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 박씨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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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30 11:11 조회2,002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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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반남 박씨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답변
반남 박씨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답변
한국명문 (2007-06-30 오후 7:35:46) Hit : 72 Vote : 1
반남박씨 인물에 대한 문중자료 난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홈피에서 이미 올렸던 글들을 종합하여 답변해 드립니다.
박소는 반남박씨의 중흥조나 다름 없다. 박소가 태어난 후 반남박씨는 조선조 후기 문벌 중 손꼽히는 명문거족이 되었다. 박소는 1493년에 태어나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였다. 11년의 대선배인 정암 조광조에게도 학문을 물었다. 1519년 문과에 장원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김안로 일파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좌천되고 마침내 협천으로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힘을 썼다. 호는 야천이며 시호는 문강공이고 협천 화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야천 박소는 아들 5명에 손자 17명을 두었다. 아들의 돌림자는 "응"자이고, 손자의 돌림자는 "동"자이다. 이로 인해 야천 집안을 "5응 17동"이라 일컫는다.
다섯 아들 중 맏 박응천은 학행이 뛰어나 왕자사부가 되었다. 둘째 박응순은 딸이 선조의 비가 되어 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셋째 박응남은 문과하여 호당에 들고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6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넷째 박응복은 문과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맏 박응천은 의적 임꺽정도 두려워할 만큼 근신하고 청렴했다. 둘째 박응순은 왕비의 아버지인 줄 세상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처신이 겸허했다. 왕비의 아버지가 인품이 훌륭하고 왕비의 할아버지가 의로우니 왕비의 숙부들이 판서나 상신의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아니한 듯하다.
17명의 손자 중에 5명이 문과하여 3명이 당상관 이하의 벼슬을 했고 2명이 판서를 지냈다.
반남박씨 가문에 아주 큰 인물이 있다. 한양과 기호지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유현이 탄생했다. 노른자위 서울 명문대가의 영웅호걸 속에서 우뚝 솟아오른 석학의 출현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세채이다.
박세채는 1631년에 태어났다. 호는 현석이다. 학행이 뛰어나 1658년 세마를 지내고 이조판서를 거쳐 1694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순이고 문묘를 비롯하여 나주의 반계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순공 현석 박세채는 조선에 제일가는 복상[복이 많은 상신]이다. 조선조에서 문묘에 배향된 명현은 모두 14명이다. 이 중에서 상신을 지낸 인물은 우암 송시열과 박세채 둘 뿐이다. 송시열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박세채는 천수를 누린 상신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어찌 복되다 하지 않으랴 !
현석 박세채는 문묘명현 14명 중 막내둥이다. 막내는 재롱도 많고 사랑스런 개구쟁이다. 현석은 개구쟁이처럼 문묘에 계시는 근엄한 명현들의 주자 학설을 대뜸 사래질해 버리고도 문묘14명현의 막내둥이가 되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4성 10철 6현과 한국의 18명현의 위패를 모신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영예스런 성전이다. 한국 18명현 중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유, 정몽주를 제외한 14명현은 조선조 인물이다.
여기서 9명만이 175개 가문에 들었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이며 송시열과 송준길은 같은 은진 송씨 한 가문이니 175개 가문에서 7개 가문만이 문묘명현의 영광을 누렸다. 175개 가문 중에서 반남박씨 이외 위광이 찬란한 서울명문들은 문묘명현을 단 한 명도 못 냈다.
현석은 175개 가문 내 서울 명문 중 유일한 문묘명현이다. 조선조 최강의 명문 안김 김생해 가문도 해내지 못한 문묘명현의 꿈을 이루었다. 연안이씨 이정구 가문, 대구서씨 서성 가문, 전주이씨 이경여 가문, 동래정씨 정유길 가문과 같이 서울의 상공을 눈부시도록 빛나게 하는 별의 무리들이 넘볼 수 없는 위업을 반남박씨의 현석이 달성했다.
반남박씨 야천 가문은 5명의 상신을 배출했다. 5상은 좌의정 박세채, 우의정 박종악, 좌의정 박종훈, 좌의정 박회수, 총리대신 박정양이다. 반박 야천 가문은 박정양이 총리대신을 잠시 지냈을 뿐 영의정을 한 명도 내지 못했다. 안김 김생해 가문이 8명의 영의정을 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구서씨 서성 가문이 7명, 남양홍씨 홍춘경 가문이 4명, 청송심씨 심강 가문이 4명, 경주이씨 이항복 가문이 4명의 영의정을 각각 냈다. 조선 최강의 명문 야천 가문으로서는 아주 미미한 기록이다.
이것은 야천 가문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화려한 가운데 겸허함이 가풍으로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주 성하거나 차서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온 선조들의 염려가 배어 있는 기록이다.
야천 가문은 5응 17동으로 화려한 창업을 한 시기가 1493년에서 1600년 대 초다. 그 뒤로 큰 인물이 꾸준히 나왔다. 1631년 박세채, 1735년 박종악, 1773년 박종훈, 1786년 박회수, 1841년 박정양 등으로 상신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10년, 20년, 30년, 50년 60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번갈아 가며 나왔다.
이것도 야천 가풍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집은 어느 한 시기에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거나 한꺼번에 몰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모양새다.
소론 집안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쇠퇴하였는데도 소론의 영수를 지낸 이가문은 예외였다. 노론의 안동김씨가 한창 세도를 부리던 시기인 1834년 박종훈이 좌의정을 지냈으며,1859년 박회수가 또한 좌의정을 지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가문의 번성과 꾸준한 인물 배출은 흔한 일도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 이것은 가운이 뒤 따라준 결과이다. 야천 손녀가 왕비가 된 것이 어디 보통 행운인가? 왕비의 할아버지가 벼슬로는 국장도 못 지냈다. 왕비의 아버지는 처사인데 오늘로 말하면 무직이다. 어느 면에서 보면 아주 평범한 가정에 로또복권이 터진 바나 진배없다.
어찌 그것에 비하랴 ! 아마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표류하는 한 승객에게 하늘에서 내린 구명보트 보다 더 값진 행운일지도 모른다. 이런 행운에다가 야천 가문은 가는 곳마다 붉은 등이 켜지거나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다. 탈도 많고 변수 많은 인생살이가 순조로운 것이 야천 가문의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가운은 아침저녁으로 바뀐다. 그 운은 주식시장의 주가처럼 춤추고 오늘날 정치인의 공약처럼 변덕스럽다. 행운이란 여름 하늘에 잠시 떴다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오뉴월 콩죽 끓듯이 변하는 이 운을 400여 년간 지닌다는 것은 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야천 가문의 교육 및 철학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학문을 사랑하고 남을 아낄 줄 아는 큰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근신하고 겸허한 처신을 좋아하는 철학이 400여 년간의 행운을 붙들어 놓았을 것이다.
야천가문의 제1호 상신은 좌의정 문강공 현석 박세채이다. 현석은 아버지가 사계 김장생에게 글을 배웠고 현석도 사계의 아들 김집에게 수학하였다. 현석은 또한 청음 김상헌에게도 글을 배웠다. 남구만과 함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먼저 문묘에 앞장서 배향시켰고 나중에 그 자리에 본인도 함께 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대유학자로 예학에도 밝았다. 남인들에 의해 숙청을 당한 적도 있지만 소론의 영도자로 당쟁 근절에 힘을 썼다.
야천집 상신 제2호는 박종악이다. 자는 여오, 호는 창암이다. 1766년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세도가 홍국영에 의해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영조의 사위인 작은 아버지 금성위와 함께 임금[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헌이다.
상신 제3호는 박종훈이다. 자는 순가, 호는 두계이다. 1802년 문과하여 6조의 판서를 지내고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풍양조씨 세도에 의해 사직했다. 사서삼경과 예학에 밝았으며 율령, 산수에도 정통했고 글씨까지 뛰어났다.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상신 제4호는 박회수이다. 자는 자목이고 호는 호곡이다. 1816년 문과하여 승지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굶주리는 백성을 잘 돌보아 암행어사의 포상 상소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아 신망이 높은 상신[좌의정]으로 조야에 존경을 받았다.
상신 제5호는 박규수이다. 자는 환경, 호는 환재이다. 1848년 문과하여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냈다. 대제학에 상신을 겸했으니 본인의 광영도 높으려니와 야천 가문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다산 정약용을 사숙했고 신응조와 교유했다. 고금에 두루 밝은 대학자이었다. 선각자로 한 시대를 이끌었으며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과 같은 큰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시호는 문익이다.
반남박씨의 목사 송담 박태원 집은 글 읽는 소리가 30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 집의 글 읽는 소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이다. 아버지 박세성은 1621년에 태어나 1651년 문과하여 우부승지를 지냈다. 윤선도와 함께 서인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벼슬보다 학문을 더 좋아하였다. 유고가 있다.
할아버지 박환은 동추를 지냈는데 글을 사랑하여 남긴 글이 있다. 송담 박태원의 할아버지, 아버지에서 부터 아들 필리, 손자 사석에 이르기 까지 4대를 두고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5대에 이르러 반남박씨가 자랑하는 큰 학자 형제가 나왔다. 바로 문헌공 근제 박윤원과 충헌공 금석 박준원이다.
둘다 육경에 정통하고 학덕이 높아 스승의 사랑과 동료들의 존경을 크게 받았다. 송담 집의 글 읽는 소리는 5대 부사 종여, 6대 부사 운수, 7대 목사 제근에 이르기 까지 끊이지 않고 우렁차더니 8대에 이르러 큰 인물이 나왔다. 바로 한말의 총리대신 문익공 박정양이다.
박정양의 아들 승길이 문과하여 동부승지를 지냈고 승길의 동생 승철이 남선전기 사장을 했다. 승철의 아들 명서가 축석 농장 대표를, 명서의 동생 동서가 박사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송담의 할아버지부터 박정양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가 약300여년이 된다. 9대를 내려오며 한 대도 건너지 않고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집이다. 이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반남박씨 야천가문에 호학정신이 가장 강한 집이라 칭할 수 있다.
300여 년간을 두고 독서성이 끊이지 않던 송담 박태원 집 증손자 박윤원, 준원 형제가 학문의 길은 같았으나 운명은 갈렸다. 한 날 한 시에 난 한손바닥에 달린 다섯 손가락이 모두 길이가 다르듯이 박윤원, 준원 형제가 한 근원에서 나온 석학들이지만 두 집의 특징은 아주 딴판이다.
형인 박윤원 집은 문집이 쏟아진 반면에 동생 박준원 집은 판서가 쏟아졌다. 동생 집은 4대 동안 판서가 8명이 나왔다.
박준원은 셋째 딸이 수빈으로 뽑혔으며 수빈이 1790년 원자[후일 순조]를 낳자 호조참의가 되고, 순조가 즉위하자 여러 조의 판서와 금위대장 등 삼영의 병권을 8년 동안 잡았다. 맏아들 종보가 호조판서, 종보의 아들 주수가 예조판서, 주수의 아들 제헌이 공조판서, 제헌의 동생 제인이 이조판서를 지냈다.
박준원의 맏아들 집에서 3대에 5판서가 나왔다. 박종보의 동생 종경이 이조판서, 종경의 아들 기수가 이조판서, 종경의 동생 종익의 손자 제관이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로써 4대에 8판서가 나왔다.
박세견은 1619년에 태어나 1683년에 몰했다. 자는 중고, 호는 고옹이다. 1639년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1654년 문과하여 우승지를 지냈다.
고옹 박세견은 할아버지가 형조판서를 지낸 정헌공 박동선이다. 고옹의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충숙공 박정이며 조선의 유명한 성리학자 문절공 서계 박세당의 형이다.
고옹 박세견은 충숙공 박정의 여럿 아들 중에서 비교적 깨끗하고도 뛰어난 후손을 가장 많이 두었다. 아들 박태상은 문과에 장원하여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문효라는 시호가 내렸다.
손자 사임은 경학으로 천거되어 동돈녕을, 또 다른 손자 사백은 문과하여 군자감정을 각각 지냈다. 5대 손 박종갑은 문과하여 사가독서하고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5대 손 박종래는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내고 익헌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6대 손 박회수는 문과하여 좌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숙헌이다. 7대 손 박제소, 박제승은 둘다 문과하고 예조판서, 정언을 각각 지냈다. 9대 손 박승억은 문과하여 비서원승을 지냈다.
고옹 박세견의 손자 박필건은 천거로 선산부사가 되어 이인좌의 반란군을 진압하여 분무공신 2등에 금릉군(錦陵君)이 되었다. 시호는 양정이다. 금릉군(錦陵君) 박필건의 현손 박윤수는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내고 충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필건의 현손 박태수는 문과하여 좌승지를 지냈다. 5대 손 박제문, 박제선은 둘다 문과하여 이조참판, 동부승지를 각각 지냈다. 오늘날 후손으로 삼성 장군에 군수사령관을 지낸 박찬긍이 있다.
고옹 박세견의 집은 야천 후손으로 가장 화려한 경력을 지닌 명가 중에 명가로 손꼽을 수 있다. 경력이 더 화려한 집이 있다 하여도 험이 있다. 고옹의 집은 그 험을 비켜 나간 집으로 깨끗하고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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