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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 사시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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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5-21 09:08 조회5,9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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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 사시던 곳
평도공(平度公)께서 사시던 곳을 알아보고자 세보(世譜)와 여러 문헌을 살펴보기로 한다.
연려실기술 반남지와 함종어씨종보제9호(2002.10.1자)에 기록된 사항에서 전기하는 바이다
1.백림정(栢林亭)
이 지명은 조선조 태종 때 평도공 휘 박 은(平度公 諱 朴 訔)께서 낙산(駱山)아래 이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 쌍백정(栢林亭 雙栢亭)이라는 정자(亭子)를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그린 동소문도(東小門圖)에 보면 낙산서북 기슭의 산 아래 마을에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풍광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반남지에서

2.상백동 또는 백자동(上栢洞 栢子洞)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상백동(上栢洞)아라 하였다 즉 혜화동 천주교회와 동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백동. 백자동《栢洞 栢子洞(잣나무골)》이라 불렀고 위 천주교회를 처음에는 백동교회(栢洞敎會)라 하였다

낙산정상(駱山頂上) 부분부터 기슭 전체를 차지한 동숭동은 일찍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았고 성문(城門)가까이 있는 도성(都城)안 마을인데다가 성균관(成均館)과 창경궁(昌慶宮) 배오개시장이 머지않은 곳에 있어 부락의 형성여건(形成與件)이 좋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여러 개의 자연부락(自然部落)이 남아서 백동(栢洞) 너머의 마을은 너멍굴 서울법대 부근(法大附近)은 먹골 이라고 부른다.

쌍계동(雙溪洞)은 동숭동과 이화동(梨花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 쌍시내의 수석이 매우 아름답고 뒤에는 바위가 기묘하면서도 수목(樹木)이 울창(鬱蒼)하고 꽃나무가 많이 있어서 경치 좋기로 이름이 났다
남상문은 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 군수 남상문(南尙文)이 살았다. 명나라 사신 양호(使臣 楊鎬)가 낙산에서 놀다가 내려다보니 마을 한 가운데에 정원 연못 나무의 조화가 이루어진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단숨에 내려가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庭園)의 주인 뛰어난 기상을 보고 감탄하여 그 집의 대문에다 치덕구우 달존지여(齒德俱優 達尊之閭)라 쓴 후부터 마을사람들은 남상문의 집을 자랑스럽게 여겨 마을이름을 남상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숭동(東崇洞)은 1914년 4월 1일부로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제정(洞名制定)때 숭교방(崇橋方) 동쪽에 있는 동(洞)이라 하여 동숭동이란 동명이 유래(由來)되었다는 것이고

서울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은 첫째 삼청동(三淸洞). 둘째 인왕동(仁王洞). 셋째 쌍계동(雙溪洞. 넷째 백운동(白雲洞. 다섯째 청학동(淸學洞)을 꼽는다. 홈페이지에서



함종어씨 효첨 가문(咸從魚氏 孝瞻家門)
평도공 후생(後生) 8남매중 다섯째이고 여(女)로서는 넷째사위 어효첨(魚孝瞻)의 가문 종보9호(宗報2002. 10. 1자)에서 출현되었다

출생배경
을유(1405)태종5년10월 10일 아버지 집현전제학 금곡 어변갑(錦谷 魚變甲) 어머니 증 정경부인 창영성씨 (贈 貞敬夫人昌寧成氏)께서 慶南 咸安郡 山仁面 內仁里에서 출생

대과급제와 관직 을유(1429)세종11년 문과급제하여 판중추부사(종1품 찬성사)로서 증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함종부원군 시 문효공 구천 어효첨(贈 純忠積德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咸從府院君 諡 文孝公 龜川 魚孝瞻)이다
어효첨은 세살(3歲)나던 해에 아버지 어변갑의 관직생활로 인하여 한양에 온 것이다

박가도리(朴家桃梨)
나이 8세 어린시절 한양에서 자란다는 동자라면 오직 책장과 씨름하는 권태로운 소년시절 눈길에 들어온 것이 대궐처럼 큰 기와집 뒤쪽 담 넘어 붉게 익은 복숭아가 줄렁줄렁 달린 복숭아나무 그 시절 호기심 작난기로 책장은 덮어두고 동쪽 담을 뛰어넘어 크고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골라 따려는 순간 안채의 작은 문짝이 드르륵 “이놈! 꼼짝 말고 게 섰어라” 하는 안방마님의 불호령에 훤칠한 장정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꼼짝을 못 하게 한다.

아차 월장의 봉변 당 했다 후회는 늦었다 하는 순간 마침 집에 게시던 그 집 주인 박은(朴訔)대감은 안채의 소란을 하인들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집안이 이리 소란 인고?” 예 “어떤 조그만 낯선 녀석이 뒤 담을 넘어서 복숭아를 따려다가 마님께 꾸중을 듣고 있습니다.”고 아뢰다 “그 동자를 이리 오도록 하라”는 지시에 끌려온 소년은 고개를 숙이었다

“어디 사는 누구의 아들이냐?”하니 “뒷집에 사는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어(魚)아무개의아들 어효첨(魚孝瞻)옳습니다”하니 집현전학사 어 누구라면 그 학덕과 지조가 출중한 어학사의 아들이란 말이냐? 응 그래 하는 좌의정 대감도 범상치 않은 소년임을 눈치챘던지 여러 가지를 묻다가. “너도 글 읽기를 시작하였느냐?” 무르니 “네”하고 소년은 대답 한다 “그러면 내가 도(桃)자와 이(你)자를 운(韻)으로 줄 터이니 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바치면 상급으로 복숭아를 한 상자 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네 나이대로 종아리를 맞을 것이다 괜찮겠느냐?”하고는 하인을 시켜 지필묵(紙筆墨)을 대령케 하니 서슴없이 “네”하고 글을 짓는데 마치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처럼 소년이 써서 드린 시는 다음과 같다

朴家桃梨爛滿紅 박가네 집 복숭아가 빨갛게 농익어
我慾食志踰墻東 내가 먹고 싶은 마음을 못 이겨 동쪽 담을 넘었더니
你妻開戶我見嘖 이 처가 문 열어 나를 보고 소란스런 책망이니
憎惡增惡風盡落 밉고도 밉고나 바람에 다 떨어져 버려라
좌의정 박정승이 이 글을 보니 깜찍한 속에 기개가 넘치고 당돌함 속에 재주가 번득이는 아이로구나 생각을 하고 유유히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올해 너는 몇 살 인고?” “네 여덟 살입니다” 대감은 재주를 칭찬하고 약속대로 복숭아 한 상자를 상급으로 하인에 들려 보내다

박정승이 사위를 삼다
그날 퇴청해 오는 어학사를 정중히 초대하여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하고 정중히 넷째따님의 사위삼기를 청하기에 이르니 박정승이 사람 보는 혜안 또한 대단하지 않았던가

복숭아의 유혹을 못 이겨 월장(越墻)했던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박정승댁의 사위가 되기에 이른 인연으로 어린 소년의 운명을 바꾸어 가는 사건이 된 것이다

함종어씨 문중에서는 박씨할머니(평도공 넷째따님)가 어씨 가문을 높이 일구어 세운 대복지인이라 이른다.

반남박씨 평도공 대감께서 지도하시고 사랑을 주신 그 은덕은 어씨 문중 전종원이 잊을 수가 없는 교본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며

어씨 가문도 관직으로 한양에서 살아갈 때 평도공 박정승 대감집(대궐같은 기와집)을 지칭 한 것을 보면 잣나무를 심어가며 살아가던 그때 백림정(栢林亭)을 세우고 또 쌍백정(雙栢亭)이란 그 정자를 이웃해서 살아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된다. 함종어씨 종보제9호(2002. 10. 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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