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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박동량선생 조선왕조실록에서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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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춘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5-26 09:05 조회4,741회 댓글0건

본문

박동량(朴東亮) More Info.
선조(宣祖)23년(159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3(丙科13)
생년(生年) 1569년, 기사
자(字)     자룡(子龍)
호(號)     봉주(鳳洲)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충익,호성공신(忠翼,扈聖功臣)/금계군(錦溪君)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민선(閔善)
소과(小科) 1589(기축)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호조/판서&(戶曹/判書&), 한림


13世 휘 朴東燾 (1550--1614) 명종5-광해6 溫陽公
소--응남--동도--해--세면--태정
선조38 1/7 박동도(朴東燾)를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박동망(朴東望)을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40 9/24 박동도(朴東燾)를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박동열(朴東說)을 황해도 관찰사로,
광해 4 1/14 <온양 군수(溫陽郡守) 박동도(朴東燾)
贈 左承旨


13世 휘 朴東燾 (1550--1614) 명종5-광해6 溫陽公
소--응남--동도--해--세면--태정
선조38 1/7 박동도(朴東燾)를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박동망(朴東望)을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40 9/24 박동도(朴東燾)를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박동열(朴東說)을 황해도 관찰사로,
광해 4 1/14 <온양 군수(溫陽郡守) 박동도(朴東燾)
贈 左承旨


박동량(朴東亮) More Info.
선조(宣祖)23년(159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3(丙科13)
생년(生年) 1569년, 기사
자(字)     자룡(子龍)
호(號)     봉주(鳳洲)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충익,호성공신(忠翼,扈聖功臣)/금계군(錦溪君)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민선(閔善)
소과(小科) 1589(기축)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호조/판서&(戶曹/判書&), 한림

13세 휘 朴東亮 (1569 선조13) ~1635 梧窓公     소--응복--동량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오창(梧窓)․봉주(鳳洲).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성06)․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미(#미27)와 의(#의16)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상헌(尙憲)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기재잡기 寄齋雜記》․《방일유고 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박동량(朴東亮) More Info.
선조(宣祖)23년(159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3(丙科13)
생년(生年) 1569년, 기사
자(字)     자룡(子龍)
호(號)     봉주(鳳洲)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충익,호성공신(忠翼,扈聖功臣)/금계군(錦溪君)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민선(閔善)
소과(小科) 1589(기축)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호조/판서&(戶曹/判書&), 한림
선조25 6/25 박동량(朴東亮)을 병조 좌랑으로 삼았다.
     6/29 호종한 재신들에게 추가로 상가(賞加)를 내렸다. 병조 좌랑 박동량(朴東亮)
             에게는 선무(宣務)를, 가자(加資)하였다.
     7/13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좌랑에,
     8/20 박응복(朴應福)을 대사간에,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10/20 박동량(朴東亮)을 이조 정랑에 제수하였다.
    26 9/01 이조 정랑(吏曹正郞) 박동량(朴東亮)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扈從)한 공이 있다
             하여 특별히 승정원 승지에 제수했다.【박동량은 젊은 나이로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용모와 행동 거지는 오히려 동자(童子)다운 기색이 있었다.】
     9/19 우부승지 박동량(朴東亮)이 입시하였는데,
     10/18 좌부승지 박동량(朴東亮)
     11/21 우승지(右承旨) 박동량(朴東亮),    검열(檢閱)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했다.
     11/03 승지(承旨) 박동량(朴東亮)이 아뢰기를,
     11/12 중국 사신이 칙서를 받들고 잇따라 이르니, 상이 뜰에서 무릎꿇고 맞이하여 사배(四拜)하였다. 사배가 끝나자 사신이 칙서를 펴고 승지(承旨) 박동량(朴東亮)이 칙서를 읽었다.
     12/17 박동량(朴東亮)을 우승지에,
     12/20 우승지 박동량이 우리 나라 사정을 중국에게 알릴 방법을 진달하다 》 우승지 박동량(朴東亮)이 의논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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