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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휘 박상충朴尚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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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6-30 13:16 조회3,774회 댓글0건

본문


<高麗史>.《1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
§ 박상충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릇 향사(享祀)는 예의사(禮義司)가 다 맡았으나 전일(前日)에는 문부(文簿)가 없었음으로 여러번 착오를 일으켰는데 박상충(朴尙衷)이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條目)을 지어 손수 써서 사전(祀典)을 삼으니 그 후로는 이 책임을 이은 자가 얻어 의거할 바가 있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전교 령(典校令)을 제수하니 때에 사부(士夫)들이 부모상(父母喪)을 100일만 입고 곧 벗었으나 박상충(朴尙衷)은 3년을 마치려 하매 얻지 못하고 드디어 직(職)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까지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두산동아 백과사전>
박상충 [朴尙衷, 1332~1375]
고려 후기 공민왕 때의 학자·문신. 신진 유생으로서 친명파에 가담, 이인임 등 친원파에 대항하였다. 경사·역학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사전》을 썼다.

본관 반남. 자 성부(誠夫). 시호 문정(文正).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정랑(正郞)에 올라 향사(享祀)의 법식을 정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성균관의 초기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자 신진 유생(儒生)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하였다. 전교시판사 재임시에는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간관(諫官) 이첨(李詹) 등 친명파와 함께 북원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이인임 등의 사형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친원파에 의하여 귀양갔으며, 그 도중에 죽었다. 경사(經史) ·역학(易學)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은 《사전(祀典)》을 썼다.

<가정집>
경술의 사로 永嘉 김구용. 烏川 정몽주, 潘陽 박상충, 密陽 박의중 享山 이숭인 등이 모두 타관으로서 학관을 겸하고 공(※이색)을 학장으로 하니 대사성을 겸하는 것이 공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퇴계선생 별집>
박중보 承任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되 ‘滉(퇴계 이황)은 孤陋(고루)하여 견문이 없으나 가만히 國史에서 潘南公(휘 박상충)의 事元에 반대한 疎를 보고 마음이 심히 감격하였으나 첨대효의 선조가 되는줄 알지 못했는데 어저께 행장을 보니...




永嘉; 안동 옛지명
烏川; 延日 예지명
潘陽;
密陽;
享山;
가정집; 목은선생이 편집하시고 문정공이 간행하신 가정선생(공의 장인)의 문집이다.

위의 고려사의 기록에 보면 문정공의 호는 기록이 되지 않았고
어느기록에서도 號가 반남(潘南) 혹은 심남(瀋南)이란 기록은 찾기 힘들고
흔히 문정공을 반남선생이라고 한다.
반남선생이 문정공의 호라고 단정을 지을수는 없으나 호처럼 쓰인다.




<--민족문하 대사전-- 1332(충숙왕 복위 1)~1375(우왕 1) >
                                    
고려 말기의 문신&#8228;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金九容)&#8228;(鄭夢周)&#8228;박의중(朴宜中)&#8228;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8228;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李詹)&#8228;(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田祿生)&#8228;정몽주&#8228;김구용&#8228;이숭인&#8228;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삼가하며 사람이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朴 尙 衷 年譜>
1353 恭愍王2    文科及第
1354 恭愍王3    成均館 學諭. 博士 종9품
1358 恭愍王7    尙書省 都事         정7품
1361 恭愍王10 先德郞 大府寺丞     종6품
1362 恭愍王11 承奉郞 奉車署令正 정6품
1363 恭愍王12 朝奉郞 典校寺丞 典儀主簿 종5품
     7월         知錦州事
1365 恭愍王14 通德郞 三司判官     정5품
1367 恭愍王16 禮儀正郞            정5품
1369 恭愍王18 朝列大夫 成均館 司藝 知製敎 종4품
1371 恭愍王20 中議大夫 大常寺少卿 寶文閣應敎 成均館直講 知製敎 정4 품
1372 恭愍王21 奉常大夫 兼職如前 정4품
1373 恭愍王22 中顯大夫 典敎寺令 知製敎     종3품
1374 恭愍王23 知貢擧 (考試官)
1374             知王府印 參聞國政
1375 禑 王 1 遣判 宗簿寺事 崔源 如京師 告恭愍王之喪 上疏
                 奉順大夫 判典敎寺事 右文館直提學 不署呈北元書(정3품)
                 再上疏 李仁任 事北議之罪請誅之
        禑 王 1 7월5일 被逮杖流 知靑敎驛 卒
1391 恭讓王3 12월    典醫寺丞 士良上疎請褒贈賜祭
1401 太宗 1 贈崇政大夫 門下侍郞贊成事判戶曹事 平度公策勳封君后推恩
1416 太宗 16 贈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使兼經筵事
                 錦城府院君 平度公拜相后推恩
1681 肅宗 7    宋時烈筵啓 贈諡號 文正
1681 肅宗 7    &#33103; 五冠書院
1685 肅宗 11 賜額
1694             羅州潘溪書院建立 賜額




<高麗史>.《112 열전 25 / 제신 / 박상충(朴尙衷) 》


§ 박상충(朴&#23578;衷)
박상충(朴尙衷)의 자(字)는 성부(誠夫)요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 사람이니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등제(登第)하고 여러번 옮겨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무릇 향사(享祀)는 예의사(禮義司)가 다 맡았으나 전일(前日)에는 문부(文簿)가 없었음으로 여러번 착오를 일으켰는데 박상충(朴尙衷)이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條目)을 지어 손수 써서 사전(祀典)을 삼으니 그 후로는 이 책임을 이은 자가 얻어 의거할 바가 있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전교 령(典校令)을 제수하니 때에 사부(士夫)들이 부모상(父母喪)을 100일만 입고 곧 벗었으나 박상충(朴尙衷)은 3년을 마치려 하매 얻지 못하고 드디어 직(職)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까지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에 김의(金義)가 조정(朝廷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났는데 그 후에 김의(金義)의 수종자가 왔거늘 이인임(李仁任)&#8228;안사기(安師琦)가 후하게 대우하는지라 박상충(朴尙衷)이 상소하기를,
&#985170;김의(金義)의 사신을 죽인 죄는 마땅히 심문하여야 될 것이거늘 재상이 그 종자를 대우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니 이는 사기(師琦)가 김의(金義)를 사주하여 사신을 죽인 것입니다. 그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니 이제 만약 그 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사직(社稷)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985171;
하니 태후(太后)가 그 글을 도당(都堂)에 내리어 안사기(安師琦)를 베어 머리를 저자에 달았다. 이인임(李仁任) 등이 또 종친(宗親)과 기로(耆老)와 백관(百官)과 더불어 연명(連名)하여 글을 만들어 장차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 하거늘 홀로 박상충(朴尙衷)이 임박(林樸)&#8228;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985170;선왕(先王 공민(恭愍))이 이미 남조(南朝 명(明))를 섬기기로 책(策)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북조(北朝)를 섬기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름을 쓰지 않았다. 조금 후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북원(北元) 사신이 오거늘 박상충(朴尙衷)이 또 상소하여 물리칠 것을 청하기를,
&#985170;신(臣)이 수년간 시종(侍從)의 일원(員)으로 있었으니 시종관(侍從官)으로 말을 함은 옛 제도입니다. 근자에 일을 가히 말할 것이 적지 않으나 신이 감히 말하지 않음은 어찌 직책이 간쟁(諫諍)이 아니라 하여 남의 직책을 침범함을 염려함이며 또 어찌 명성(名聲)을 가까히 함을 싫어하여 침묵함이리요. 지금은 언로(言路)를 크게 열었으매 재상(宰相) 백집사(百執事)가 얻어 말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대개 백성에 편리한 꾀를 듣고자 함입니다.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나라 백성을 편케 할 꾀가 많으나 대세가 편치 않음이 있으면 비록 백성을 편케 하고자 하나 가히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형세는 정히 이른 바 섶을 쌓아 아래서 불을 질러 놓고 그 위에 잠을 자면서 불이 미처 타지 않음으로써 편안하다고 하는 격이니 식견(識見) 있는 선비는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요. 선왕(先王)이 방금 세상을 떠났으나 장사하지 못하였고 대명(大明) 사신이 아직 국경에 있거늘 문득 북(北)을 섬긴다는 이론을 일으켜 인심으로 하여금 현혹(眩惑)케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정요위(定遼衛)에서 보낸 사람을 함부로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며 거짓말을 선창하여 정요 군인(定遼軍人)으로 사신을 맞이하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도망가게 하고 돌보지 않게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선왕(先王)이 명하여 사신을 호송케 한 자가 김의(金義) 뿐이 아니며 대신(大臣)으로서 선왕(先王)의 명(命)을 받아 안주(安州)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돌아온 자가 어떤 사람이며 서북군(西北軍)으로써 정요위(定遼衛)를 치고자 한 자가 어떤 사람이며 김의(金義)의 편지를 찢어서 입을 멸하고 이른 바 사람을 함부로 죽여 일을 낸 것과 반적(叛賊)의 모당(母黨)을 두고 묻지 않은 것은 어찌함이며 김의(金義)가 반(叛)함이 달이 넘어도 조정에 아뢰지 않고자 함은 어찌함이며 최원(崔源)의 사명을 받듦이 과연 다 대신(大臣)의 뜻에서 나왔음인지요. 이제 또 듣건대 북방(北方)이 사람을 시켜 김의(金義)와 같이 반(叛)한 자와 더불어 함께 온다 하니 반적(叛賊)이 스스로 돌아옴은 어찌 몸에 죄가 있어도 본국(本國)이 묻지 않으리라 함이 아니리요. 그러면 김의(金義)의 반(叛)함은 반드시 그렇게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이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한 큰 기틀이라 사세가 이와 같으니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그 이해와 시비가 있는 바를 알 것이거늘 지금 말하는 자가 조금도 이에 미치지 않음은 죄를 심히 두려워함입니다. 이치로 말하면 순(順)을 따르면 길하고 역(逆)을 좇으면 흉하고 형세로 말하면 남(南)은 강하고 북(北)은 약하니 이것은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대개 신(信)을 버리고 역(逆)을 좇음은 천하(天下)의 의(義)가 아니요 강(强)을 버리고 약(弱)을 향함은 오늘날의 계책(計策)이 아닙니다. 신자(臣子)가 되어 선왕(先王)의 대국(大國) 섬기는 뜻을 위반하여 천자(天子)의 사신을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았으니 죄악이 누가 이보다 더 심하리요. 그런데 한두 사람의 신하가 마음에 불충을 품고 나라를 팔아 스스로의 이(利)를 도모하고 그 죄악으로써 나라에 화(禍)를 전가(轉嫁)시켜 반드시 종사(宗社)가 멸하고 생민(生民)이 문드러져 죽은 뒤라야 그만두려고 하니 가히 통탄하지 않으리까. 사세가 이에 이르렀는데 전하(殿下)께서 두 세 대신(大臣)의 충직(忠直)한 자와 더불어 일찍이 분변하고 처치하지 않으면 장차 종사(宗社)를 어찌하오며 장차 생민(生民)을 어찌 하겠나이까. 또한 이(利)를 따르고 해(害)를 피하며 생(生)을 좋아하고 사(死)를 싫어함은 모든 사람의 같은 뜻이온데 신이 어찌 풍병(風病)을 앓는 자이리요 마는 이제 스스로 불측(不測)의 주륙(誅戮)을 각오하옵고 감히 말함은 충분(忠憤)이 지극하오매 그 해(害)됨을 돌보지 않음이오니 하물며 명망을 가까이 함이오며 관(官)을 침범함이오리까. 만약 전하(殿下)께서 신의 말을 곡진히 살피시어 처치함에 있어서 종사(宗社)로 하여금 편안하게 하며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길이 힘입게 하시면 신의 한 몸은 일만번 죽어도 한(恨)이 없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또 상소(上疏)하기를,
&#985170;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김에는 죄책을 면하도록 함이 옳은 것이온데 지금 면하지 못할 큰 죄가 네 가지 있사오니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능히 알 수 있거늘 어찌 대신(大臣)으로서 알지 못하리요. 그러나 한갖 힐책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고 의리를 돌아보지 않으면 무릇 가히 환(患)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 않음이 없을 것인 바 그러므로 마음에 가린 바가 있으면 비록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하여도 도리어 어리석은 자의 보는 것보다 못하오니 신은 청컨대 그 죄를 헤아려서 조정에 죄책을 면할 방법을 베푸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위곡(委曲)하게 순종하여 대명(大明)에 복사(服事)함은 선왕(先王)의 뜻이 있거늘 선왕(先王)이 돌아가신 날에 드디어 북(北)을 섬기자는 의론을 선창하여 신자(臣者)가 되어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전하(殿下)로 하여금 상국(上國)에 죄를 얻게 하니 이것이 그 죄의 첫째요 오계남(吳季南)이 북방(北方)을 진수(鎭戍)할 때 정요위(定遼衛)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말을 만들어서 그 군사를 놀라게 하고는 이에 그 죄를 가리고자 악에 당(黨)하고 화를 불러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니 그 죄의 둘째요 김의(金義)가 사신을 죽이고 진헌(進獻)하는 말을 빼앗아 반(叛)하였으니 천하(天下)의 큰 죄악이라 사람마다 죽이기를 원하는 바이거늘 이제 김의(金義)와 같이 반(叛)한 자가 왔는데 곧 추궁하여 힐문치 않아 그 죄로 하여금 국가에 미치게 하여 비록 종사(宗社)를 멸하고 생민(生民)을 죽여도 생각하지 않으니 그 죄의 셋째요 김의(金義)가 반(叛)한 지 달이 넘어도 조정에 알리기를 즐겨하지 않고 또 최원(崔源)이 가려 하는데 감히 임금의 명을 어기게 하여 국경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여러 달로 늦추어 대국(大國)으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죄의 넷째입니다. 네 가지 죄에 그 한가지만 있더라도 족히 이로서 죽일 것인데 하물며 이 네 가지 죄가 있음에도 능히 죄주지 않고 같이 그 화를 당하고자 함은 어찌함입니까. 전하(殿下)께서 진실로 능히 대신(大臣)의 충직한 자와 더불어 의론하여 분변하시면 죄가 반드시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오니 이미 그 죄인을 얻으면 곧 잡아 가두고 대신(大臣)을 시켜 표문(表文)을 받들어 천자(天子)께 주달(奏達)하여 살피기를 기다리시면 천자(天子)께서 총명하여 어찌 분변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안위(安危)가 이 일거(一擧)에 있사오니 한번 이 기회(機會)를 잃으면 후회[&#52321;臍]한들 어찌 미치리까.&#985171;
라고 하였다. 간관(諫官) 이첨(李詹)&#8228;전백영(全伯英)이 또한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論)하니 이첨(李詹) 등을 옥에 내려 국문하매 박상충(朴尙衷)이 그 말에 연좌되므로 옥에 가두고 매쳐 귀양보내니 중도에서 죽었는데 나이 44였다. 성품이 침묵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다.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평상시에 다만 책만 보고 말이 산업(産業)에 미치지 않았고 겸하여 성명(星命)에 통하여서 사람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 집에 있어서는 효우(孝友)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며 삼가하고 사람이 불의(不義)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일찍이 시(詩)를 대언(代言) 임박(林樸)에게 보내니 그 시(詩)에,
&#985170;충신(忠臣) 의사(義士)가 대대로 서로 전하여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이 500년이 되었는데 어찌 간인(奸人)이 능히 나라를 팔아 앉아서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편이 잠자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리요.&#985171;
라고 하였으나 임박(林樸)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우물우물하고 말았다.    
아들은 박은(朴&#3534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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