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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晦壽, 諱 岐壽 永世不忘碑(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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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종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4-14 13:23 조회3,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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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晦壽 諱 岐壽 永世不忘碑 (남한산성 소재)
남한산성 남문 아래 비석거리에 가시면 廣州유수(留守)를 지내신 두 분의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혹시 산성에 오르시면 살펴봐 주십시오. 원래 행궁터 아래에 있었던 것을 근래에 옮겨 놓았는데, 맨 중앙에 諱 晦壽의 永世不忘碑, 오른쪽에서 4번째에 諱 岐壽의 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박회수(朴晦壽) - 서포공(諱 東善)후
1786(정조 10)∼1861(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목(子木), 호는 호곡(壺谷) 또는 호하(壺下).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우(宗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郎) 신명성(辛命聖)의 딸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릉참봉(懿陵參奉)을 지내다가, 181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좌랑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정언이 되고, 왕의 총애를 받아 이례적으로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겸하기도 하였다.
1819년 병조정랑이 되고 이듬해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다. 이 때 잇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다.
1823년 필선(弼善)·교리(校理)가 되었고, 세자 익종(翼宗)이 정사를 대리할 때 신임을 받아 승지로 임명, 국사를 자문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감사가 되었다. 감사로 재임할 때 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고 백성을 구휼하여 어사가 포상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833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이 되어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행장(行狀)·시장(諡狀)의 찬집을 맡았다.
1835년(헌종 1)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2년 뒤에는 평안감사가 되었다.
1840년 연공정사(年貢正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45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849년 헌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851년(철종 2)에는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官)을 맡았다.
1855년 임금이 파주에 갈 때 병을 핑계로 호종(扈從)하지 않아 삭직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 1859년 좌의정에 이르러 3년여간 재직하다가 영부사(領府事)로 죽었다.
마음이 정직하고 처사에 신중하여 왕을 잘 보필하고 백성들을 돌보아 당대에 신망이 높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무능한 관리를 제거하고 임금의 향락을 경계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묘는 대전 구봉산 기슭에 대제학을 지내신 文孝公 諱 泰尙 어른의 묘와 함께 있으며 1968년 의정부에서 천묘하여 용우씨가 잘 돌보고 있습니다.


박기수(朴岐壽) - 참봉공(諱 東民)후
1792(정조 16)∼1847(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봉래(鳳來).
형조판서 준원(準源)의 손자로, 이조판서 종경(宗慶)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군수 술모(述模)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호조판서 종보(宗輔)에게 입양되었으며, 종조부인 윤원(胤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81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그 뒤 홍문관부교리·이조참의·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1835년(헌종 1)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이조·병조 등 5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경연(知經筵)·도총관·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 등을 두루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1830년 익종(翼宗)의 빈궁(殯宮)에 불이 났을 때 단신으로 불속에 뛰어들어 진화하였으므로 모두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간신 김필(金弼)의 배소를 가까운 곳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양주의 돈암구사(敦巖舊舍)에 돌아가 산수를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1847년 병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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