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 | 5세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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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작성일16-03-09 22:07 조회1,702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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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 1332(충숙왕 1)~1375(우왕 1)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 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 : 제사의 禮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다. 이 때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 해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항상 삼갔으며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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