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록(百世錄)
조선 인조때의 문신 박미가 계축옥사(癸丑禍獄)에 연루된 부친 동량의 무고함을 해명한 책. 필사본. 1권 1책. 규장각도서 ·장서각도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陵)을 저주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것과,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반역을 모의한 죄로 투옥 ·유배된 동량의 무고함을, 사건의 전말과 여러 기록을 들어 변명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계축옥사의 한 면을 살필 수 있는 사료이다. <유능저주사건> 인목대비 페모론은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나던 1613년(광해5)10월부터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논의는 선조의 유교를 받은 7명의 신하들을 탄핵하는 것으로써 그 단서를 열었다.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하며 7명의 신하들에게 내린 유서가 대비의 사주에 의해 내시 민희건이 위조한 것이란 설이제기되었다.7명의 신하들 중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변명했다. 이때 박동량이 자신의 무죄를 방하기 위해 ‘유릉저주사’를 털어놓아 대비를 곤경에 빠뜨리고 만것이다. “유릉저주사란 선조의 병이 위중했을 때 그원인이 죽은 의인왕후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이 있어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능에 저주를 한 것을 말한다. 이를 기하로 이위경과 정조 윤인은 ‘’인목대비가 국왕의 모후이면서도 안으로는 무당굿을 하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므로 어머니의 도리가 끊어졌다‘’라고 하면서 처별을 주장했다. 페모론이 시작된 것이다. 유릉의 저주 사건이란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있다. 광해 05/05/16(계유) / 전 우의정 한응인과 박동량의 공초 내용 》(※ 오창공 박동량이 진술한 내용) 전략(前略) 정미년 10월에 선왕의 병환이 위독해진 뒤로 신의 숙부인 반성(潘城= ※ 반성부원군 박응순= 의인왕후 아버지) 집안의 여종 경춘(景春)이의인 왕후를 모셨다가 경자년(1600년 의인왕후가 돌아가신때) 이후로는 대군의 궁방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하루는 신의 종형 박동언(朴東彦=※ 반성부원군의 아들)의처에게 와서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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