉問)하여 마침내 사실이 밝혀져 전 사신들이 죄를 입게 되었거니와 소고의 공적은 마땅히 크게 보상되어야 할 처지에서 도리어 죄를 입을 뻔 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공로를 숨기고 한마디 변명조차도 없었으니 아는 이들은 모두 그의 器量에 탄복했다. 선조4년(1571)황해도관찰사. 홍무관 부제학을 지내고, 동6년(1574년) 승정원도승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 등을 거쳐 이듬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경주에는 폐원(廢院)이 매우 넓어 속(粟=조)을 수십 섬이나 심을 만 했다. 그는 거기에 채소며 참외등을 가꾸어 관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그땅의 9활쯤은 둔전을 삼게 하니 백성들에게는 매우 편익이 있었다.암행엉사가 선생의 치적이 제일이라고 장계(狀啓)를 올리다.

    동9년(1576) 다시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이듬해 강화 유수에 옮겼다가 체직되었다. 이어서 여주목사에 부임하여 서원(書院)을 창설하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제사 하게 했다. 그때 그 고을에는 財産을 갖이고도 그 어머니를 박대하는자가 있어 소고가 잡아들여 도리로 타이르고 비유를 들어 깨우치니 그 사람이 감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그로부터 정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여 孝子로 알려졌다. 동 14년(1581) 춘천부사가 디고 이듬해 병환으로 물러났다가 동 16년(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그 때 조정은 당론으로 하여 領議政 박순(朴淳),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이(李珥) 등이 모함을 입어 연달아 밀려 남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바로 잡으려다가 그의 말이 임금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되어 임기가 차기 전에 돌아왔다. 이상이 대개 그의 생애와 관역이었다.
    그는 준수한 의표에 도량(度量)이 넓었으며, 심중과묵하여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몸가짐이 근엄하여 병(病)이 아니면 눕거나 기대어 앉지 않았다.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더욱 논어(論語)와 주자서에 힘을 기울였으며, 의심되는데가 있으면 곧 기록하여 반복 硏究함으로써 반드시 터득하기에 힘썼고 퇴계(退溪)에게 질의하여 인정을 받기도 했다. 퇴계가 편찬한 <계몽전의(啓蒙傳疑)>의 상수(象數)에 대해서도 난해한 대목을 일일이 연구하여 끝까지 알아냈으며 천문(天文) 산수(算數)에 이르기 까지 정밀 탐구하여 요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찍 인종 원년(1545) 29세에 관상감이 만든 역법(曆法)이 오류가 있어서 왕명으로 역법(曆法)을 교정하기도한 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천문(天文) 역상(曆象)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것이다. 호롸와 사치를 싫어하여 의복음식은 추위와 허기를 면하는 것으로 족했고 거처도 극히 검소하여 서울애 오래 있으면서도 남의 집을 빌려서 지냈다. 그는 평생에 사교를 즐기지 않아 벼슬에 있을 때에도 퇴청(退廳)하면 곧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으며. 차제들이 혹 시국에 관한 일을 물으면 『너희들이 참견할 바 아니라 』고 했다. 글을 가르침에도 비록 몽학(蒙學)에 이를 지라도 성심을 다하여 일깨웠으며 그는 문장에 능하여 붓을 잡으면 물 흐르듯 했고, 당시 국가의 중요한 문자가 많이 그의 손에 이루어졌으나 항상 겸허했다. 명종 1년(1546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뽑히니 당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오는 길에 고을마다 객관이며 루정에서 일행과 더불어 시를 읊었으며 들린 곳 마다 노자를 주었으나 불수하다.
    중년 이후로는 더욱 시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니 『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의할 것이못된다. 』 저서로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유취(綱目心法類聚)』등이 있으나 미쳐 완성하지 못했고 문집 4권과 수많은 저서가 전해진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묘명을 지었다 구산정사(龜山靜舍)에 제향되고 있다. 선생은 당대에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지주로서 선조(先祖) 문정공(文正公)의 실전(失傳)한 묘소(墓所)를 찾아서 가토(加土)하고 비명(碑銘)을 지어서 수갈고유(竪碣告由)하였고 평도공(平度公)의 정안일기(政案日記)를 정리(正理)하여 발문을 쓰시고 판관공(判官公)의 묘소(墓所)에도 비명(碑銘)을 지어 수갈고유(竪碣告由)하였으며 증정경부인(贈 貞敬夫人) 홍씨묘갈명을 짓기도 하였다. 선견지명이 있어 계미년에 남사고(南師古)를 초청하여 성좌의 변동 상황으로 봐서 사태가 심상치 아니할 것 같으데 공의 생각은 어떤가 하고 물으니 남공이 10년 이내에 병란이 일 것이라 예언하였는데 과연 10면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以上이 선생 행적(行蹟)의 대략인데 우리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문정공(文正公) 선조(先祖)님의 강직하신 혈통이 유전되어 오므로 정의를 중히 여기고 불의에 항거 할 때는 강인한 대로 목민관이 되어서는 무한히 후덕하여 덕치 하므로 강과 유를 겸비하였는데 반남박씨(潘南朴氏)로서 사재(史載)한 분들은 하나 같음을 알수 있다.

                                2006년 12월
                                慶北支會長 朴 興 陽

위의 글은 2006년 12월 9일 노강서원에서 판관공 후 박흥양 경북지회장님께서 반남학교 학생들에게 강의 하신 내용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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