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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휘 세채)찬 금흥군(휘 세교)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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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만춘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17 21:22 조회3,800회 댓글0건

본문

南溪集 文外集卷第十四

掌樂院僉正朴公(諱,世橋)墓誌銘                             朴世采


余惟早孤。與宗兄僉正公同堂居二十餘年。吉凶患難。蓋亡不相關也。顧時謂余曰。吾昆弟幸侍老母爲懽。然君齒少我。後必有思于今日。及公奉親諱。繼而不祿。諸子謁余以誌幽隧。乃謹掇書其略而歸之。公諱世橋字與乘。羅之潘南縣人。自先祖直提學諱尙衷。有名麗季。寔生平度公諱訔。事我太宗。致位公孤。再膺沙麓之祥。號爲大族。累世而至大司憲贈領議政諱應福。配貞敬夫人林氏。爲公曾祖考妣。右參贊封錦溪君諱東亮。配貞敬夫人閔氏。爲公祖考妣。錦陽尉諱瀰。配貞安翁主。爲公考妣。名德俱著。迺以萬曆辛亥十二月生。數歲上學。錦陽公方罹家難棲遑。手譯史書以貽。公能底于勤。文義貫洽。參贊公亟稱焉。長從畸菴鄭公質業。屢中解額。崇禎己卯登上庠。乙酉丁外艱。其始疾也。公身自扶護。間必迎醫。節其飮食藥物。治之萬方。卒無所驗。則刺指血以進。又購善木以葬。人服其孝。喪除除世子洗馬。序陞至衛率。移左水運判官。掌嶺湖轉漕。比輸太倉。吏多居間爲姦利。往往歸罪漕卒至死。公廉知其狀。立申戶部。得與倉官面授。姦弊遂絶。入拜刑曹佐郞。値按覆。務在亭當。但不可干以私。遷工曹。用與修宮闕勞陞。歷戶工二曹正郞,忠勳府都事。久之除掌樂院僉正。時孝祖將上壽東朝。例徵四方妓樂。屬本院肄習焉。朝中士大夫或從樂官留連。並被汙衊。獨公無所累。人益多之。戊戌出拜沃川郡守。其爲政勤明愼惠。處事區畫甚詳。猶日進吏民。詢其臧否。尤善體究兩造。盡得情僞。方伯李公慶億才之。輒歸之大獄訟。及經裁決。負者亦不冤也。士有兄弟爭財。公命先服蔑倫罪。痛加鐫諭。二人大悔。不復爭。濟以廉約。朝廷新行大同。量給月廩。公私支用。不敢絲毫踰法。別藏羨餘。洎所入金矢。以充民賦。歲饑留心賑恤。仍發富人粟。使老稚就糜。丁壯自力溝洫。終不失其業焉。故事貴主無得從養者。至公以唯一子。得旨赴郡。郡人謂必厚斂以致養也。後觀其供親。雖務極甘毳。而外無少煩撓。郡中皆驚。明年上禮陟。公自請奉慰箋。赴哭闕下。逮將解歸。士民乞留益力。尤菴宋公且貽書勉以終惠一邦。不能得。未幾遭內艱。居廬準禮。不以衰憊自恕。癸卯復拜工曹正郞。俄由軍器寺僉正移江華府經歷。竟以是年八月某甲疾卒。葬于蓮城先墓西南。初參贊公除遇宣廟。申結昏姻。而錦陽公又以文章大鳴。其視芬華聲利若赦屣也。公天性子諒狷介。旣習聞庭訓。晩事貞安。一以順適其心。未嘗廣田園營貨財。爲宮戚富厚習。惟卽展掃中路。構一亭于南湖。名曰望蓮。已喜其臨眺淸曠。時節奉板輿稱觴。極歡而罷。其遇宗黨。曲有恩義。不以疏賤間之。畸菴之喪。倡爲弔服。或有持異議者。不屑也。當自點秉國。爲孫求婚甚懇。公強辭焉。聞者色懾。又頗好善。素知閔斯文嶪賢。特加敬重。其在沃川。申公碩蕃亦寓比郡。待之有禮。郡之安邑里。卽趙文烈先生舊居也。愍其父子旌閭黝毀。募工改豎。院祠釋菜。必躬莅之無怠。偶見一飢民瀕死。約曰第至川谷間。相土可食者。當令具器資與爾。民如公旨。及秋大熟。沒身感戴。吏嘗竊白某山出銀。可聞于朝。公怒曰。吾豈以此而俑巨患邪。其濟民生塞利源類此。娶全義李氏。正郞碩基之女。婉順貞靜。女德殊異。甚得尊章意。貞安常曰此吾孝婦。公之居家莅官。蓋多內助力云。育七男四女。男泰斗,泰萬,泰成,泰華,泰韓,泰吉,泰發。女適縣監金萬增,趙持恒,生員尹世紀,安相眞。今距公沒已過一紀。而余獨踽踽人世。喪病嬰患。追念公語。如隔前晨。殆無以爲懷。悲夫。銘曰。

鬱彼西山。中谷窈然。公從先葬。旣孝且安。惟昔伯考。卜我元龜。
庶罔他艱。子孫倍之。栗芽鍾和。幽明一致。曷不于徵。勖哉後嗣。



남계집 문외집권제십사

장악원 첨정박공(휘,세교)묘지명                     박세채

나는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종형(宗兄)인 첨정공(僉正公)과 한집에서 20여년을 살았는대 길흉환난(吉凶患難)에 상관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때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兄弟)는 다행(多幸)히 노모(老母)를 모시는것이 즐거운데 네나이는 나보다 적으니 반드시 이 다음에 오늘을 생각할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公은 친상(親喪)을 당하고 이어서 작고(作故)하시니 여러 자제(子弟)가 내게 묘지(墓誌)를 부탁(付託)하기에 삼가 그의 대략(大畧)을 서술(敍述)하여 주는 바이다. 公의 휘(諱)는 세교(世橋)이고 자(字)는여승(輿乘)이며 나주(羅州)의 반남현인(潘南縣人)으로서 상조(上祖)인 직제학(直提學) 휘(諱)상충(尙衷)이 려말(麗末)에서 유명(有名)했음으로 부터서다 그의 아들인 평도공(平度公) 휘(諱)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섬겨서 왕위(王位)를 이루게 하셨는바 고(孤)에서 두 번이나 사록지상(沙麓之祥)『春秋時代에 사록산(沙麓山)이 무너지니 진리관(晋吏官)이 점(占)하되』 음(陰)이 양(陽)의 웅(雄)이 되고 土와 火가 서로 승(乘)했으니 후세(後世)에 왕후(王后)가 날 상서(祥瑞)라고 한데서 유래(由來)함)이 나타나서 대족(大族)이 된 것이다. 그 후 여러 대(代)만에 대사헌(大司憲) 증영의정(贈領議政) 휘(諱)응복(應福)과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선산임씨(善山林氏)에 이르니 公에게는 증조부모(曾祖父母)가 되고 우참찬(右參贊)인 금계군(錦溪君)으로 수봉된 휘(諱)동량(東亮)과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씨는 公에게 조부모(祖父母)가 되며 금양위(錦陽尉) 휘(諱)미(彌)와 배(配) 정안옹주(貞安翁主)는 公의 부모(父母)가 되니 명(名)과 덕(德)이 함께 드러났다. 公은 광해(光海3년) 신해(辛亥)(서기1611년) 12월에 출생(出生)하여 입학(入學)할때에 금양공(錦陽公)은 가난(家難)에 걸려서 방황(彷徨)했으나 손수 사서(史書)를 번역(飜譯)해서 公에게 주니 부지런하게 공부하여 문의(文義)가 형달(逈達)하므로 조부(祖父)께서 자주 칭찬(稱讚)하였다. 오래토록 기암 정홍명(畸菴 鄭弘溟)에 나아가 공부를 해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하여 인조(仁祖)기묘년(己卯年)에 진사(進士)로 태학(太學)에 입학(入學)하였다. 을유년(乙酉年)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는데 앞서 부친(父親)이 병환(病患)이 들었을때 의사(醫師)를 불러서 그의 음식(飮食)과 약물(藥物)을 쓰는 방법(方法)을 조절(調節)하여 치료(治療)하였으나 마침내 효과(効果)가 없으므로 손가락을 잘라서 수혈(輸血)을 하였다. 상고(喪故)를 당한 뒤에는 좋은 목관(木棺)을 사서 장사(葬事)를 하여 사람들은 그의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였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는 세자세마(世子洗馬)로 임명받고 순서대로 위율(衛率)로 승진(陞進)하여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으로 옮겨서 영남(嶺南) 호남(湖南)을 관장(管掌)하고 조비수(漕比輸)로 전임(傳任)을 하니 태창리(太倉吏)가 그곳에서 많은 부정(不正)한 이득를 취하고 그죄(罪)는 조졸(漕卒)에게 씌워서 죽게 하므로 公은 그의 실상(實狀)을 파헤쳐 호부(戶部)로 보고하고 창관(倉官)과 담판(談判)을 하여 악폐(惡弊)를 드디어 근절(根絶)시켰다.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면서 안찰(按察)을 하는대는 정당한 것만 힘을 쓰고 사정(私情)은 용인(容認)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서는 궁각(宮閣)을 수축(修築)한 공로(功勞)가 있어 호조,공조(戶曹,工曹)의 정랑(正郞)으로 승진(陞進)하였으며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로 오래 있다가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었다. 그때는 효종(孝宗)을 축수(祝壽)하려고 동궁(東宮)이 사방에서 기생과 악사(樂士)를 소집(召集)하여 본원(本院)에서 연습(練習)을 시켰는대 정부(政府)에 사대부(士大夫)가 혹은 악관(樂官)을 따라가 머물으면서 명예(名譽)를 더렵혔으나 유독 公만은 관련된 바가 없었으니 사람들은 더욱 장(壯)하다고 하였다. 무술년(戊戌年)에는 옥천군수(沃川郡守)로 나가서 행정(行政)에는 근명신혜(勤明愼惠)하고 처사(處事)에는 구획(區劃)이 심히 상밀(詳密)하며 날로 진보(進步)하여 이민(吏民)들이 그의 선부(善否)를 물으면 더욱 검찰(檢察)을 잘해서 그의 진위(眞僞)를 잘 파악했다는 것이다. 도백(道伯)인 이경억공(李慶億公) 재지(才之)가 별안간 큰 소송사건(訴訟事件)을 맡겨서 판결(判決)을 했는데 패한 자도 원망은 하지 않았다. 재물(財物)을 갖이고 다투는 선비 형제(兄弟)가 있어 公은 먼저 멸륜죄(蔑倫罪)를 적용해서 엄하게 재판(裁判)하고 타일느니 형제(兄弟)가 후회하여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 성격(性格)이 청렴(淸廉)하고 검약(儉約)하여 조정(朝廷)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새로 행할때 월급(月給)을 주고 공사(公私)로 지출하는데에는 조금도 법규(法規)에 어기는 일이 없이하여 여분(餘分)은 별도(別途)로 하여 들어온 금시(金矢)까지도 민부(民賦)로 충당(充當)하였다. 흉년(凶年)이 들면 진휼(賑恤)에 힘을 써서 부자(富者)에게는 곡물(穀物)을 내게하여 노유(老幼)들을 먹이고 장정(壯丁)들은 농사(農事)에 힘을 쓰게하여 끝내 그의 사업(事業)을 잃지 않게하였다. 그러므로 일은 주(主)를 중(重)히하고 종(從)해서 먹는자(者)는 없게 하였다. 公은 오직 독자(獨子)로서 군수(郡守)로 취임(就任)했는대 군인(郡人)들이 말하되 『반드시 착취(搾取)하여서 봉양(奉養)한다』고 하더니 뒤에 그의 봉친(奉親)함을 보니 비록 의식(衣食)을 잘받느느데 힘을 써도 남에게 조금도 폐(弊)를 끼치지 않으니 군중이 모두 놀랐던 것이다. 그 다음해 왕이 승하 (昇遐)하니 공이 스스로 청해서 위전(慰箋)을 받들고 대궐(大闕)에 가서 곡(哭)하고 돌아와서 사직(辭職)을 하려하니 사민(士民)들이 유임(留任)하기를 빌었고 우암송공(尤庵宋公)송시열[諱宋時烈]도 편지를 보내어 한고을에서 끝내 혜민(惠民)함에 힘쓰라고 권하여 그만 두지는 못하고 얼마 안돼서 모친상(母親喪)을 당함에 집상(執喪)을 하는데 예제(禮制)대로 진행하여 쇠곤(衰困)하다고 해서 자노(自怒)하지는 않았다. 계묘년(癸卯年)에 다시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왔다가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강화부경력(江華府經歷)으로 이임(移任)하였다. 마침내 그해 현종(顯宗)4년(1663년) 8월에 졸(卒)하여 련성(蓮城)의 선영서남(先塋西南)쪽에 장사(葬事)지냈다. 처음엔 조부(祖父)참찬공(參贊公)이 선조(宣祖)의 제우(除遇)를 받아서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부친(父親)금양공(錦陽公)은 또 문장(文章)으로서 크게 이름이 울렸으나 그의 호화(豪華)나 명리(名利)는 헌신짝 같이 여겼다. 公은 천성(天性)이 포용(包容)하고 개결(介潔)하며 또한 가정교훈(家庭敎訓)을 받아서 늦도록 모친(母親)인 정안옹주(貞安翁主)를 섬기기를 효순(孝順)으로 일관(一貫)하였다. 그의 마음은 일찍이 전원(田園)을 넓히고 재물(財物)을 늘니며 관척(官戚)을 위하고 부귀(富貴)를 익히는 일은 없었다. 오직 선영(先塋)에 가는 중로(中路)에 남호(南湖)에 한 정자(亭子)를 지어서 이름을 "망련(望蓮)"이라 하였으니 그의 조망(眺望)이 청광(淸曠)함을 즐겨한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수레를 타고와서 술잔을 나누고 즐기면서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의 종족(宗族)을 대우(待遇)하는대는 은의(恩義)가 관곡(款曲)하여 소원(疏遠)한 자와 미천(微賤)한 자를 차별하지 않았다. 기암공(畸菴公)정홍명[諱 鄭弘溟]의 상(喪)에는 조복(吊服)을 만들라 주창(主唱)하여 혹자(或者)가 이의(異議)를 가졌어도 상관하지 않았다.김자점(金自點)이 국권(國權)을 잡았을때 그의 손자(孫子)가 간곡(懇曲)하게 구혼(求婚)하였으나 公은 사절(謝絶)을 하니 듣는 자(者)가 모두 겁내는 기색(氣色)이었다. 또한 자못 선(善)을 좋아해서 민업현선생(閔嶪賢先生)을 알고나서는 특히 존경(尊敬)을 했고 옥천(沃川)에 있을때에는 신석번공(申碩蕃公)이 인군(隣郡)에 살아서 예경(禮敬)으로 대우(待遇)하였으며 군내(郡內)의 안읍리(安邑里)도 바로 조문열선생(趙文烈先生)[諱 趙憲]의 구거(舊居)인데 그 부자(父子)의 정려(旌閭)가 유훼(黝毀)되었음을 걱정하여 공인(工人)을 들여 다시 세우고 사원(祠院)의 제향(祭享)때는 반드시 참석(參席)하는데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연(偶然)히 한 기민(飢民)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말하되『이에서 천곡간(川谷間)으로 가면 곡식이 잘되는 토지(土地)가 있는데 농구(農具)를 모두 대줄것이니 농사(農事)를 지라고 약속(約束)을 함에』 그가 公이 시키는 대로해서 가을에 풍년(豊年)이 드니 그는 죽을 때까지 감사(感謝)하였다. 서리(胥吏)가 조용히 말하기를 『어느 산에 은(銀)이나니 이것을 정부(政府)에 말해달라』라고 한즉 公은 노(怒)하여『어찌 나를 이 때문에 큰걱정꺼리가 되게 하는가』라고 하였으니 그의 민생(民生)을 위하고 이원(利源)을 막는것이 이러했던 것이다. 부인(夫人)은 전의이씨(全義 李氏)로 정랑(正郞)인 석기(碩基)의 딸로서 온순(溫順)하고 정숙(靜淑)하며 부덕(婦德)이 특출(特出)하여 시부모(媤父母)의 뜻대로 해드리니 정안옹주(貞安翁主)는 이는 우리 효부(孝婦)라고 하였는데 公이 가정(家庭)에서나 조정(朝廷)의 일을 하는데는 대개 그의 내조(內助)가 많았던 것이다. 칠남사녀(七男四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두(泰斗) 태만(泰萬) 태성(泰成) 태화(泰華) 태한(泰韓) 태길(泰吉) 태발(泰發)이고 딸은 현감(縣監)인 김만증(金萬增) 조지항(趙持恒) 생원(生員)인 윤세기(尹世紀) 안상진(安相眞)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이제 公이 돌아가신지 10년(十年)이 지나니 나만홀로 외롭게 이세상에서 상병(傷病)을 겪는바 公의 말을 생각하니 어제 같으나 公은 모르니 슬프도다. 이에 명(銘)하노니

울창(鬱蒼)한 저서산(西山)은 중곡(中谷)이 고요한데
公의묘(墓) 선영(先塋)따라     효(孝)하고 안(安)하리다o
옛날에 백고(伯考)께선         나에게 모범(模範)되어
그같은 난관(難關)없이         자손(子孫)이 배(倍)되었다o
율아(栗芽)가 종화(種和)하여 유명(幽明)이 일치(一致)하니
어찌해 후사(後嗣)들을         힘쓰게 아니할까o



오창공[휘 동량]→금양위[휘 미]→금흥군[휘 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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