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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창공 박엽 복관교지/ 평양성 대동문 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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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문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0:14 조회1,827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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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창공의 복관>
고종 1년07월11일 죄인으로 벼슬을 회복시켜 줄 사람의 명단을 지시하다
또 지시하기를, “ 박엽(朴燁), 유효립(柳孝立), 오정창(吳挺昌), 홍양해(洪量海), 이동형(李東馨), 신의학(愼宜學) 등은 다죄인 명단에서 빼버리고 본래의 벼슬을 도로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양성 대동문>
아래의 글은 전 문화재정장을 지낸 윤홍준지음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6세기 중엽 고구려 때 처음 세운 것으로 ,1011년 거란의 침입 때 불타 다시 축조하고 또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재건했는데 용케도 한국전쟁을 견뎌냈다.
그러한 시련과 풍파를 해집고 버텨온 인고의 유적이다 우리나라 여느 성문과 마찬가지로 반달형 무지개문을 낸 석축 위에 목조 건축의 누각을 얹었다.    (중약)
나는 먼저 대동문 정면을 보고 싶었다. 출입문에 앞뒤가 있겠느냐 싶지만 문의 정면이란 대동강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니다.
옛날 단원 김홍도(1745-?)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평안감사 능라도 연회도’를 보면 대동문에 대동문, 대동문 하고 연거푸 현판을 그려 넣은 것이 퍽 인상적이어서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가서보니 정말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나는 무지개문 머리돌에 음각으로 새겼고 문루 1층에는 희대의 낭만적인 묵객으로 초서에서는 단군 이래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봉래 양사언(1517-84)의 그 활달한 초서 현판이다.
그리고 이층에는 청나라의 전쟁 때 첩보 작전에 능했다는 평안감사 박엽(1570-1623)으 쓴 방정한 해서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박엽
(족보)
관 평안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都巡察使 管餉使
힁성 조씨 父 별좌 進    
정부인 문화 유씨 부 군수 德新     <※光海; 문화 유씨 父 自新 祖父 공조판서 柳潛 >
묘 양주군 남면 황방리

(동아백과사전)
본관 반남(潘南). 자 숙야(叔夜). 호 약창(葯窓).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 정언(正言)에 이어 병조정랑 ·직강(直講) ·해남현감(海南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재직 6년 동안 외침(外侵)을 당하지 않았다.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만큼 명성을 떨쳤으나,
인조반정 후 처가가 광해군과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1623년 인조반정의 훈신(勳臣)들에 의해 학정(虐政)의 죄를 쓰고 사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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