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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공행장역문[觀海公行狀譯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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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만춘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20 21:47 조회3,701회 댓글0건

본문

南溪先生朴文純公文外集卷第十六
    
行狀

養考秀士府君行蹟 甲辰三月二十一日 142_071d

公諱濰字仲涉。羅州潘南人。自號觀海。其先曰尙衷。以直道死高麗末。考諱東亮。際遇我宣廟。爲時名臣。官終右參贊。其世系行實。已具累世碑表中。公生有異質。風神秀朗。宇量弘遠。見者不啻若祥麟瑞鳳。甫齔已雋偉絶群。日誦數百千言。及十二三歲。而渾厚沈重。嶷然有老成大人之度。性氣忠信。智慮通明。行誼周愼。若其疾遽之色。鄙薄之辭。未嘗一見於外也。然而曰吾有一事。自忖仁恕之意太勝。剛斷之勇不足。蓋其所自點檢者如此。參贊公內外族黨盛大。及蚤通籍。交遊名德。卓然者甚衆。而稱公者其長老則曰斯人也若出。其必輔君澤民。有所爲於世矣。其兄弟通家儕友。更且歆尙推服。以爲一時儀表。而亡所慊於心者。當光海時。參贊公罹癸丑之禍。退居通津田舍。公卽從之受書。及至丁巳廢母。加罪七臣。而參贊公謫牙山。公在諸兄間。益自肆力典墳。爲文辭。日漸月長。踔厲橫逸。至不可涯涘。旁通祿命諸家。乃其志欲以功業自樹。經世濟物爲務。發慮制事。動出人意。然以時際昏亂。罟擭張拏。而意無所求衒裕如也。居數歲得侍參贊公復歸通津。悶世憂俗。間發諸諷詠。嘗過穆陵有詩曰。山上孤雲盡日橫。石羊無語鳥嚶嚶。臨風暗灑雙行淚。却怕旁人不放聲。此可見其志。時或出入都下。從北者金文忠公學。名聞日盛。癸亥仁祖改玉。參贊公復以無妄栫棘于康津。始伯兄錦陽公與聞靖社計。而幾事頗不審。公時年十八。心甚憂之。已而果以此重禍。亦由崔完城鳴吉所誤也。公遂言此事本末及所處是非不槪於義者甚晢。崔公爲之媿屈。乙丑遭內艱。公自未成童。流離瘴海。困頓湮鬱。旣失所恃。執喪誠孝。虛憊已甚。乃以明年六月一日卒于康津之寓舍。嗚呼痛哉。訃至。遠近聞之者莫不傷惜。以謂大廈之材。遽爲風霜所折也。公旣妙齡未立本朝。至於客死遐方。距今已忽四十年。同時親好皆不在。其志業行誼文章。實有不可得以追考者。獨幸略聞諸公所推論。其可擧者。從兄懦軒公曰。自喪仲涉。吾一門兄弟無人矣。白洲李公曰。當某業進時。其天才奇逸。夙成無敵。推此以往。雖古人如蘇子瞻諸公不難及也。林咸平洎豪宕不羈。少許可。一見公驩甚。便爲忘年友曰。如仲涉器量。今日雖直寘台鼎。無所異者。玄軒申相國聞公卒。謂公外舅玄谷趙公曰。朴君之沒。非特爲吾輩私痛。抑乃國家之無祿也。嗚呼。此可以觀公矣。世采竊聞古人黃叔度諸賢言行無所著。特以見者服深。遠祛疪吝。後之尙論者以爲去顏子不遠。其於公年纔半之。又不及四方名賢以相涵濡發揮。而其稱之之盛已如此。必有能權之者。嗚呼痛哉。公生萬曆丙午。卒以天啓丙寅。壽堇二十一。葬于坡州長嶺山壬向之原。聘漢陽趙氏。不育。參贊公命取仲兄中峯公次子爲後。後以本家無嗣。亦不成初計也。嗚呼痛哉。世采尙忍言之哉。有放軼遺稿數十篇藏于家。








관해공 행장 (觀海公 行狀)

公의 휘(諱)는 유(濰)요 자(字)는 중섭(仲涉)이며 나주(羅州)의 반남인(潘南人)으로서 자호(自號)는 관해(觀海)다.
그의 선조(宣祖)는 상충(尙衷)이라 하는데 고려말(高麗末)에 직도(直道)로서 사거(死去)하였다.
고(考)의 휘(諱)는 동량(東亮)이니 우리 선조조(宣祖朝)를만나 당시의 명신(名臣)인데 관(官)은 참찬(參贊)으로 그의 세계(世系)와 행실(行實)은 이미 루세(累世)의 묘비(墓碑)와 묘표(墓表)에 다 있는것이다.
公은 날때부터 이질(異質)이 있어서 풍신(風神)이 수랑(秀朗)이하고 기량(器量)이 홍원(弘遠)하여 보는 이는 상린(祥麟) 서봉(瑞鳳)처럼 알 뿐만 아니었다.
겨우 7~8세에 이미 위용(偉容)이 특출(特出)하였는데 매일 수백천언(數百千言)을 외우고 12~13세때에 이르러서는 혼후(渾厚)하고 침중(沈重)해서 높게 노성(老成)한 대인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성정(性情)은 충신(忠信)하고 지혜는 통명(通明)하여 행동은 의롭고 항상 삼가해서 경동(輕動)하는 기색이나 천박한 언사는 한번도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되 『나는 일사(一事)를 스스로 촌도(忖度)하는 바가 있으니 인서(仁恕)하는 의사가 대승해서 강단(剛斷)하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 자신을 점검한 바가 이러했던 것이다. 참찬공(參贊公)의 내외족당(內外族黨)은 성다(盛多)하여 일찍 사적(仕籍)에 통하여 명덕(明德)이 탁연(卓然)한 자와 교제하는 이가 심(甚)히 많았는데 公을 칭도하는 자중 노장(老長)은 말하되『이 사람이 만약에 인군(人君)을 도우고 인민(人民)을 위하는 위에 나간다면 세상에 유익(有益)이 될 것이다.』고 하였고 그의 형제와 통가(通家)의 제배(儕輩)들은 모두 흠상(欽尙)하여 추복(推服)해서 당시의 의표가 되었으니 마음에 꺼리낌은 없었던 것이다. 광해군(光海君)때에 참찬공(參贊公)이 계축년(癸丑年)의 화(禍)를 당하여 통진(通津)의 전사(田舍)로 퇴거(退去)하니 公도 따라가서 수학(受學)하였는데 정사년(丁巳年) 폐모시(廢母時)에 이르러서 칠신(七臣)에 가죄(加罪)하여 참찬공(參贊公)이 아산(牙山)으로 유형(流刑)을 가고 公은 여러 형(兄)사이에서 더욱 문적(文籍)에 힘을 써서 문사(文辭)가 일취월장(日就月長)하여 발전하는 기상은 제한이 없었다.
널리 녹명(祿命)의 제가(諸家)에도 통해서 그의 뜻은 스스로 공업(功業)을 세워서 경세제물(經世濟物)을 하는데 힘을 쓰려하여 지혜를 내어 사행(事行)을 하는데는 동함이 인의(人意)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시기가 혼란해서 어디나 위험(危險)이 있으니 현(衒)을 제하는 바가 없이 뜻은 여유가 있었다. 그 수년을 지나 참찬공(參贊公)을 모시게 하여 다시 통진(通津)으로 돌아가서 세속(世俗)을 우민(憂悶)하는 심회(心懷)를 시가(詩歌)로서 발표하였는데 일찌기 목릉(穆陵)[아버지 오창공(梧窓公)께서 3년간 수릉관(守陵官)을 지낸 선조(宣祖)의 능(陵) ]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산상(山上)에는 하루종일 고운(孤雲)이 걸려있고
석양(石羊)은 말없는데 새들만이 노래한다o
바람맞아 남모르게 쌍(雙)눈물 흘리오나
문득방인(旁人) 겁내어서 방성(放聲)치는 못하노라.

고 했으니 이에서 가히 그 뜻을 볼 것이다. 때로는 혹시 도하(都下)에 출입하면서 북자 김문충공(北者 金文忠公)[김상용(金尙容)]에게 종학(從學)해서 명성이 날로 성하였다. 계해년(癸亥年)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니 참찬공(參贊公)이 다시 죄없이 강진(康津)에 유배(流配)되었는데 비로소 백형(伯兄) 금양공(錦陽公)이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될 것이나 그 일이 불심(不審)되었다. 그때 公의 나이는 18세였으나 마음으로 심히 근심하더니 과연 그 때문에 중화(重禍)를 당했으나 그것은 완성군 최명길(完城君 崔鳴吉)의 잘못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公이 드디어 이 일의 본말(本末) 소처(所處)한 시비(是非)가 의리(義理)에 관계(關係)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 심(甚)히 밝으니 최공(崔公)이 부끄러워 굴복(屈服)하였다. 을축년(乙丑年)에 내간(內艱)을 당하니, 公은 성동(成童)도 되기 전부터 장해(瘴海)에 유리(流離)하여 곤난하고 억울하였는데 모친(母親)을 여의고는 성의로 집상(執喪)하다가 허비(虛憊)가 너무 심해서 그 명년 유월 일일에 강진만사(康津寓舍)에서 서거(逝去)하니 아아! 애석하도다. 부음이 듣기자 원근(遠近)사람들은 모두 애석해서 말하되『대하(大廈)의 재목이 드디더 풍상(風霜)으로 꺽어졌다.』고 하였다. 公은 이미 묘령(妙齡)으로 본조(本朝)에 서보지도 못하고 먼곳에서 객사(客死)한 지가 거금(距今) 사십년(四十年)이 되니 그때 친우들은 모두 잊지아니하여 그의 지업(志業)과 행의(行誼)와 문장은 실로 추고(追考)할 수 없는 것이나 오직 다행히 제공(諸公)의 추론(推論)한 바를 대강 듣고 그 가거(可擧)할 만한 것을 말하면 종형(從兄) 나헌공(懦軒公)[황(潢)]이 『중섭(仲涉)을 잃은 후로는 우리 일문(一門)의 형제에 사람이 없다.』고 하였고 백주이공(白洲李公)[이명한(李明漢)]이 『모의 학업이 전전(前進)할 때는 그 천재(天才)가 기이함이 숙성(夙成)해서 무적(無敵)하여 그로 미루어보면 비록 고인(故人) 소자첨(蘇子瞻)같은 제공(諸公)도 미치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함평임백(咸平林洎)은 호탕(豪宕)하고 불기(不羈)해서 인정한 자가 적었으나 한번 公을 보고는 심히 즐겨해서 문득 망년(忘年)하는 친우가 되어 말하되 “중섭(仲涉)같은 기량은 금일에 바로 고관(高官)을 맡겨도 틀릴 바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으며 현헌신상국(玄軒申相國)[신흠(申欽)]은 공의 부음(訃音)을 듣고 公의 장인 현곡조공(玄谷趙公)[조위한(趙緯韓)]에게 말하되 『박군의 죽음은 비단 우리들의 사통(私痛)만이 아니라 이것은 국가에 복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슬프도다. 이에서 가히 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들으니 고인(故人) 황숙도(黃叔度)[후한(後漢)의 황헌(黃憲)의 자(字)니 순숙(荀淑)의 인정(認定)을 받고 효렴(孝廉)의 인물로서 천거되었으나 등용되기 전에 사십팔세로서 서거(逝去)한 자]를 제현(諸賢)이 언행을 저술한 바는 없으나 특히 급견(及見)한 자는 심원(深遠)함을 탄복(歎服)하여 하자(瑕疵)와 비린(鄙吝)을 제거(除去)하였고 후세에서 논평(論評)하는 자는 안자(顔子)에 가기가 멀지 않다고 하였는데 公은 나이 겨우 반(半)이며 사방의 명현(名賢)이 서로 함유(涵濡)하고 발휘함은 불급(不及)하여도 그 칭도(稱道)의 성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능히 정평(正評)을 한 자가 있는 것이다.
아아! 애통(哀痛)하도다! 公은 선조(宣祖)삼십구년 丙午(서기1606)에 생(生)하여 인조(仁祖)사년 (서기1626)에 졸(卒)하였으니 나이 겨우 이십일세(歲)로서 파주(坡州)의 장령산( 長嶺山)임좌의 원(原)에 장사(葬事)하였다. 한양조씨(漢陽趙氏)를 취하였으나 무자(無子)하여 참찬공(參贊公)이 명(名)해서 중형(仲兄) 중봉공(中峯公)[의(漪)]의 차자(次子)[諱 世采]를 입후(入后)시켰는데 그 후(後)에 본가(本家)의 兄[諱 世來]가 죽어 파양[罷養]하여 초계(初計)를 이루지 못하니 절손(絶孫)되었다.
아아! 애통(哀痛)하도다. 내 어찌 참아 말할가. 산질(散秩)된 유고(遺稿) 수십편(數十篇)이 본가(本家)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참찬공(參贊公)=오창공(梧窓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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