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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반양이선생유고의 編者는 諱 世采이며 刊者는 諱 弼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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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종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4-04 00:44 조회3,4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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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보기」에는 ‘숙종 연간에는 그와 박상충의 유문을 합한『潘陽二先生遺稿』(朴世采刊)가 간행되었다.’ 또. ‘1709년(숙종 35)에는 박세채의 주도로『潘陽二先生遺稿』가 간행되었다.’라고 하는데 玄石 할아버지께서는 1631년에 나시어 1695년에 돌아가시고, 忍齋 할아버지께서는 1658년에 나시어 171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709년(己丑)에 간행된 것으로 보아 玄石 할아버지께서 편하신 것을 忍齋 할아버지께서 간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跋文을 쓴 사람이 刊寫者입니다.) 다음은 尤庵선생의 序입니다.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 서≫ 예로부터 국가(國家)가 망하려 할 때는 반드시 불세출(不世出)의 인재(人材)가 나와서 나라를 부지(扶持)하는 것이고, 부지하려 해도 끝내 부지되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을 죽이고 종족(宗族)을 몰락(沒落)시켜서 명절(名節 명예와 절개)을 후세에 전한다. 그러므로 그 공(功)은 비록 한 때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교화(敎化)는 실로 먼 후세까지 입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즈음에도 또한 반드시 재식(才識)과 사려(思慮)가 원대한 유도(有道 도덕을 몸에 갖추고 있음)의 군자(君子)가 있어, 쇠퇴(衰頹)의 기미(機微)는 강하고 진취(進就)의 기미는 매우 간난(艱難)한 시기를 당하여도 자기 몸에 따른 이해(利害)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즉시 훌륭한 덕(德)을 속에 간직한 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평생토록 번민(煩悶)하지 않는 것이니 그 마음 또한 어질다 하겠다. 바로 여기 반남선생(潘南先生 박상충을 가리킴) 조손(祖孫 선조가 되는 박상충(朴尙衷)과 후손이 되는 박소(朴紹)를 합칭한 말)이 거의 여기에 합당할 만한 분들이다. 대체로 고려(高麗)의 말엽을 당하여 다행히 폐색했다가도 다시 열리는 이치가 있어, 새가 유곡(幽谷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교목(喬木 높은 나무)으로 옮아가듯 차츰 국운(國運)이 상승일로 접어들어 진주(眞主 참다운 왕(王) 즉 명(明) 나라를 가리킴)를 섬기게 되었는데, 호원(胡元 원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낮추어 일컫는 말)의 남은 종락(種落)이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어 옛 우호(友好)를 다시 찾자는 구실로 고려를 초유(招諭)하였다. 그러자 반남선생이 소(疏)를 올려 극력 논쟁(論爭)하여, 호원의 사자를 준절히 물리칠 것을 청하였으니 그 정명(正明)한 의리(義理)는 참으로 《춘추(春秋)》의 취지를 충분히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그리고 본조(本朝)의 중종(中宗)ㆍ인종(仁宗) 때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융성하기가 극에 도달했다 이를 만하다. 그런데도 악인(惡人)들이 감히 그사이에 끼어들어 간악하고 사악한 짓을 함으로써 그 형세가 끝내 다시 확장되어 버렸다. 그러자 선생(박상충을 가리킴)의 이손(耳孫 현손(玄孫)의 아들을 가리킴)인 야천 선생(冶川先生 박소(朴紹))가 그 장대한 발걸음으로 정의(正義)를 향해 용기 있게 진취해서 장차 왕정(王庭)에 도(道)를 행하여 성신(誠信)으로 호령(號令)을 하려 하였으나, 소인배(小人輩)들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날뛰므로, 끝내 그들을 제거하지 못한 데 대한 허물이 있게 될 것을 알고는 곧장 재덕(才德)을 감추고 산촌(山村)에 은둔해 살면서도 끝내 조금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이른바 독실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며 선도(善道)를 죽기로써 지키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반남선생은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하다가 마침내 거기에 목숨을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 성조(聖祖 조선 태조(朝鮮太祖)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킴)께서도 역시 그를 빙자하고 의뢰하여 감히 온락(溫洛)의 맥화(麥禾)를 취하지 않아서 무궁(無窮)한 혁업(赫業)의 기반(基盤)을 닦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천지(天地)가 폐색(閉塞)하여 민이(民彛)와 물칙(物則)이 모조리 없어졌는데도 상(上)ㆍ하(下)가 오히려 ‘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必東]’는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는 의지는 우리 성고(聖考 효종을 가리킴)에 이르러서 더욱 드러났다. 전(傳)에 이르기를, “《춘추(春秋)》는 노(魯) 나라로서는 불행(不幸)한 것이지만 만세(萬世)의 다행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다. 더구나 선생은 우리의 도[吾道 유학(儒學)을 일컫는 말]가 이미 동(東 우리나라를 말함)으로 들어온 뒤에 생장(生長)하였으므로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의 노선생(老先生)과 함께 학궁(學宮)에서 성리학을 강론(講論)하여 사문(斯文)이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도록 길을 열어 놓았으니, 여기에서 또한 그 의리의 근본한 곳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야천선생(冶川先生)으로 말하면, 학문이 매우 바르고 뜻이 매우 높아서, 비록 사업(事業)은 성취하지 못하였지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 제현(諸賢)과 함께 당시(當時)를 풍동(風動 바람에 나부끼는 것처럼 따라 감화(感化)됨)시켰다. 그 후에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도학(道學)이 진사(秦斯) 시대를 능가할 만큼 세상에 금제(禁制)되었는데도 선생은 오히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공공연히 도학을 강송(講誦)하였다. 그러므로 참벌(斬伐)과 소삭(銷鑠)의 재화(災禍)가 비록 전후로 잇달아 일어났지만, 지금까지 유생(儒生)이나 서인(庶人)들까지도 선(善)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악(惡)은 당연히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감히 정주(程朱) 등의 여러 학설(學說)을 하찮은 물건으로 간주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공로 또한 크다 하겠다. 참으로 이 할아버지에 이 손자라고 이를 만하다.선생(先生 박소(朴紹))의 현손(玄孫)인 세채 화숙(世采和叔 화숙은 박세채(朴世采))이 두 선생의 유고(遺稿)를 부집(裒集)하고 거기에다 비명(碑銘)ㆍ행장(行狀)ㆍ유사(遺事) 및 고증이 될 만한 모든 사실(事實)에 관계된 것과 또 간인(姦人)들의 유사(游辭 근거 없는 유언비어)나 무필(誣筆 무함 참소하는 글)을 변론(辨論)한 것 등을 부록(附錄)하여 합해서 한 책(冊)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천성(天性)이 덕(德)을 좋아하는 마음은 하늘에서 나왔기에 고금(古今)의 차이가 없는 것이나, 다만 이해(利害)에 얽힌 사욕(私慾)과 사생(死生)의 중대성에 홀려서 본심(本心)을 모조리 상실하여, 스스로 그 퇴파(頹波) 속에 우뚝이 서서 그 본심의 진(眞)을 온전하게 간직할 줄을 모르고, 또한 후세 사람들에게까지도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의 흐름을 감수(感受)하도록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선생 조손(祖孫) 같은 분들이야말로 전기(傳記)에서 찾아본들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두 선생의 평소에 지은 시문(詩文) 등이나 기타 국사(國事)를 모유 의론(謀猷議論)했던 서자(書字) 등은 의당 누구나 다 소중히 간직해 두고 전송(傳誦)할 만한 것인데 더구나 그의 자손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화숙(和叔)이 한없이 여기에 정성을 쏟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휘(諱)가 명의(明誼)인 나의 선조(先祖) 안렴공(按廉公)은 바로 반남선생(潘南先生)의 친구이고, 나는 또 선생의 외손(外孫)이므로, 그분들을 추모(追慕)하고 존상(尊尙)하는 뜻이 본래부터 타인(他人)보다 훨씬 다른 점이 있었다. 어(語)에 이르기를, “후왕(後王 후대(後代)의 임금)을 본받는다 하니 이는 어째서인가? 내 자신과 연대가 가장 가까워서 풍속의 변천(變遷) 과정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서 다시 못내 슬퍼 길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상과 같이 썼다. 숭정 경술년(1670, 현종11) 12월 납일(臘日)에 은진 송시열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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