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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잡기’중에 있는 야천(冶川)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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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0:48 조회1,6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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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공의 역사책 ‘기재잡기’중에 있는 야천(冶川)의 묘


‘야천의 묘’ 에 대한 사실이 우리의 선조이신 오창공 박동량 할아버지 께서 쓰신 역사책 ‘기재잡기’에 분명하게 기록 되어 있다,

오창공의 기재잡기는 조선조의 역사책으로 정사에 다루지 못한 부분을 다루어 우리역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훌륭한 역사책이다.
이러한 역사책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고
전설에 의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재잡기에 문강공의 묘지에 대한 기록된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오창공 휘 박동량)의 할아버지( 文康公 휘 朴紹)가 파직되어 남양(문강공의 처가댁)에 물러가 계시는데 흉악한 무리( 김안로․채무택蔡無擇 허항許沆등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兇)들이 그 가 까운데 있는 것이 꺼리므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합천(陜川)으로 돌아가니, 합천에서 서울의 거리가 아흐레 길이었다.

일찍이 이상(二相) 김광준과 특별한 교분이 있었는데 김광준에게 잘 달리는 종 하나가 하루에 능히 300리를 갈 수 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혹 할아버지에 관한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이 종을 시켜 알렸는데, 사흘이면 도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
“박 아무개와 김 수예(김광준의 자)는 기질이 서로 유사하지 아니하여, 그 사인는 비단 빙탄(氷炭) 정도가 아니었는데 교분이 이렇게 좋으니, 알수 없는 일이라” 고 하였다.

할아버지가 합천에서 5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아들 딸들이 어려서 울음소리가 방에 가득하였으며 큰아버지(감정공 응천[應川])가 겨우 스무살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진주에 사는 생원 이 광(李光)과 절친한 사이었다. 작고하신 것을 알리자 미투리 신에 대 지팡이를 짚고 20리 밖에서 산꼭대기를 넘어 찾아 왔었는데, 할아버지 댁 뒷산에 이르자 큰 소리로 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장사 지낼 만한 곳을 얻었노라. 너의 아버지가 어질면서도 장수 못한것을 슬퍼하여 자손을 위하여 좋은 땅을 구득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과연 구득하였다” 하고

이내 내려와서 통곡을 하고 갔는데, 지금의 무덤이 즉 그가 정해 준 곳으로 뒤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매우 좋다고 하여 동래 정씨의 산소에 다음간다고 하였다.

신재 주세붕이 우리 할아버지와 다만 한 때만 좋아 했을 뿐이 아니라 부고를 받자 술을 갖이고 무덤에 까지 와서 제사를 지내었다. 큰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올라갔더니 이미 끝나 돌아간 뒤였으니, 아마 그 연루 될가 염려한 것이다. 그 문집 속에 제문 두수가 있는데 모두 제(祭) 지낸 뒤에 우리집에 주지 않고 가지고 간것이다.

충혜공 심 연원(沈連源)이 야천 할아버지와 이성 재종(異姓再從 외가 6촌형제) 간이었고 또 서로 친구 사이었다. 심이 부제학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제주목사가 된 것은 , 대개 우리 할아버지의 누를 입은 것이다.
하루는 실성(失聲) 하도록 통곡하면서.
“ 어진이가 죽었구나, 어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그 곳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사람 김세진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물어 보니 우리 할아버지의 부고를 받은 것이었다.
김은 바로 말타기 활쏘기를 잘하고 힘이 세어 무사의 일인자였다.
정랑 벼슬을 하다가 우리 할아버지의 누를 입어 죄를 받고 제주에 귀양간 사람이었는데 그도 또한 슬피 울어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어었고,
뒤에 병사(兵使)가 되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 오창공(梧窓公)) 이 지은 역사책
필사본. 7권 1책. 조선 초기부터 명종에 이르는 역대의 야사(野史)를 기술하였으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어 있다. 제1권은 조선 초부터 연산군까지, 제2권은 중종, 제3권은 중종부터 명종까지의 구전(口傳)되는 일화와 기타 사실(史實)들을 기록하고, 저술자의 의견도 간간이 삽입하였다. 정사(正史)에 빠진 채 전해지는 기사(奇事)를 포함하여 명인들의 전기(傳記) 및 시사(時事)와의 관계도 보충하였다. 특히 중종 이후의 부분에 힘을 기울였는데, 중종반정 등에 관한 서술은 주목할 만하다.

박동량
자 자룡(子龍). 호 오창(梧窓)·기재(寄齋)·봉주(鳳洲). 시호 충익(忠翼).
문강공(文康公) 휘 박소(朴紹)의 손자
졸헌공(拙軒公) 휘 박응복의 아들로
1589년(선조 22) 사마시를 거쳐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검열(檢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 그 공으로 승지(承旨)에 승진하였다.
1596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도승지 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금계군(錦溪君)에 봉하여지고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1608년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죄인을 다스리다가 혐의가 없음을 간파하고 석방될 것이라는 말을 발설했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용서받았다. 이어 폐지된 호패법(號牌法)을 양법(良法)이라고 했다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가 곧 복관되었다.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앞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을 묵인한 일과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자 역모사건은 부인하고 대북파가 조작한 유릉 저주사건을 시인, 폐모(廢母)의 구실을 줌으로써 감형되어 지방으로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릉 저주사건을 그릇 시인한 죄로 부안(扶安)에 유배되고
1627년 충원(忠原)에 양이(量移)되었다가
1632년 풀려났다. 1635년 아들 미(瀰)의 상소로 복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기재사초(寄齋史草)》 《기재잡기(寄齋雜記)》 《방일유고(放逸遺稿)》가 있고, 그림에는 《농가풍경도(農家風景圖)》가 있다.


허항
본관 양천(陽川). 자 청중(淸仲).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4년(중종 19)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고 부교리(副校理)·지평(持平)·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이 되었다. 1534년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김안로(金安老)가 재집권하자 대사간이, 다음해 대사헌에 이르렀다. 간신 김안로의 일당이 되어 옥사(獄事)를 함부로 일으키고 무고한 사림(土林)를 죽이는등 행패를 자행하였다. 김안로·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일컬어진다.

허항은 문강공 야천할아버지와 외가로 6 촌간의 친척이다

상주공의 배(配) 께서는 양천허씨 허손의 딸로
억년(교리공), 조년(정랑공) 두분의 스승은 외삼촌 이며 우의정을 지내신 허종 충정공이시고
또한분의 외삼촌인 허침 문정공께서는 연산군의 스승으로 유명한 일화가 있는분이시다
허항은 문강공과 외6촌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許沆의 지위가높아지자, 매양 소(紹)가 외방에 산거(散居)하면서 조정을 헐뜯고 비방한다고 하면서 소(紹)를백방으로 위협했기 때문에 무거운 화(禍)를 입을까 염려하여 병이 나서 끝내는 죽고 말았다.






김광준 (?~1553)
본관 상주. 자 숙예(叔藝).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532년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삼사의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43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대사간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소윤(小尹)의 한 사람으로 을사사화를 일으켜 상락군(上洛君)에 책봉되고,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호조참판 ·이조참판 ·호조판서를 거쳐, 1546년(명종 1)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553년 돈령부판사가 되었다.

주세붕(1495~1554)
본관 상주(尙州). 자 경유(景遊). 호 신재(愼齋)·손옹(巽翁)·남고(南皐). 시호 문민(文敏).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 출생.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잡았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관찰사 때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워 최충(崔只)을 제향하였다. 재차 대사성·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지내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 8수가 전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배향되고, 백운동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 《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다.

심연원(1491~1458)
본관 청송(靑松). 자 맹용(孟容). 호 보암(保庵). 시호 충혜(忠惠).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 권지정자 ·검열 등을 지냈다. 1526년 다시 문과 중시에 급제, 뒤에 의주부사(義州府使)·동부승지(同副承旨)·예조참판 등을 거쳐 1541년 대사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호조판서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위사공신 2등으로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지고, 춘추관감사로서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의금부판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51년 영의정에 오르고, 1558년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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