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ㆍ작성자 박대서
ㆍ작성일 2019-03-09 (토)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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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IP: 59.xxx.11
호장공 당시 고려의 시대적 상황을 그려봅니다
역사는 이렇게 쓰여진다

1) 아랫글을 보고 저도 힘입어서 하나 올려봅니다.
욕먹을까 두려워 글 하나 올리는데 망설이면  우리 집안의 역사도 달라졌겠지요.
상소 한장으로 큰 인물이 두분씩이나 세상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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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쓰냐 거짓을 진실처럼 쓰냐는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세월이 몇백년이 흐른 후 후세사람은 "그 당시에 이사람은 뭔가 이런 내용이 있기에 쓴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인용을 한다면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진실인가 아닌가는 후세 사람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인용했을 뿐이다"라고 하면 되는 것이기에.

사실 어떤 소문들은 역사적 사실 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고 호사가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졌기에 잘못된 부분도 있다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조선시대 역사도 일제시대에 왜곡된 사관으로 쓰여진 부분도 있다.
같은 조선왕조에서도 반정을 일으키고 왕이 되면 전임금은 패악한 폐주가 되고 사관은 소설을 써서라도 흠집을 낸 기록들도 많다.
이 역시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추론은 거짓과는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진실은 당시 사람들도 모른다.
당장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온갖 의혹에 대해 이것이 진실이다라도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못내린다. 
당사자 본인의 의중과 달리 해석되고 전달되어 발생한 일이 되었다면 당사자 본인도 모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실이 아닌데도 진실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다.

2)  창녕성씨 명문가 입니다.
아래 글에 나온 성현은 공순공보다 4살 아래로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성현의 사촌 성준은 세조 5년에 급제를 했지요. 
공순공은 세조 1년에 급제하여 한참 선배이지요. 
공순공께서 사헌부 장령 때 성준은 사간원 사간을 하였고, 사간을 이어받았을 때에 성현은 지평을 하면서 평생을 같이 하신 분들입니다.
인맥이 막강하여 성준은 영의정에 오릅니다.
명문가의 집안을 굳건하게 합니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 성준(영의정), 성준의 아들 성온경 (병조정랑)과  성중온(지평), 그리고 성현(참찬)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입니다만 모두 사형을 당합니다.

영의정 성준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자 (연산 10년 윤4월 4일) 좌의정 유순, 우의정 허침에게 새로운 우의정을 천거하라하여 이때 공순공이 한성부 판윤에서 우의정이 되었다(연산 10년 4월13일 ).

우리 집안과도 혼맥이 있는 집안입니다.

창녕성씨 계보를 보면 3형제가 있는데 성봉조가 세조와 동서지간이고, 성현은 형 성염조의 아들입니다.

세조는 부인이 파평윤씨 정희왕후로 파평윤씨 윤수미의 처남이기도 하지요.

동생 성순조의 아들인 성준▷ 성효원. 성효연▷ 박치▷ 박용(금성부원군) ▷성희안(중종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름). ▷....이런 관계로 이어집니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비슷한 강희안·강희맹 형제는 문종(文宗)·세조(世祖)와 이종 4촌간이고, 세양공과는 동서지간입니다.
세양공이 막강한 인물이었지요.

이쯤되면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는 것이지요.
창녕성씨 명문가입니다.

세양공이 대단하다는 것은 큰형이 일찍 돌아가셔서 자식들도 어려 돌보아 주었을 것이고 후에 혼맥관계를 이어주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동생집안 혼맥도 모두 이어주신 것 같습니다. 이거 중요하지 않습니까?

세양공 이후에 누가 있었냐하면 부윤공이 뒤를 이어 받고 집안네가 다 어려서 공순공 형제가 이어가게 됩니다.

공순공 두 형제가 70세를 넘기시고 오래 사시다보니 판관공. 교리공 휘 억년. 정랑공 휘 조년..집의공 휘 치..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문강공 휘 소께서 1493년(성종23년)에 태어나 부친께서 이조정랑. 백부는 예조정랑이시니 예의 찾아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공순공은 종증조부가  됩니다.

부윤공 집안은 알려진게 없지요.
급제에 운이 따르지 않았으나  중추부사. 단양군수. 사평. 의금부 경력. 사헌부감찰. 수원부사. 선교관 등등 하고 "왕비가문"은 물론 종실과 인척도 맺고 급제 사위들도 보고 다 잘 살았지요.

그리고 이 후 문강공으로 이어진다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3) 인생을 살면서 꼭 벼슬만 높아야 현달한 것이 아닙니다. 부친의 뜻을 이어 집안을 꾸려온 참판공이 계시고. 집안을 공고히 하는데 튼튼한 다리를 놓으신 세양공이 있고, 뒤를 이어 부윤공과 공순공 형제가 있어 사화에 휩쓸리지 않고 이어왔으며 인성왕후가 있어 대비로서 의인왕후를 간택하고 그렇게 이어져 온 것이지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게 아니라 꾸준히 명맥을  이어 온 것이지요.

3) 얼마전에 급제공의 묘가 어디에 있냐는 글들이 있었는데 흥미가 있어 고려사를 보면서 더듬어 보았습니다. 
혼란을 덜기 위해 선조의 휘를 그대로 썼으며, 이야기 흐름을 위해 1200년경이라고 딱 못박은 것이 아니니 비슷한 시기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마산리는 대곡재가 있는 산너머 입니다. 이곳이 후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우연의 일만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 내용은 거짓일 수도 있고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 시조 호장공과 반남현

1200년경 시조이신 호장공 출생하셨다.
 후손인 문정공과 밀직공의 출생연도를 참작하여 호장공 출생 연도를 대략 맞추어보니 고려 신종 때쯤 출생하신 것으로 추측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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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00여년의 시대적 흐름을 살펴본다.
고려 의종은 문관정치를 하니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고 그 뒤 명종 때에도  무신들의 난립하다가 신종 (1197년9월~1204년1월, 7년 재위) 때 최씨 무신정권의 출현한다. 

그러나 신종이 나이가 많아 최충헌이 권력을 다 갖게되었다.
최씨무신정권이라 하지만  한세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문관으로도 유명한 '동해바다 건너 공자와 비유되는 인물이 있다하여 해동공자'로 불리우는 최충(984~1068)이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고 1047년 고려의 성군이라 할 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기본 법전을 만들고 은퇴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쏟은 사람이 있다. 바로 문헌공도를 이룬 최충이다.

권력투쟁이 있는 중앙무대와는 달리 지방은 
농사만 잘되기를 바라고 큰재난이 없이 살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시조이신  호장공께서 반남현에서 태어났다.
호장공 이전의 선대를 알 수 없었던 점으로 보아 호장공 역시 조실부모한 것으로 추측된다. 추측...
잘아시다시피 고려왕조는 지방 호족들을 우대하여 혼인관계를 맺거나 자녀들을 급제시켜 개경에 살도록 하였다.
이면에는 반란을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토호족이 지방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혼맥관계도 만들어야 하기에 개경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 때라고 시골에만 사는 세상이 아니지요. 왜 자식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잠시 조선 초기에 반남현에 관하여 조사된 내용이 지리지에 있어 보고 간다.

반남현은 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전라도의 명칭이 예전엔 해양도였다는 것이네요.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을 피해 남방으로 파천하여 이곳에 와 10여 일을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환도했다. 현종 9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거란군의 위세가 컸던 시기에 당하였으니 이후 거란족과는 원수가 되어 조선 중기까지 내려오면서 아예 궤멸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잡신을 섬기는 것으로 무당이 많다는 것이다.
영험한 무당도 많으니 좋게 말하면 먹을 것이 풍부한데 수해와 태풍으로 피해가 클 때가 있어 화를 피해보자는 뜻이다.
따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 것이다.

가게를 벌여 물건을 팔고 산다. 
민속이 순박하다. 

앙암(仰巖)이라고 금강(錦江) 남안에 있다. 혹 노자암(鸕鶿巖)이라고도 한다. 
그 밑에는 물이 깊어 헤아릴 수 없는데 속설에 용이 있다고 한다. 바위 밑에 구멍이 있는데 조수가 밀려 갔을 때는 보인다. 

앙...아시는 분만 아시는 그 앙자 입니다.
위치는 현재 나주시 운곡동 가야산 아래로 영산강의 남쪽 강가이다.
옛날엔 이 영산강이 금천이었던 것이다.

전설에 명(明) 나라 황엄(黃儼)이 제주(濟州)로 갈 때 압승(壓勝)한 곳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평도공이 전라도관찰사 시절이니 불과 몇십년 지났는데 전설이라고 하다니...

 복암(伏巖)은 광탄(廣灘) 서쪽 언덕에 있으며 주 사람들이 놀이하는 곳이다.
바다는 주의 서남쪽 70여 리에 있다.

금강진(錦江津)은 일명(一名) 금천(錦川), 목포(木浦)이며, 혹은 남포(南浦)라고도 한다.
곧 광탄의 하류인데 주의 남쪽 11리에 있다.
-평도공을 금천부원군. 세양공을 금천군이라 하였으니 이곳에 거주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해가니 호장공은 사병을 두고 반남현 일대를 지배한 토호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나주는 상당히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데 바닷가라고 하니 조선 중기 이후 영산강(금강) 강변에 물막이를 하여 농토로 만들어 경작한 것으로 보인다.
배를 이용하여 나주까지 올라올 수가 있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에 사람들이 잡혀가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각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다. 

반남현(潘南縣)은 주의 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인데,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현으로 강등되어  나주에 예속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희종 때에(1204~1211, 8년간 재위) 권력은 최충헌 최씨무신정권이 계속되고 몽고의 침입이 시작된다.

강종도 나이가 많아 얼마 못가 죽고 고종이 등극하면서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적으로 되는가 했더니, 거란족이 쳐들어왔다.
수세에 밀려 위급해지자 몽고와 동진에게 도움을 청하여 물리치고는 몽고와 형제의 나라라고 의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 후 몽고는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 해 왔다.
 무리한 공물 요구에 방어성을 쌓고 몽고가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를 하는 중에 1225년 몽고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에서 시작된 것이 몽고와의 28년 전쟁이다.

시조 호장공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른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고 지역에 남아 후학을 위해 서당을 짓고 훈장을 따로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한편, 농사일에 서로 품앗이하는 일도 원활하게 하도록 하고, 창고를 크게 지어 곡물을 저장 빈곤기에 빌려주는 등 민생안정의 일을 하다보니 주민들의 천거로 젊은 나이에 호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호장은 호조와 병조를 뒷받침하는 일로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농로와 수로를 만들어 농토를 확장하고 농사일에 분쟁이 없도록 힘썼으며, 부역하는 일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수재가 난 경우 세금 감면이라든가 부역에 차출되는 문제 등 지역주민의 애로를 중앙에 전달하여 고충을 덜게 하였다.
당시에 토호들은 사병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 면천시키고 각기 농사를 짓게 하였다.

호장공은 호장을 하면서 과거준비를 마친  시기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되고 몽고가 여러차례 침입으로 전국토를 유린할 때  고려인도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면서 처절한 항쟁을 계속했다.

전쟁이 일어난지 8년째 버티다가 결국엔 1232년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를 하게 된다.
몽고군은 가마병 부대가 주력이라 수군이 없어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개경이 불에 타고 왕이 철수하자 관료와 백성들도 한강을 넘어 통진현 공암현까지 강화에서 가까운 한강변을 따라 새로운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고려시대 통진현, 공암현, 김포로 되어있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관료가 늘어나 지역을 구분하였다.
강화도는 북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 몽고군은  남쪽 부평 쪽에서 진입을 해야 하는데 기마병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산줄기 양쪽으로 저지대와 뻘이라 말의 발이 빠져 제대로 갈 수가 없기에 좁은 산길목으로 계양산을 넘어야 하는데 기마병에게는 죽음의 길이다. 계양산 당시에는 안남산이었다.
이 산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싸움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병사가 이곳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지 그 이름조차 피고개라고 한다.
그래서 강화로 천도하여 28년간 몽고군으로서는 혀를 내두를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고군은 또 모두 불에 태우는 화공법을 썼는데 몽고의 벌판과는 달리 산을 하나 돌면 지형의 영향으로 바람의 방향이 거꾸로 부는 곳이라 오히려 고려군에게 역공을 당하기 일 쑤 였다.
기마병도 달아나는 고려군을 쫒아 벌판인 듯 싶어 달렸는가 싶더니 저지대로 말이 빠져 공격을 당하기를 여러차례 수없이 패전당하기도하였다.
숲이 울창하여 말이 갈 수 없는 지형에는 산성을 쌓고 싸웠다.
몽고군은 수군이 없어 강을 건너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다행이 건넜다 해도 보급이 끊기니 어려움이 커서 강을 건너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몽고군은 산악지대 보다는 평야지대인 호남쪽을 말을 달려 일찍 점령되고 피해가 극심하였다.

몽고군이 세계정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할 때는 서쪽으로 점령한 서아시아나 유럽은 대부분 평야지대로 그냥 선발대가 달리기만 하면 점령지가 되었다.

약간의 저항도 있었지만 며칠이면 함락시키고  말았는데 고려는 엄청난 기간동안 싸워도 굴복을 못시킨 끈질긴 나라였다.

이때 분개한 호장공은 반남현에서 100여명의  사병(의용대)를 조직하여 배를 이끌고 통진에 올라와 몽고군과 대항하였다.

예전에는 특히 무신정권시대로 전쟁이 오랜기간 계속되고 전사자도 많이 나와 모든 백성이 군역을 해야만 하였다.
이에 호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호장공의 의용대는 몽고군대는 기마병이라 뻘밭에서는 말이 달릴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하여 진을 치고 항전하였다.
여름에는 빠지고 겨울에는 미끄러지니 감히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라에 군사라야 기껏 몇천명 수준이었으니 해안가 뻘 옆에 100여명은 숫자로 진을 치고 있기만 하여도 방어효과를 누릴만 한 수준이었으니 그만큼 국운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부평김포에는 굴포천 제방이 있는데 몽고군이 물을 건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이용하여 둑울 쌓아 물길을 깊이 만든 것이 있다.
원래 구포천이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몽고군을 굴욕시켰다 하여 굴포천이라 하고, 그 긴 뚝방길 이름을 따서 부평에서 김포까지 장제로라고 하여 당시의 역사적 기억을 더듬게 한다.

몽고군이 여러번 물러나기를 반복하자 전쟁이 중간중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번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이때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다시 전쟁이 나면 올라오고 또 내려가서 농사를 짓고 이러기를 여러차례 한 것이다.

이 때 전쟁이 오래되다 보니 호장공은 통진현과 공암현 중간지점에 임시 거주를 하였으며 이 때  아들 박의를 낳았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혀  몽고군으로 편입되어 있었고 여자들은 잡혀서 노비로 끌려가는 참으로 딱한 처지였다.
귀족의 딸들도 짝을 지어 혼인을 시킬 수 없는 처지에 시골에서 올라 온 젊은 선비였으니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위를 삼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귀족의 딸과 혼인하여 서울 생활을 할 수 있는 터전도 마련되게 된 것이다.
전쟁 중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먹는 것도 변변치 못하여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도 허다하였다.
다행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후 많은 백성들이 죽어 토지세를 면제하는 등 인구증가 정책으로 수도권 쪽으로 민가가 몰려 양천현 금주현 등으로 계속 불어났다.

1247년 몽고왕이 죽자 몽고군은 철수하였다가 1253년 다시 침입했으나 고려의 고종이 몽고의 사신을 맞이함으로 다시 철군하였다.

고려왕은 강화도에서 있었는데 개경으로 나오라는 몽고의 요구를 무시하자 1257년 다시 쳐들어와 무수하게 죽였다. 20만명을 죽였다는 말도 있다.

1258년 최씨정권의 최의가 피살됨으로서 최씨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고종도 죽자 원종이 등극하여 세자를 원에 보내므로서 몽고와 화친을 맺고 전쟁이 종식 되었다.
이때 세자를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시키고 고려는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고 만다.

마지막 까지 항복할 수 없다하고 저항을 한 삼별초부대가 있었다.
이들의 우국충정을 잘 알고 있는 원종은 죽어가는 백성들도 생각해야 했기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몽고의 재촉에 개경환도룰 결정하였다.
이때 삼별초부대의 명부가 있었는데 이 명부에는 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원종이 이를 빼앗으려 하자, 이때 마지막 항거로 삼별초가 개경 환도를 거부하며 진도로 내려가게 되고 귀족 평민 모두 제주도 까지 밀려나 죽거나 살아남아 이름을 숨기게 된다.
그래서 이 때 실전된 인물들이 많았다.

삼별초는 처음에는 야경꾼으로 시작된 보잘 것 없는 조직이었으나 점차 확대되어 귀족들도 가세하여 비밀결사 조직이 되어 갔으며, 규모가 정예부대 만큼 커지고 야간 전투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등 정예부대 보다 더 막강한 조직이 되었다.

왕의 친위부대 역할이었는데 왕이 개경으로 돌아가자고 이들을 설득하려 하였지만 이들은 돌아가면 몽고군에 의해 죽을 것을 알고 결사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1273년 정부군과 몽고군의 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가 무너지고 1274년 왕이 된 충렬왕이 그 원나라에 볼로로 간 그 태자이다. 충선왕이 뒤를 잇는다.

몽고와 화의함에 따라 1270년 고려의 38년간의  강화 수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 박의와 마산리 묘소

(1235년경 박의 태어났다. 전쟁 통이라 대략 그렇다는 것이다. 결혼이 쉽지 않은 세상이어서 만혼도 많았다.)

박의는 반남과 김포를 오가며 살았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빠르게 익혔다. 당시에는 전쟁 중이라 공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무술과 신체단련이 필수였다.
이웃동네 또래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노는데 이때 진법놀이를 할 때면 총명하여 대장노릇을 하였다.
이웃주민들은 외지에서 온 강화에서  임금을 보좌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많았다.
강화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이 제한적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단연 돋보이는 박의는 자연히 이웃 주민들에게도 알려지고 부친이 배를 갖고 있었기에 일찌감치 강화성에 드나들어  왕족들의 심부름도 하니 왕에게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1264년 쯤) 원종 때로 추정되는데 문과 급제를 하고 혼인도 하고 강화도에서 임금의 측근으로 있었다. 
당시에는 강화에 많은 신하가 필요하지 않아 소수 한두명만 급제를 시키던 상황이라 급제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문과라고 하지만 무과를 겸한 것으로 급제를 하여도 관직이 제한적이라 임금 측근에서 호위하고 보필하는 것이 다 였다.

그러나 강화도는 땅이 좁아 모든 사람이 들어 갈 수가 없기에 가족들은 강화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암현 김포에 살게 된 것이다.

이때에는 급제자를 최소한으로 뽑고 과거시험 문제는 정치와 생활 등 현실의 문제를 다루니 몸소 접해보지 않은 골방서생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신 생원진사는 지방에서 뽑아 많은 사람들이 급제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충성을 독려하고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로 몽고에 대한 항쟁이 길어지게 된 이유도 된다.
소위 간부화의 일환이었다.

부마국이 된 후 정권의 안정기에 들어서던 시기에 호장공은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토호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호장은 중앙정부의 관료가 아니라 지방 토호였던 것이다. 토호에게는 어느정도의 범위내에서 자치권도 부여하고 있었다.
왕은 시조 호장공에게 공로를 치하하여 벼슬을 내렸지만 극구 사양하고 전쟁을 치룬 사람들과 살기로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호장을 하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1266년경)에 박의는 아들 박윤무, 환무 형제를 낳았다.
(1266년은 이야기 흐름을 위해 쓴 것입니다.)
박의는 삼별초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가담하였다기 보다 자연히 전쟁 중이라 문무 구분 없이 정부조직이 전체가 당연히 군조직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왕은 그의 학문을 안타깝게 여겨 개경으로 갈  것을 여러차례 권고 하였으나 끝내 통진 전투에서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1270년 전쟁이 끝났으니 그 무렵으로 보인다.
왜 이렇게 추정하는가 하면 급제를 하시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에 대한 기록이 없고 반남에 묻히지 않고 묘가 실전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왕은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충신이로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은 족보에 기록된 대로 공암현 마산리에 묻혔는데 마산리는 지금의 가현산 북쪽이다.  가현산에 묘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현재 이 산 동쪽에 대곡재가 있으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선후기 까지 마산리로 불리었는데 양촌읍으로 되었다가 지금은 김포시 마산동으로 지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주에서 십리 떨어진 곳에 금천(영산강) 강가에 절벽이 있어 앙암을 불리는 구멍 뚫린 공암이 있는데 박의는 임금 가까이에 살았기에 전쟁 중에 나주에 까지 가서 장사를 지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아들들이 어려 이후 김포 마산리에서도 찾지를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실전되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이곳에는 강화도에 들어가지 못한 왕족들도 많이 거주하였는데 38년이란 오랜기간 항쟁을 하고 있었기에 자연사하여 묻힌 무덤도 많고 강화도에서 죽어서 육지에 나와서 장사를 지냈다.
후손이 선조의 묘를 찾아 나섰을 때 고분들이 많이 있어서 찾지 못하였다함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 박윤무 형제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 어린 두 아들 윤무와 환무는 유모와 함께 당시 임금이 박의의 충절과 인품에 탄복하여 절에서 잘 보살펴 주도록 스님에게 의탁되었다.

이 후 성장하여  박윤무는 유모를 어머니 처럼 모시고 살았다. 
박윤무는 1308년쯤 급제하였다.
순유박사(사문박사) 양온령동정을 하였으며, 환무는 직장을 하였다.

이 후 공민왕 때에 와서 호장공의 용맹과 충절을 드높여 무덤 옆에 수호암자를 하사하였다.

먼 훗날 어느 후손이 기록하기를 평도공이 전라도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창건한 것으로 썼는데 당시 숭유배(척)불시대에 감히 지을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평도공이 성격상 이를 무릅쓰고 지었다고 볼 수 없다.
평도공이 관찰사로 내려와 보수한 것이다.
후에 관찰사 박숭질이 내려와 묘지를 정비할 때에 주위를 나무를 베어내어 넓게 만들고 석천사도 보수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관찰사나 지방관으로 내려오는 후손마다  보수하며 관리하였다
또한 묘지를 관리하는 사람을 여럿 두었는데 조선중기 이후 이들에게는 부역을 면하는 특권까지 있어 집안에 충성을 하는 가신들이 많았다.
아마도 현재 묘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선대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몇차례 소실되어 중건하기를 여러번 현재 석천사로 이어오고 있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없어져 기록이 없는데 다행이 유모와 가신들이 있어 선대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이어 받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그 분을 무명조비제라 하여 제사 전에 술을 먼저 올렸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산신제와 혼용되어 합쳐졌다. 

박윤무는 아들 박수, 박려, 박계 3형제를 이곳 통진현과 공암현 사이 김포 마산리에서 낳았다. 벼슬은 개성에서 하니 개경으로 가서 살다가 아이들은 처가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 박수와 아들들
1296년 박수(1296~1373)가 출생하였다.
여기부터 연대가 맞습니다.
후손들이 늦게 태어난 것은 당시에 처녀들을 원나라에 조공을 바쳐야 했기에 일부 조혼도 성행하였으나 만혼도 많았는데 남녀 결혼 선택권이 여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밀직부사 상호군을 하였는데 
부인은 김종의 딸이고 외조는 과거 급제자로 홍석구이다.
홍석구는 몽고 -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홍복원의 아들이다.
딱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이색 또한 원나라에서 급제하고 벼슬을 했다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묘연하다.

훗날 박수가 상호군으로 있었다 함은 곧 정부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전쟁이 끝난 후의 일이다.

상당한 기간을 이곳에서 살았고 조부의 묘소도 이곳에 있었기에 가옥을 갖게 되었고, 개경 왕궁을 수리하여 왕이 올라가매 박수는 개경에 가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박수의 동생 박려는 나주로 내려가 금성현감을 하였으며 박계 역시 향리로 내려가 생원으로서  훈장을 하였다.

1332년 상충, 1339년 상진, 1246년 상경 등 세 아들을 낳았다. 
상충은 공민왕 2년 급제 동기 이색과 친하게 되어 여동생을 아내로 얻었다.

직장공 휘 상진은 공민왕14년 1365년 을사방에 역시 2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동기로 판서 윤소종, 좌의정 하륜과 우의정 노숭, 맹희도가 있다.
문화류씨의 딸과 혼인하였다.

상경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박수는 홍탁과 친한 사이였는데 충혜왕이 홍탁의 딸이 예뻐서 그만 반하여 왕비로 삼아 홍탁은 익성부원군이 되었다.
 그런데 홍탁의 사위가 공민왕 즉위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홍탁은  반란과 관련된 바가 없다고 하여 홍탁의 딸인 대비로 부터 환대를 받았다.
이후 홍탁은 세상을 떠났지만 대비가 주선하여 대비의 어린 여동생과 아들 상경이 혼인을 하게되었다.
이 때 선대 시조와 박의의 충절을 듣고 절을 지어 하사한 것이다.

이 때 주언방도 장흥에서 김포로 올라와 살고 있었기에 후일 박은을 사위로 맞게되고,  연고지 발령을 받아 잠시 김포부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는 고려말 조선개국과 평도공의 시대로 이어집니다.

호장공께서 사시던 때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고 전쟁 중이라 험난한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려본 그 시대가 비슷할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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