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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16-03-25 (금)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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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 박씨"로 추존


박종순님께 감사드립니다.
반남박씨대종중홈페이지에 관심을 갖어주시고 격려해 주심을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리며
범박씨 홈페이지가 날로 발전 되기를 바랍니다.



수비박씨
우리종중기록 또는 기타 많은 곳에 수빈박씨(綏嬪朴氏)로 기록되어 있으나,
활당공 후 찬욱씨 정보제공으로 수빈(綏嬪)이 수비(綏妃)로 추존하였다고 하기에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 고종38년에 수빈에서 수비(綏妃)로 높여 봉하였기에 종중에서나 우리 반남박씨 종원 모두가 앞으로는 현목수비(顯穆綏妃)로 표기(表記)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

《고종 38년10월11일(양력) / 현목 수빈을 수비로 높여 봉하다 》
현목 수빈(顯穆綏嬪)을 수비(綏妃)로 높여 봉하고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리는 의식을 대신 진행하였으며 축하를 올리고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간략한 의식으로 하였다.
조서(詔書)는 이러하였다.
“효성으로는 조상을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종묘의 의식 절차를 새롭게 하고 예의에서는 옛 법을 상고하는 것이 중요하니 궁직의 질서를 높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제왕들의 집안에 전해오는 움직일 수 없는 아름다운 규범으로서 이제 내가 어찌 그대로 시행하지 않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현목 수빈(顯穆綏嬪)은 천품이 순결하고 천성이 정숙하였다. 이름있는 가문의 딸로서 범절에는 물려받은 아름다움이 있었고 훌륭한 용모와 의젓한 행동으로 폐백을 갖추어 선발하는데 뽑혔다. 훌륭한 꿈을 꾼 것은 황태자를 낳을 상서로운 징조에 부합되고 범이 지나가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곰이라도 당해낼 떳떳한 공적을 기대한 것이었다. 경술년에 아들을 낳으니 크나큰 복록은 나라의 좋은 운수를 이어 놓았다. 왕비(王妃)를 도우니 두드러진 공로는 태사나 태임에 미쳤고 자궁(慈宮)을 모시니 각근한 지성은 아침 저녁 문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음을 잡아 생각이 깊고 덕(德)! 이 가득했으며 불행에 처하여도 끝까지 한생을 누렸고 훌륭한 계책을 품고 있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빛났다.
나는 조종(祖宗)의 좋은 운수를 잇고 하늘의 밝은 지시를 받아 큰 위업을 세운 후로 온갖 예절을 한껏 충분히 갖추었다. 우리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칭호를 소급하여 높인 만큼 그 다음으로 비(妃)를 소급하여 높이는 것은 떳떳한 규례이다. 그래서 이해 음력 8월 29일에 삼가 인장을 올리고 수비(綏妃)로 높여 봉하였으니 황후의 의장은 제도대로 하고 금궤에 보관하는 것은 예법이 그러한 것이다.
삼가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해진다.【열거한 응당 시행해야 할 사항들은 생략한다.】
아, 법은 전대에 근거하여야 하니 그것은 모든 선왕들의 것이고 훌륭한 계책은 길이 후대에 물려주니 우리 자손 만대에 내려갈 것이다. 온 나라에 공포하여 모두 알게 할 것이다.”


《고종 39년10월24일(양력) / 이주영 등이 황후로 높이는 의식을 제의하다 》
특진관 이주영(李胄榮) 등이 글을 올렸다.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폐하는 효성이 모든 임금들보다 뛰어나고 예의는 ‘3대’의 임금과 대등하여 조상을 높이고 근본에 보답하는 모든 방도를 취할대로 다 취하였습니다. 융릉을 소급하여 높이고 다섯 사당을 더 높였는데 유독 차례로 시행해야 할 현목 수비(顯穆綏妃)를 황후로 높이는 의식만 아직도 시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씩이나 됩니다.
전에 재상 조동만의 상소문이 나오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정론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폐하의 비답을 내린 것을 보니 이 예법은 지극히 신중한 것이므로 결코 갑자기 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응당 제 집에 물러가서 다른 날 지시가 내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지난 해에 소급하여 높일 때 감히 곧바로 황후로 높이자고 청하지 못하여 우선 비로 높이고 오늘을 기다려서야 황후로 높이자는 청을 꺼냈으니 역시 갑자기 논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바로 그 예법을 신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지극히 신중한 것치고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 우리 수비(綏妃)는 훌륭한 규범과 예법이 있는 이름높은 훌륭한 가문의 태생으로서 여자로서의 그윽한 태도와 바른 성품을 길렀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왕궁에 선발되어 날을 받아 혼례를 치르고서 드디어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후궁들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총애를 받았지만 효의 황후가 황후로 있었기 때문에 황후로 오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 훌륭한 사람을 낳음으로써 복을 누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 억만년 무궁한 복스러운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아, 훌륭합니다.
천자의 비로서 천자의 어머니까지 되고도 끝내 황후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상고할만한 지난 시기의 역사책이나 원용할만한 나라의 규례들이 한두 가지만이 아닌 만큼 폐하처럼 거룩하고 명철한 자질로는 틀림없이 꿰뚤어 볼 것이니 신 등이 어찌 누누히 말씀드리겠습니까. 하지만 종묘의 아름다운 법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고 온 나라의 공정한 논의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폐하는 깊이깊이 생각해서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해당 관청에서 좋은 날을 받아 황후로 높이는 의식과 신주를 종묘에 들여놓는 의식 절차를 예의를 갖추어 거행하게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폐하의 효성이 빛날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선조와 숙종 두 조상의 영혼도 저 세상에서 기뻐할 것이며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까지 모두 더없이 기뻐서 춤출 것입니다.”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중대한 일이므로 선뜻 논할 수 없는 것인데 어째서 경솔하게 제의하는가.”라고 하였다.




《정조11년 2월8일 왕비에 책봉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여 주부 박준원(朴準源)의
            처자를 빈(嬪)으로 정하라 명하였다.》

《정조11년 2월8일 납채하였다. 교문에 이르기를,》
        “승의랑 사복시 주부 박준원에게 교시하노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예는 저사에 넓히고, 간선은 빈부에 신중히 한다. 자교가 다만 간략하므로 법가를 취하였다. 이제 예조 판서 이명식을보내 납채 한다. 하였다.【대제학 김종수가 지었다.】

《순조 0년 》 순조 대왕의 휘는 공이고 자는 공보인데, 정종 대왕의 아들이    다. 모비는 효의 왕후 김씨이고【관향은 청풍으로 청원 부원군김시묵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綬嬪朴氏)이다.【관향은 반남(潘南)으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순조23/ 2/3 휘경원의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빈(嬪)의 성은 박씨(朴氏)로 가계(家系)가 반남(潘南)에서 나왔는데 사로왕의 후예이다.
    박상충(朴尙衷)은 고려 공민왕 때에 도의(道義)로 드러나 학자들이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칭하였는데, 본조에서 문정(文正)으로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朴은이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의 벼슬을 하였고, 시호는 평도(平度)였다.
5대를 내려와 박소(朴紹)라는 분이 있었는데 호는 야천(冶川)이고, 학문과 문장으로 당시의 명유가 되었는데영상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이로부터 번성하고 혁혁하여 대대로 저명한 벼슬아치가 나왔고 몇 가닥으로 분파되었으나 모두가 드러난 씨족이 되었다.
5세조 박세성(朴世城)은 숙종 때에 윤선도와 권시를 배척하였으며 벼슬이 좌부승지에 이르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고조 박태원(朴泰遠)은 벼슬이 목사에 이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박필이(朴弼履)는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 박사석(朴師錫)은 현령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은 호가 금석(錦石)인데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어머니 원주원씨는 증 참판 원경유의 따님이다 원경유는 원평 부원군 원두표의 5세손인데, 빈이 그 셋째 따님이다.
빈은 영조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 하였고 영조 정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빈호(殯號)는 수(綬)이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1822) 임오 12월 26일에 창덕궁의 보경당에서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유사가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원호(園號)는 휘경(徽慶)으로 올렸다.
이듬해 2월 27일에 양주 배봉산 좌묘원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옛날 영우원 자리의 왼쪽이다.
1남을 두었는데 지금의 전하이고,1녀를 두었는데 숙선 옹주로서 영명위 홍현주에게 시집갔다.
전하께서 2남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바로 세자 저하이고 다음은 일찍 죽었다. 세 공주를 두었는데 맏이는 명온으로 봉해졌고, 하나는 옹주이다.


(참고)
비(妃); 임금의 정실 아내, 비,왕후,내전.중궁전이라 불리우고 왕과같이 품계는 없고

빈(嬪); 임금의 1위 부실(副室)이며,
지위상으로는 정1품의 품계를 가진 여관(女官)이다.
빈이 왕비로 책봉되면 자동적으로 품계는 없어진다.

빈은 궁중의 여성 가운데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왕과 왕비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잡역 궁인을 다스리는 자였다.
빈(嬪):정1품)·귀인(貴人:종1품)·소의(昭儀:정2품)·숙의(淑儀:종2품)·소용(昭容:정3품)·숙용(淑容:종3품)·소원(昭媛:정4품)·숙원(淑媛:종4품) 등의 정1품에서 종4품까지의 왕의 후궁이다.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경우와,
한미한 집안 출신의 궁녀가 왕의 성은을 입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궁관은 정5품의 상궁(尙宮)에서 종9품인 주변관(奏變官)에 이르는 궁녀로서,
종4품 이상의 품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현목(顯穆)수비박씨(綏妃朴氏)

1770(영조 46)~1822(순조 22). 조선시대 순조의 생모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증영의정(贈領議政) 준원(準源)의 3녀로 ,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그가 잉태될 때 어머니 원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구슬을 바치매 그 광채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다.
어릴 때 두 여형(女兄)과 함께 있었더니 별안간 큰 호랑이 한마리가 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두 여형은 놀라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조용히 걸어가서 방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하고 공경하니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또한,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날 그의 궁에서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조각을 버렸다가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또한 후궁인 그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창덕궁 보경당에서 죽었다.

궁호(宮號); 가순(嘉順),
시호    ; 현목(顯穆),
원호(園號:무덤의 명칭); 휘경(徽慶)이며,
효자동 경우궁(景祐宮:七宮內)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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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고려 삼은 박찬문 2016-03-25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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