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6세 평도공平度公 은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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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30 19:17 조회1,869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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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평도공平度公 은訔] 1370년(공민왕19)~1422(세종4)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할아버지는 수秀이고, 아버지는 고려 말의 학자 정치가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상충(尙衷)이며, 어머니는 이곡(李穀)의 딸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외삼촌이며,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魚孝瞻)의 장인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 문과에 2위로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 후덕부승(厚德府丞)을 거쳐 1391년(공양왕 3)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듬해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1397년 사헌시사(司憲侍史)을 거쳐 이듬해 즉 제1차 왕자의 난 때 지춘주사(知春州事)로 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을 지내고 1400년(정종 2)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역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 호조· 병조· 이조의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그 뒤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 한성부윤·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예의로 잘 접대해 칭송을 받았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자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다. 《육전(六典)》에 사죄(死罪)에는 삼복(三覆)를 한다고 하였으나, 이를 실행하지 않아 형조와 순금사(巡禁司)에서 이를 행하도록 하였고 겸 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어 옥무(獄務)에서 신장(訊杖)의 사용 횟수를 1차 30대로 정해 합리적인 형정 제도를 시행하였다. 1416년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少年入閣)의 예에 들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에 올랐다. 세종이 왕에 오르자 고려 때부터 설치는 했으나 유명무실하던 집현전(集賢殿)을 중설하도록 상소하여 많은 학자를 양성하게 되므로 세종대왕이 정치, 문화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 1422년 52세로 별세 하였다 시호는 평도(平度)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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