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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한 일 -이곡(李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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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3-26 16:44 조회5,0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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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한 일 이곡(李穀)
〈금강산 도산사 창건 기문[創置金剛都山寺記]〉《가정집(稼亭集)》


무릇 어떤 일을 행하든 간에
만물에 이롭고 사람에게 편리하도록 도모해야 마땅하니,
자기만을 위해서 복을 구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凡爲事。當利於物而便於人。爲己而求福者末也。

<해설>
금강산의 경치는 옛날부터 하도 아름다워서 우리나라의 선비나 부녀자는 물론 중국의 사신들까지도 구경하러 찾아오곤 하였답니다. 그런데 금강산 서북쪽 고개는 너무도 험준하여 지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여행 중에 혹 비바람이라도 만나면 사람들이 몹시 애를 먹었다는군요.

그래서 1339년에 쌍성 총관(雙城摠管)으로 있던 조후(趙侯)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영을 내려 스님들의 힘으로 도산사(都山寺)를 완공한 뒤 이곡(李穀,1298∼1351)에게 창건 기문을 써 달라고 요청을 해 왔습니다. 이곡은 창건 기문에서 위의 내용을 말한 뒤 곧이어 조후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산의 험준한 곳에 사찰을 지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고자 했던 그 마음을 가지고 정치를 해 주시오. 아마도 그렇게 하면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는 일이 많을 것이오.

정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만물에 이롭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리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옮긴이 /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

<가정집> 고려 말기의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시문집
목판본. 20권 4책. 초간본은 1364년 아들 색(穡)이 편집하고 사위 박상충(朴尙衷)이 간행하였으나 병화로 없어지고, 1422년 후손 종선(種善)이 중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판본이 소실되자 후손 기조(其祚)가 1635년 대구에서 세번째로 중간하였으며, 지금 전해지는 책은 1662년에 후손 태연(泰淵)이 전주에서 20권 4책으로 중간한 것이다.
원나라에서의 오랜 관직생활에서 보고 듣고 조사한 내용을 기록하였으므로, 당시 원(元)나라와 고려와의 관계 및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1973년 4간본을 대본으로 하여 성균관대학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이곡(李穀)에 대하여>
※ 가정 선생님은 문정공(文正公 휘 박상충(朴尙衷)의 장인 이고
                    평도공(平度公) 휘 박은(朴訔)의 외할아버지 이심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한산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으며,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뒤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받았고, 그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편에 가까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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