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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박찬모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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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03 07:43 조회4,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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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패 용납하는 사회분위기가 노벨상 만든다

박찬모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사이버 테러 몇년전부터 경고…미리 대처 안한 안일한 정부 문제
북한 IT 보안기술만큼은 뛰어나
연구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배려하는 맘과 협동ㆍ윤리의식…이공계 기피 차분히 풀어가야

`허허실실(虛虛實實),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3조원 가까운 막대한 연구비를 집행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박찬모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시종일관 부드러우면서도 장난끼 섞인 미소를 띠었다. `미스터 스마일`이란 별명을 가진 박 이사장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찡그린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서 간혹 느껴지는 번뜩이는 눈매와 고희를 넘긴 석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질문 하나하나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변하는 모습은 허허실실해보이지만 외유내강 그 자체였다. 사실 박 이사장은 수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미분과 적분을 중학교 때 독학으로 마스터하고, 당시 수재들만 간다는 경기고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천재`다. 경기고 시절에는 수학반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당시 수학반에 들어온 후배들 중에는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이태섭 전 과기처 장관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지난 6월 26일 이사장 취임 이후에는 하루에도 4~5개의 미팅은 기본일 정도로 청년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쯤 되면 `미스터 스마일`이 아니라 `스태미나 박`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이런 왕성한 활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유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고진감래(苦盡甘來)와 외유내강이 내 원칙과 소신입니다. 미국 유학시절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는데,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린도전서 10장 13절)`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내 능력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박 이사장은 포스텍 총장을 할 때도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일하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해지고, 가능한 일을 하는데 얼굴 찌푸리면서 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은 안정적인 미국 교수생활을 끝내고 국내에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1958년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30년 가까이 살아온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신설 대학인 포스텍(당시 포항공대)으로 부임한 것. 30여 년간 살았기 때문에 익숙한 환경과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포스텍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포스텍 초대 총장을 지낸 고 김호길 박사와 한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만들어보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만들 자신감도 있었다.

학과장, 대학원장을 거쳐 2003년 포스텍 4대 총장으로 취임한 뒤 학부 영어 강의, 학제간 연구, 융합 연구 등을 강조해 대학평가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고 김호길 박사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미스터 스마일`에게도 힘들었을 때가 있었을까 궁금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냐고 질문을 던져봤다.

박 이사장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행복했던 기억은 많지만 힘든 기억은 거의 없다"며 "굳이 힘들었을 때를 말해보라고 하면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 사흘 동안 물만 마시고 굶었던 때 같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가 행복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줄줄이 쏟아냈다.

"가장 행복한 것은 50여 년을 교육자로 살면서 한국과 미국에 많은 제자를 둔 것이지요. 지금도 스승의 날에는 1970년대 KAIST에서 가르친 제자에게서 꽃다발이 배달됩니다. 최근에는 작년 여름 교육계에서 은퇴하는 것을 기념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학술대회에서 특별세션을 마련해 `컴퓨터와 함께한 나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강연하게 해준 것도 행복한 기억입니다. 그동안 미래의 통일 대한민국을 대비해 설립 추진한 평양과기대가 조만간 개교하는 것을 보게 된 것도 즐거움이죠."

박 이사장이 이렇게 매사에 행복을 느끼는 것은 왕성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학 분야, 특히 그가 공부하던 당시에는 생소한 분야인 정보기술(IT)에 뛰어들게 된 것도 호기심이 원동력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강하고 과학에 대한 애착이 컸다. 초등학교 시절에 태엽시계 구조를 알아보겠다고 귀한 시계를 3개나 분해해 고장을 내기도 하고, 광석라디오를 만들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중학교 때 친구들과 나트륨을 담은 비커를 개울물에 담가 폭발시켜 여학생들을 놀라게 만드는 등 장난을 칠 때도 과학을 갖고 했다"며 "어릴 때부터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는데, 결국 이런 호기심이 지금까지 과학자의 길을 걷게 한 것 같다"며 웃음을 띠었다.

박 이사장은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화공학과로 유학을 갔는데 첫 학기에 들은 `화공학자를 위한 수학` 과목을 듣다가 공대 교수들을 위한 컴퓨터 강의가 개설된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듣게 된 것이 지금까지 IT 분야에 몸담게 된 계기라고 했다.

결국 1961년 메릴랜드주립대에 처음 들어온 컴퓨터실에서 거의 매일 밤을 지새우다시피하면서 컴퓨터에 빠져들어 결국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학교 전자계산학과 조교수로 부임하게 됐다. 이후 1973년 KAIST 초기 전산학과 설립을 돕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가톨릭대 전산학과 교수로 근무하다 중국 정부와 세계은행 초청으로 옌볜대에서 1개월간 컴퓨터 강의를 하던 중 북한 과학자들과 교류하게 됐고,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북한의 과학과 IT 분야 교류에 힘쓰고 있다. 그가 북한과 IT 교류에 관심을 갖는 것은 통일될 경우 남북한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IT와 기초과학 등을 통한 과학기술 교류 협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얼마 전 발생한 분산서비스거부(DDoS) 사이버 테러와 북한 IT 수준에 관해 질문을 던져봤다.

박 이사장은 "DDoS와 같은 사이버 테러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벌써 2~3년 전부터 나왔는데 이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 정부의 안이한 태도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며 "북한 배후설이 있었는데,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은 그만큼 북한의 해킹 수준이 세계적이란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IT와 인터넷 기술이 점점 발달할수록 보안 기술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북한은 IT 인프라스트럭처 등 전반적 수준은 떨어지지만 보안 기술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초과학 얘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그동안 국가나 국민이 과학기술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녔지만,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산업발전의 도구로 생각하다보니 기초과학 쪽을 완전히 등한시했기 때문에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초과학 육성 없이는 노벨상도, 경제발전도 없습니다. 그리고 노벨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수상자를 못 내는 이유 중 하나죠." 실제로 일본이 2000년대 초 노벨상 수상자를 대거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나라처럼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과학기술로 본 것뿐만 아니라 기초과학 쪽에도 꾸준히 지원했기 때문이다. 또 연구 실패를 용납하는 사회 분위기도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가속시킬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 이사장은 "연구에 있어 실패가 없이 성공만 있으면 그것은 연구가 아니다"며 "연구라는 것 자체가 리스크를 안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것일수록 성공하면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에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 분야에서 낙오자만 나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벨상은 받고 싶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며 "연구자가 연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것이지 상이 연구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 배출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갖고 있다. 많은 외국 과학자들이 우리나라 과학 수준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는 진단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강점을 보이는 BT(생명과학) 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이사장은 이제 막 출범한 연구재단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희를 넘긴 노신사는 연구재단이 세계 최고 연구지원기관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니 지켜봐 달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박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협동`과 윤리의식`을 특히 강조했다. 유교적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그래서 출범 1개월을 맞은 연구재단 운영과 연구비 배분에서도 박 이사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협동과 윤리의식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남을 넘어서지 않으면 내가 떨어진다는 입시지옥을 겪어서인지 이기주의가 너무 팽배해 있습니다. 예전에 포스텍에 있을 때 젊은 교수들이나 학생들을 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많았죠. 과학을 하는 사람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혼자만 연구하다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나게 됩니다. 연구자들이 전문성을 갖고 연구를 하되 혼자할 생각을 하지 말고 타인들과 협조해 연구를 했으면 합니다."

그는 미국 연구재단(NSF)을 비롯한 연구지원 기관들은 과학자들의 연구프로젝트가 아무리 좋더라도 인류복지에 해가 된다면 지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소개하며, 젊은 연구자들은 연구를 할 때 항상 그 연구가 국가와 인류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연구재단이 우리나라 학문 발전을 위한 진정한 지원기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5E원칙입니다. 탁월성(Excellence) 형평성(Equity) 효율성(Efficiency) 전문성(Expertise) 소통성(Exchange)을 말합니다. 연구자의 연구활동에 있어서 자율성을 최우선 덕목으로 삼고, 협력을 평가 기준으로 잡아 형평성을 갖고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는 또 최근 계속 나오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 "가장 근본적 원인은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부터 이공계 출신이 노력에 비해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패했기 때문"이라며 "이공계 기피현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지나친 우려나 호들갑은 피하면서 차분히 대응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1935년 충남 천안 출생
△1954년 경기고 졸업
△1958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69년 미국 메릴랜드대 공학박사
△1973년 KAIST 전자계산학과 교수
△1984년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
△1990년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2003년 포항공대 총장 △2008년 청와대 대통령실 대통령과학기술특별보좌관
△2005년~현재 평양과학기술대 공동 설립위원장
△2009년~현재 한국연구재단 초대 이사장

[대담 = 홍기영 과학기술부장 / 정리 = 유용하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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