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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1-27 16:01 조회4,327회 댓글0건

본문

좋은 자료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문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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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호장공(戶長公) 출생(出生)
> 1206년(고려 熙宗 1205-1211) 경으로 추정
> 근거; 4세 이신 밀직공 수(秀)자 할아버지가 작성하신 계축호적(癸丑戶籍)
> 에 의거해서 추정
> 밀지공(휘 수) 출생 ; 1296년(계축호적 기록)
> 밀지공 父(증참의공 휘 윤무) 출생 추정년대 1266년
> 밀지공 祖(급제공    휘 의) 출생 추정년대 1236년
> 밀직공 증조부(호장공 휘 응주)출생 추정년대 1206년
> ※ 1세대 출생을 30년으로 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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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1: 1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는 애매한 방법으로 "추정 연도"를 단단위까지
세밀하게 표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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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 1
1세대를 30년으로 추정한것은 애매한 추정방법이지만
윗 어른들께서 이러한 방법을 썻기에 답습하였습니다
윗 어른들게 미루는 것은 치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200년대 초라고 포괄적으로 하기도 애매하고, 1250년대라고 하기는 너무 비과학적이고, 기록이 없다고 모르는척 하기도 힘들어 이러한 방법을 쓴것입니다.
이러한 추정방법이 너무 비과학적이고 비역사적인 일이라면 출생년대를 쓰는것을 자제해야 될것 같습니다.

더 좋은 추정방법이나, 과학적, 역사적인 방법이 있으면 알려 주시고
좋은 안이 있으면 종중에서 타당성을 고려해서 쓴는것이 좋으리라 생각되니
좋은 안을 제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 진사공휘윤무사적(進士公諱允茂事蹟)
> 휘(諱)는 윤무(允茂)이고 자(字)는 순유(諄誘)이며 진사(進士)로서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이다. 본조에서 이조참의로 증직되었으며 배(配)는 화순오씨(和順吳氏)로 전중내급사 동정(殿中內給事同正) 순(順)의 딸이다. 공의 묘는 호장공(戶長公)의 묘 뒤 묘좌(卯坐)의 언덕에 있고 표석이 있었으니 바로 증손인 평도공(平度公) 은(訔)이 세운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희미해져서 기축년에 14세손 필명(弼明)이 새로 묘표를 세우고 옛 표석은 바깥 쪽 계단 서쪽에 묻었다. 임오년에는 16세손 도원(道源)이 상석과 망주석을 다시 배열하였다.
> ※ 1986년 24세손 직장공파 승조(勝祚)가 진사공위 단을 봉설하였다.
> 호장공위 상석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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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2:"순유(諄誘)"가 진사공의 자(字)라고 하였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요? 세보에는 그냥 "순유진사(諄誘進士)"라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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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2
순유(諄誘)"가 진사공의 자(字)라고 하였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요?

세적편 20쪽에 “휘(諱)는 윤무(允茂)이고 자(字)는 순유(諄誘)이며 진사(進士)로서 양온령동정이오” 로 번역(飜譯)되어있습니다.

족보기록을 보면
임오보 “子 允茂
         進士良醞令同正”
계해보 “子 允茂
         諄誘進士良醞令同正 ”
‘순유진사’라는 단어는 계해보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유진사를 한 단어로 보아야 할지
순유와 진사를 따로 따로 보아야 할찌는 확답을 드릴수 없네요
순유진사라는 벼슬이 고려조에 있었는지 확인된것이 없고 참으로 애매합니다.

세적편을 만들당시 번역한 분들은 순유진사를 따로 따로 하여 순유를 자로 보고 진사는 벼슬로 처리했고    경신보의 세적편은은 번역이 힘들게 되어있어 이번에 새로 족보를 만들면서 새로히 번역을 의뢰 했는데 새로히 번역을 하시분들도 자와 벼슬로 구분을 했습니다.
번역을 하신분들의 번역이 꼭 옳다고 볼수는 없으나 번역이 잘못됬다고 할수있는 자료도 없습니다.

종원님의 좋으신 지적데로 ‘순유진사’ 로 기록하는 방안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3.
> 밀직공계축호적(密直公癸丑戶籍)
> 전의(典議) 홍무(洪武) 6년, 공민왕 22년 계축년(1347) 12월 일 북부상(北部上) 오관산(五冠山) 삼리(三里) 임자년 호구준(戶口準)
>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 박수(朴秀) 나이 78세. 본(本)은 반남(潘南).
> 아버지는 진사(進士) 양온령 동정(良醞令同正) 윤무(允茂)
> 조부는 급제(及第) 의(宜)
> 증조부는 호장(戶長) 응주(應珠)
> 외조부는 전중내급사 동정(殿中內給事同正) 오순공(吳順公). 본은 화순.(和順)
> 처는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김씨(金氏). 본은 광주(光州).
> 장인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 정(晶).
> 처 조부는 산원 동정(散員同正) 종(宗).
> 처 증조부는 대상(大相) 립(立).
> 처 외조부는 급제(及第) 홍석구(洪錫九) 본은 남양.(南陽)
> 장남 상충(尙衷)은 나이 42세. 계사년에 을과(乙科)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 직책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지제교 겸 성균직강(奉常大夫 典理摠郎 知製敎 兼 成均直講).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딸에게 장가감.
> 장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남편은 중현대부 지정선군사(中顯大夫知旌善郡事) 안길상(安吉常). 본은 광주(廣州), 갑신년에 을과 제이명으로 급제.
> 차남 상진(尙眞)은 나이 35세. 경자년에 진사, 을사년에 을과 제삼명(第三名)으로 급제. 직책은 통정랑 기거사인 지제교 겸 성균박사(通直郎 起居舍人 知製敎 兼 成均博士)
> 삼남 상궐[尙蕨 ; 궐(蕨)은 경(褧)으로 개명]. 나이 28세 사온직장.(司醞直長)
> 차녀는 반남군부인(潘南郡夫人) 박씨(朴氏). 나이 19세 남편은 선덕랑 장흥고사 겸 성균학유(宣德郎 長興庫事 兼 成均學諭) 유백유(柳伯濡). 본은 서천(瑞川). 기유년 을과 제일명(第一名)으로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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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3: 밀직공의 삼남 사온직장공의 초명이 "상궐(尙蕨)"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상견(尙繭)"의 잘못이 아닌지요? 繭(누에고치 견). 그리고 세보에 보면, "家乘公初名季尙亦麗朝文科"라고 하여 직장공의 초명이 "계상(季尙)"이었고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고려등과록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가승(家乘)"의 근거는 무엇인지요? 누가 언제 기록한 것이며 현재 그 "가승"이 보관되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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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3
삼남 상궐은 상견의 오자입니다. 죄송합니다.
기록된 ‘가승’의 근거는 찾지못했고
‘가승’은 어느분이 소장하고 있는지 확인이 안되있고 종중에도 없습니다


4.
> 살피컨대 종손의 관리인 집에는 평도공(平度公) 부인 주씨(周氏)가 관청에 낸 소장 초본이 있었는데 그 대의는 이렇다. 성 아래 중량포(中良浦)는 바로 남편이 조부를 안장한 곳으로서 남편이 바로 제사를 주관하는 장손이다. 그러므로 이 묘역 골짜기 근처 40결도 공신의 예에 따라 하사 받은 땅으로 농막을 지어 지키는 이를 배치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 동성 사촌 아우인 전현감(前縣監) 여해(汝諧)가 지난 을사년 봄에 그의 어머니를 묘역 끝에 장사지내고 금년 2월에 또 이미 30여 년 전에 장사지냈던 아버지를 모셔다 합장하고서 재실을 남편 묘 왼쪽에 지었다고 운운하였으니 바로 세종 병오년 9월이다(세종8년1426). 이로써 살펴보면 밀직공(密直公) 묘는 애초에 평도공 묘와 같이 중량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 병진년(연산2년 1596)에 이곳을 회릉(懷陵)으로 썼기 때문에 평도공은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밀직공도 반드시 같이 옮겼을 것이나 실전되어 지금은 소재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후손들이 애통해 마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로 말미암아 찾을 수 있다고 하기에 이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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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4: 위의 기록에 "전현감(前縣監) 여해(汝諧)"라고 하였는데, 세보(족보)에는 형이신 여위(汝爲)가 "현감"이고 아우이신 여해는 "감찰(監察)"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기록이 옳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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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3
위의 기록은 계축호적 기록에 있는 내용입니다.
평도공 부인 주씨 할머니가 관청에 낸 소장 초본이기에 이 기록이 더 확실하다고 보는것이 좋지 않을까요.

※ 좋은 질문을 하신 종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워낙 자료가 부실하여 정확한 답변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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