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09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08

자유게시판

반남박씨 호당록

페이지 정보

no_profile 승모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0-10 15:39 조회3,973회 댓글0건

본문

<퍼가기 금지>
독서당(讀書堂) (자료출처: 조선왕조실록 및 민족문화대백과. 내용은 약간 편집 정리함)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로 흔히 호당(湖堂)이라고 부른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신(文臣)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사가독서 賜暇讀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장소. 간혹 40세(歲)가 넘어서 선발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다.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대제학(大提學)(문형 文衡)이 될 수 있도록 제도화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독서당을 거쳤다고 해서 모두가 양관(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및 지성균관사 知成均館事)을 겸임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대제학이라고 해서 모두가 한 결 같이 독서당을 거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래와 변천사

1. 1426년(세종 8년) 12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최초로 실시함. 장소는 자택(自宅). 자택에서의 사가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

2. 1442년(세종 24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6인을 선정하여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함.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 함. (절에 올라가 묵으면서 독서한다는 뜻).

3. 1451년(문종 1년), 1453년(단종 1년): 상사독서 실시.

4. 세조: 집현전 혁파와 더불어 사가독서제 폐지됨.

5. 1476년(성종 7년), 1486년(성종 17년): 사가독서제 부활 실시. 상사독서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국책에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음.

6. 1492년(성종 23년): 서거정(徐居正)의 주청에 따라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만들기로 하여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함. 그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뒷쪽 언덕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이 절을 20칸 정도로 확장하였다고 함.

7. 1495년(연산군 1년)부터 1498년(연산군 4년)까지: 매년 5, 6명이 남호독서당에서 독서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됨.

8. 1507년(중종 2년):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인재양성과 문풍 진작을 위하여 독서 장려책을 적극 실시하여 독서당제도를 부활시킴.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음.

9. 1517년(중종 12년):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에 따라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함.

10. 이후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함.

11.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제학 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여 우선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음.

12. 인조반정(1623년) 후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1624년: 인조 2년),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 등으로 인하여 사가독서제도가 정지됨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됨.

13.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때에도 독서당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는 있으나 재건에 관해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음.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이 세워짐에 따라서 그 기능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독서당은 관공서의 성격보다는 연구기관으로서 학문적 기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으며,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었다.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와 우대는 지극하였다. 독서당에는 언제나 궁중음식 전담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임금이 명마(名馬)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 및 안장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 운영은 국비로 하되 왕들의 특별 배려에 의한 하사품이 운영의 보조구실을 하였다. 전성기에는 12인을 뽑아 일ㆍ숙직을 교대로 하게 하였으며, 대제학이 날마다 제술(製述)을 맡겨 매월 세 차례의 등급을 매겼다.

독서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사가(賜暇) 인원을 줄이고 규정을 엄격히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는 1515년(중종 10년) 5월에 사가독서원(賜暇讀書員)으로 김안국(金安國) 등 16인을 선발하였으나 엄격히 재심한 결과 7인만이 최종적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독서당 원수(員數)는 1426년(세종 8년)부터 1773년(영조 49년)까지 350여 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매차별 인원수로는 가장 적었을 때인 1585년(선조 18년)에 1인, 가장 많을 때인 1517년(중종12년)과 1608년(선조 41년)에는 12인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6인 내외를 선발하였다.

반남박씨 사가독서자(호당록) (출처: 조선왕조실록 및 典故大方 湖堂錄)

총 5인
1. 박승임(朴承任): 1544년(중종 39년) 대제학(大提學) 성세창(成世昌) 선(選).
2. 박응남(朴應男): 1556년(명종 11년) 대제학 정사룡(鄭士龍) 선.
3. 박의(朴漪): 1629년(인조 7년) 5월 13일 대제학 장유(張維) 선.
4. 박태보(朴泰輔): 1682년(숙종 8년) 5월 2일 대제학 이민서(李敏叙) 선.
5. 박상갑/종갑(朴相甲/宗甲): 1773년(영조 49년) 4월 17일 대제학 이복원(李福源) 선.

참고:

1. 박의, 박태보, 박상[종]갑의 경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음.

2. 대종중에서 발간한 ≪반남박씨편람(潘南朴氏便覽)≫ 18쪽에 문효공 만휴당 휘 태상(泰尙)이 호당에 선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근거 자료가 발견되지 않음.

3. 또한 ≪반남박씨편람(潘南朴氏便覽)≫ 19쪽에 문익공 환재 휘 규수(珪壽)도 호당에 선발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실수로 판단됨. 정조(正祖) 이후 호당 선발은 없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억측으로 보임. 조선시대에 양관(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고 해서 무조건 모두가 호당에 선발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임.

4. 다음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왕조실록의 흥미로운(?) 기록.

明宗 20年(1565년) 2月 24日 기사: 양화당에서 입시한 사람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이다.

○辛卯/上御養和堂後庭。 命洪暹、尹春年、朴忠元、李洪男、尹殷中、洪天民、朴應男、姜士弼、李陽元、丁允禧、崔顒、柳琠、沈義謙、辛應時、奇大升、李山海,【丁允禧以下 皆被選於書堂賜暇者也。】入侍。 承旨朴啓賢、柳順善、黃瑞、洪仁慶、任呂, 竝入侍。 上以御筆, 書下七言律、五言律題, 各二。 【七言律: “人主愛忠臣詠寒食。” 五言律: “遠峀帶春輝, 春入鳥能言。”】于洪暹、尹春年、朴忠元曰 ..... (이하생략).

상(上: 임금)이 양화당(養和堂) 후정(後庭)에 나아가, 홍섬(洪暹)ㆍ윤춘년(尹春年)ㆍ박충원(朴忠元)ㆍ이홍남(李洪男)ㆍ윤의중(尹毅中)ㆍ홍천민(洪天民)ㆍ박응남(朴應男)ㆍ강사필(姜士弼)ㆍ이양원(李陽元)ㆍ정윤희(丁胤禧)ㆍ최옹(崔顒)ㆍ유전(柳琠)ㆍ심의겸(沈義謙)ㆍ신응시(辛應時)ㆍ기대승(奇大升)ㆍ이산해(李山海) 등【정윤희 이하는, 모두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 독서(賜暇讀書)한 사람이다.】을 명하여 입시하게 하였는데, 승지 박계현(朴啓賢)·유순선(柳順善)·황서(黃瑞)·홍인경(洪仁慶)·임여(任呂)가 모두 입시하였다. 상이 어필(御筆)로 칠언 율시(七言律詩)와 오언 율시(五言律詩)의 제목 각 2수【칠언 율시는 ‘임금이 충신을 사랑하다 [人主愛忠臣]’, ‘한식을 읊다[詠寒食]’이고, 오언 율시는 ‘먼 산봉우리가 봄빛을 띠었다.[遠峀帶春輝]’, ‘봄이 드니 새가 지저귄다[春入鳥能言]’이다.】를 홍섬ㆍ윤춘년ㆍ박충원에게 써서 내리며 이르기를, ..... (이하생략).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부분은 바로 【 】속에 있는 “丁允禧以下 ..... 정윤희 이하 .....”라는 표현이다. 그 표현이 거기에 왜 들어가 있을까? 그리고 그 뜻은 과연 무엇일까?
<퍼가기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