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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한가람
ㆍ작성일 2021-04-25 (일)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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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서. 김구살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朴琦緖)

판관공파     승장-담수-사봉-이엽-처길-중고---------

이름

박기서(朴琦緖)

출생

1948 129

출생지

전라북도 정읍시

본관

반남 박씨 [1]

직업

택시 기사 [2]

 

 

 

 

종교

천주교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의 집을 찾아가 1996 1023 오전 1130분경 그를 수제작 몽둥이 정의봉으로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살해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 당시 사건을 다룬 19961024일 동아일보 기사 이후 1998 31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13에 수감된지 1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로는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살해 시점인 1996 당시 박기서는 49세로, 부천시의 버스회사인 소신여객버스 기사였다. 박기서는 백범일지'와 평생에 걸쳐 안두희의 배후를 쫓았던 권중희의 저서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살해를 결심한다.

그는 재래시장에서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를 구입한 다음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19961023일 오전 1130분경 사전답사했던 인천시 중구 신흥동 동영아파트 502호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동거녀[4] [5]를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준비해간 나일론 끈으로 손발을 묶고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옆방에 누워있던 안두희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라고 고함을 친 후 나일론 끈으로 두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다. 중간에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두들겼는데, 나중에 경찰이 와서 보니 방안에는 피가 흥건했고 피 묻은 정의봉이 나뒹굴었다.

범행 직후 택시를 타고 본인이 다니던 삼정동 성당에 고해성사를 하러 갔는데 신부가 자리에 없어서, 심곡본동 성당으로 옮겨가 그 성당의 이준희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 신부는 박기서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제공한 후 경찰에 자수하도록 전화를 걸어줬다고 한다.[6] 이 신부가 검찰에서 참고인으로 행한 진술에 범행 직후 박기서의 심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고해성사 후에는 자유롭게 얘기했는데,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는데 역사가 그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사명감을 가지고 안두희를 죽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 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 말하기가 모호하여 그러냐고 하면서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박기서 씨는 안두희의 장례와 그 영혼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성당에서 안두희 장례를 치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위로도 할 겸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그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 박기서는 아내에게 전화로 안두희를 죽인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인천 중부 경찰서에서 아래와 같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626일이 백범 김구 선생 추모일이다. 나는 올해 추모행사에 참석, 김구 선생의 위업을 기렸다. 그때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죽임으로써 역사가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두희를 살해하러 갔을 때) 안중근 의사의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움을 보거든 옳은가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을 화선지에 쓰고 내 이름을 써넣었다. 큰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다.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이런 충격을 전해주어 미안하다. 고등학생인 둘째딸과 초등학생인 막내아들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아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백범 선생을 죽인 안두희를 살해한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생각한다.


범행 이후 살인죄로 구속기소되었다. 인천 지방 검찰청 박환용 검사는 살인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공소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면서 약 2년간 기본적인 한학을 공부하고 1970년경 서울로 올라와 택시기사, 마포 걸레 제조업, 쌀가게 운영, 오디오 부품 생산업체인 대륭전자 회사원, 화물운송업등에 종사하다가 19956월경 부터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종사하여 오던 자인 바, 1985년경부터 <백범일지>를 수차례 읽으면서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반면에 위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 살해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심에서 검사의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항소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상고심이 상고기각판결로 3년형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인 셈이다. 당시 법원은 '박기서의 살인 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7]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것만 보면 원칙을 고수한 것 같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 김구를 죽인 안두희'라는 요소를 빼고 보면 해당 사건은 49세 장년이 면식도 없던 80세 노인을 찾아가 가혹하게 때려죽인 사건이다.

당시에는 양형기준 제도가 없었지만, 3년의 형은 현재 양형기준상 살인에 줄 수 있는 가장 최저의 형량이다. 양형기준에 비추어 보면 안두희는 80세의 고령이었기에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에 해당하며, 안두희가 박기서 개인에게 뭔가 해를 끼친 것도 없기 때문에
살인범죄 양형기준의 제1유형인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2유형인 보통 동기 살인에 특별양형인자인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가 겹쳐 적어도 15년형을 받았을 것이다. '참작 동기 살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 잔혹한 범행수법(둔기로 두들겨 패서 죽임)이라는 특별양형인자의 가중요소가 산적해 있으므로 양형기준상 5년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8]

재밌는 점은 이렇게 법원이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엄청나게 관대한 판결을 했음에도 판결문을 읽어나가던 판사에게 일제에 부역하는 판사랑 뭐가 다르냐며 소리 친 방청객이 있었고 박기서측 변호인들도 무죄 판결을 선고했어야 했다며 사법부를 비난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뉴스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세였던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일반적인 여론은 박기서를 옹호하는 쪽이었다. 박기서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안두희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의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1997122일에는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용삼 등 서명자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법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도 줄을 섰다.

박기서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은 아들의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생활비로 받았다고도 한다.

안두희
1965년에도 곽태영이라는 김구 지지자에게 목을 찔려 살해당할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살인미수에 그친 곽태영이 박기서보다 더 중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9]

박기서는 형이 확정된 이후 1998 31 3.1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13, 3년도 미처 채우지 않고 14개월만에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출소 후 원래 일하던
소신여객에 복직하여 얼마간 근무했고, 이후 택시 기사로 이직했다.

오마이뉴스
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를 여러 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바로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안두희는 이미 병 들고 힘 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두희의 눈을 보았는데,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기에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역으로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범행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족들은 인터뷰에서 평소 그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범행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한편 안두희 사망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구를 살해한 악행이 그대로 자신에게 있는 안두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수십 년동안 여러 번의 린치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점, 이승만이 배후였다고 한 고백[10]도 사실은 자신이 고문을 못 이겨 허위로 말한 것이라고 번복했던 점(당시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장택상은 외무부 장관도 아니었고 야인이었다) 등 때문에, 박기서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11]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살해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고 하는 뜬소문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암살범 안두희 씨(1917~1996)를 처단한 박기서 씨가  안 씨를 살해하는데 사용한 나무 몽둥이, 이른바 정의봉을 기증했다.

현재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기서 씨는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 역사박물관을 찾아 보관 중이던 정의봉을 건넸다. 박 씨는 1996년 정의봉으로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씨를 때려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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