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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김포,합천 묘역 선조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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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1-27 17:11 조회5,599회 댓글0건

본문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 참판공 묘역


7세 휘 박규(朴葵) 參判公 (1400--1437)(정종2--세종19)

가승 云(이르다) 경진생(1400년)
配: 원주변씨
좌의정 평도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25 (세종7) 判通禮門事 판통례문사
1426 (世宗8) 刑曹參議 형조참의
1427 (世宗9) 戶曹參議 호조참의
1428 (世宗10) 吏曹參議 이조참의
1429 (世宗11) 黃海道觀察使 황해도 관찰사
     11월5일 禮曹參判 예조참의(가선대부; 종2품 정부인)
1430 (世宗12) 右軍 同知 摠制 우군동지총제
             戶曹參判 호조참판
             刑曹參判 형조참판
1431(世宗13) 평안감사
1435(世宗17) 경상도 觀察使 관찰사    병(病)으로 사직
1436(세종 18) 경상도 관찰사로 치사했다 그뒤의 사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437(世宗19) 1437년 4월 12일 卒(조선왕조시록 수록)


참판공 자녀는 4남 5녀

                     葵규(參判公) 1400~1437)    
秉文 閔磊     秉鈞     禹晟    秉中     林自蕃    최연명 秉德    許蘅
(司直公)        (판관공)        (호군공) 전라절도사        (군수공)
                                         (靖難功臣)


참판공규묘표(參判公葵墓表)
박태보(朴泰補)
나는 정묘년 겨울에 임금의 은혜를 입고 이 고을 목사로 나와 비로소 고을 북쪽 적곤리(赤昆里)에서 공의 묘를 참배하였다. 비석에 새긴 글씨가 닳고 이지러진 것을 탄식하고는 종손 신계현령(新溪縣令) 지상(之相)과 다른 비석으로 바꾸기를 도모한 뒤 삼가 그 뒷면에 새길 글을 쓴다.
공의 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여기에 그치고, 또 정안(政案)이 있다고 하나 대개 후인이 일기를 가져다가 만든 것이니 그 통례이전(通禮以前)과 영남이후(嶺南以後)는 모두 증명할 수 없다.
옛 묘표의 기록에는 장례일이 갑술년 3월이라고 했으나 집에서 전하는 바를 살펴보면 공의 기일은 4월에 있으니 여기에 근거하면 갑술년은 분명 졸년(卒年)이 아니다. 또 일기는 병진년에 병으로 영남관찰사를 사직하였다는 진술에 그쳤는데 옛 묘표에는 바로 이 관직까지 기술하였으니 어찌 공이 영남으로부터 사직하고 돌아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자 이 언덕이 실로 장사 지낸 땅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장례는 대사인데 전수되지 못해 자세히 알 수 없다. 아아, 애통하도다.
부인은 원주(原州) 변씨(邊氏)니, 판사(判事) 현(顯)의 딸이며 고려 영삼사사(領三司事) 안렬(安烈)의 손녀로 기묘년 9월에 공의 묘 아래 부장하였다. 아들 병문(秉文)은 사직(司直)이고 병구(秉鉤)는 판관(判官)이며 병덕(秉德)은 군수요 병중(秉中)은 대호군(大護軍)이다. 사위 민뢰(閔磊)은 주부(主簿)고 우성(禹晟)은 군수며 임자번(林自蕃)은 양양군(襄陽君)이요 최연명(崔延命)은 군수며 허형(許蘅)은 전부(典簿)이다. 내외후손에 현달한 이가 끊이지 않으니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졸헌공 묘역



12 휘 박응복(朴應福)     1530(중종 25)~1598(선조 31).


공의 휘(諱)는 應福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 사간(司諫) 소(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사부(士俯)의 딸이다.
박씨(朴氏)는 나주(羅州)에서 나온 우리나라의 큰 가문으로서 이름과 행실이 그 가문에 대대로 전한다. 고려 말에는 우문각직제학(右文閣直提學) 반남(潘南) 선생 상충(尙衷)이 계셨는데, 스승의 도리를 지녔으며 강직한 절개가 있었다. 본조에서는 좌의정(左議政) 면천부원군(綿川府院君) 은(訔)이 계셨는데 태종 임금의 보살핌을 받아 영달하였다. 공의 증조부·고조부·고고조부의 3대는 중형(仲兄)인 국구(國舅)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의 덕으로 사후(死後)에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첨추(僉樞) 임종(林宗)에게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에게는 좌찬성(左贊成), 사간(司諫) 소(紹)에게는 영의정이 각각 추증되었다. 찬성공(贊成公)은 천성이 강직하여 젊은 시절에 상대한 분이 오직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가 미쳤을 때, 구차하게 피하려 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에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의정공(議政公)은 안팎으로 순박하여 보는 이들은 그의 상서로움을 알았다. 어려서 독서하고 도를 구할 때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나아갔었는데, 벗으로만 여기고 감히 스승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 후에 대과(大科)에 장원을 하였는데, 당시 인조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이끌어 함께 관료로 나아갔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대해 징계하지 않자 성리학을 진강(進講)하며 김안로(金安魯)를 다시 써서는 안 된다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러다 마침내 간당(奸黨)의 배척을 받고 영남의 외가로 돌아가 생을 마쳤으니 향년 42세였다. 아내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南陽) 홍씨(洪氏)로 시정(寺正) 사부(士俯)의 따님이고 대사헌(大司憲) 여(與)의 손녀이다.

공은 문강공이 영남으로 옮기던 해에 태어났다. 중종 25년 (1530년)이었다.
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여의고 (1534년)
7세(1536년)에 어머니를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훌륭한 스승을 구하여 가르쳤으니 세상에서는 맹자(孟子)의 어머니에 비교하였다.
공은 그때부터 사문(斯門)의 유조순(柳祖詢)에게 학문을 배웠다. 종일토록 어머니 곁에서 글을 읽으니 어머니가 좋아하였다.
만년에는 매번 손자들을 경계할 때 이 일을 들어 말씀하였다.
백형(伯兄) 응천(應川)이 여러 아우들을 엄하게 다스렸으니, 아우들은 백형을 부친처럼 섬겼다. 공은 더욱 그 뜻을 지켜 어기는 것이 없었고 고관이 되어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과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로부터 배웠으나 결국에는 이중호에게 귀착하였다.

약관(弱冠)이 되어 기유년(154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갑자년(1564)에 급제하였는데,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저작(著作)이 되었고,
선조4 (1572) 박응복(朴應福)을 지평에 제수하였다.
선조6 01/01 박응복(朴應福)을 헌납으로 장령(掌令)으로

선조 10년() 정축년(1577)에 집의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선조 11년(157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했다. 어머니는 80의 나이로 영화와 봉양을 모두 누렸다. 공은 억지로 효도를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즐거운 낯으로 기쁘게 받들었었다. 공은 모친상을 당해 슬픔이 극심하였는데 몸이 쇠약해져 이전의 상처럼 할 수 없었으나 똑같이 돈독한 마음으로 추모하여

선조19 (1586) 박응복(朴應福)을 우승지(右承旨)로
    20 11/1 박응복(朴應福)을 좌승지로 삼았다.
    21 1/14 박응복(朴應福)을 병조 참지로
    
선조22(1589)에는 특별히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선조25년 (1592)에 왜구가 침입했는데 공은 예조참판으로서 부총관(副總管)을 겸해 임금을         호위하여 따랐는데,
아들인 동량(東亮)도 병조좌랑으로서 함께 하였다.

선조 26 3/18 박응복(朴應福)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20 박응복(朴應福)을 공조 참판으로
        3/27 박응복(朴應福)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4/07 박응복(朴應福)을 공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6/07 박응복(朴應福)을 겸 동지의금(兼同知義禁)으로
        7/07 박응복(朴應福)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28 2/26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응복(朴應福)
    29 6/03 형조 참판 박응복(朴應福)
    29 12/27 박응복(朴應福)을 공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가서 .

선조31년(1598) 7월에 병으로 인해 수안에서 세상을 떴으니 향년 69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은 조회를 중지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치르게 했다.
중전께서도 은혜를 보태어 8월에 상여에 실려 돌아왔고, 양주(楊州) 금촌(金村)의 선부인 묘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증 영의정 보조공신 반천부원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선산(善山) 임씨(林氏)로 별좌(別坐) 임구령(林九齡)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공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충실하고 고요했으며, 일을 대해서는 신중했고 사물을 대해서는 너그러웠으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었고 동료들은 공경하고 아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는 그의 의리에 감동하였고, 하인과 같은 천한 이들은 그의 어진 사랑을 존경하고 그리워하였다. 그러나 남의 그릇된 행위를 보면 곧장 충고를 하였으나 푸대접하지는 않았다. 시세(時勢)에 따라 세태만 좇는 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대로 가정의 법규가 검소하여 공 역시 사치는 즐기지 않았으며 여색(女色)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돈을 버는 일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의복이나 음식 역시 서생(書生)일 때와 다름이 없었는데, 오직 책에 대해서만은 얼마든지 많이 모아서 비축하였다. 공무를 보는 가운데서도 열람을 하고 베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1남 동윤 부솔공: 익위사부솔 호성원종공신
2남 동렬 남곽공: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봉촌(鳳村). 형조참의. 대사성
3남 동망 길주공: 길주목사
4남 동량 오창공;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김포묘역 자료


8世 휘 朴秉文     司直公

官 修義校尉中軍副司直 (교위;정5품~종6품 사직;정5품 부사직;종5품)
忌 11월2일
配 밀양 박씨    父 남양부사 기 僉樞公
                 祖 知門下府事(門下府知事) 葳
墓 在    金浦 西豆毛谷     今 黔丹面 大谷里

※박위:고려 말·조선 전기의 문신.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을 몰아내고 대마도 적선을 불태웠다.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조선 건국 후, 양광도 절도사로 왜구를 물리쳤다.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당했다.




9世 朴 林宗(1434--1500)        세종16--연산6 상주공

<족보기록>
字     泰之
官歷 司僕寺正 상주목사 至 僉知中樞府事 司僕寺; 조선시대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
증     吏曺判書
配     陽川 許 父; 載寧郡守 贈 領議政 蓀 (자; 許琮 許琛 ?)
덕원 부사. 풍덕 군수(豐德郡守).사복시 정(司僕寺正).좌통례(左通禮) .홍주 목사(洪州牧使                


<조선왕조실록자료>
● 성종 3년(1472년) 2월 28일(을미)
덕원 부사 박임종 등이 하직하다

● 성종 3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2월 1일(정사) 4번째기사
덕원 도호부사 박임종 등 5인이 윤대하다

● 성종10년(1479 년) 10월 5일(정해)
풍덕 군수(豐德郡守) 박임종(朴林宗)과

● 성종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11월 3일(을해) 1번째기사
허침이 아뢰기를,
신의 조카 박억년(朴億年)도 말하기를, ‘윤흥신이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지나는 손에게 후히 먹였다.’ 하였으며, 신의 자부(姉夫) 홍임(洪任)·박임종(朴林宗)이 다 말하기를,

●성종 24년(14936년) 3월 10일(을해)
선농제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을 하사하고 한 자급씩 올려 주다
사복시 정(司僕寺正) 박임종(朴林宗),

● 연산 2년(1496년) 7월 25일(경오)
좌통례(左通禮) 박임종(朴林宗)·

● 연산 6년(1500년) 3월 24일
박임종이 거듭 내직을 맡게 되었으므로 다시 외직으로 갈다
박임종(朴林宗)이 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10세 박억년(朴億年) 교리공 1455 (세조 1) - 1496 (연산군 2)

●<한국역대 인물정보 시스템>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억년(朴億年)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기옹(耆翁). 첨지중추부사 임종(林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영의정 허손(許蓀)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사마시에 장원 합격하고,
1489년 동생 조년(兆年)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조좌랑·수찬·교리 등을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는데, 이때 소릉(昭陵)의 부묘(祔廟)에 대한 이론이 일어나 의견이 구구할 때 홀로 부사(祔祀)가 합당함을 역설하였다.

성격은 기국이 넓어 모가 나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매우 강직하여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갔다.
병진(丙辰 1496년)년 7월에 병으로 향년 40세로 졸 하였다.

현석공의 상주공비문: 아들 억년(億年)은 바로 정랑(正郎)이고 조년(兆年)은 바로 첨정(僉正)이며, 귀년(龜年)은 별좌(別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예조 좌랑(禮曹佐郞)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교리(校理) 시독관(侍讀官) 주·석강(晝夕講)에 나갔는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박억년(朴億年)이 아뢰기를,


<조선왕조실록>
● 성종 275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3월 14일(기묘) 5번째기사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박억년(朴億年)

● 성종 287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2월 4일(계해) 2번째기사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억년(朴億年)이 당상(堂上)의 뜻으로 와서 아뢰기를,

● 연산 5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5월 22일(갑진) 1번째기사
하고, 검토관(檢討官) 박억년(朴億年)은 말하기를,

● 연산 7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7월 11일(임진) 2번째기사
·수찬(修撰) 박억년(朴億年)·

● 연산 8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8월 25일(을해) 2번째기사
박억년(朴億年)을 교리(校理), 성희안(成希顔)을 부교리, 김전(金銓)을 수찬(修撰)으로 임명하였다.

● 연산 9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9월 4일(갑신) 1번째기사
시독관(侍讀官) 박억년(朴億年)이 아뢰기를,

● 연산 9권, 1년(1495 을묘 / 명 홍치(弘治) 8년) 9월 4일(갑신) 3번째기사
주·석강에 나가 《대학연의》를 강하다
주·석강(晝夕講)에 나갔는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박억년(朴億年)이 아뢰기를,



10세 朴 兆年 (1459--1500)     세조5--연산6     정랑공

<족보기록>
字 期叟수    
관역 이조정랑 至 通德郞 司贍寺 僉正 兼 承文院校勘(감) 吏曺正郞을 지냄
配: 파평윤씨 父 단성縣監 尹孜善 (배; 벽진이씨)
             祖 護軍 玭 (윤구= 평도공 사위와 4촌간)
                처남 尹耕(사간)
증     좌찬성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파평윤씨 족보에 吏正으로 기록

<조선왕조실록 기록>
● 성종 286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弘治) 7년) 1월 28일(무오) 2번째기사
세자에게 주강에 《중용》을 강하도록 하다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박조년(朴兆年)이 아뢰기를,

“세자(世子)께서 주강(晝講)에서 《대학(大學)》을 마쳤으니, 청컨대 《중용(中庸)》을 강(講)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가하다.” 하였다.



12세 박응인(朴應寅)     1532(중종 27)~1606(선조 39). 도정공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응인(朴應寅)에 대하여
1532(중종 27)∼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원중(元仲). 이조정랑 조년(兆年)의 손자이며, 집(緝)의 아들이다.
유조인(柳祖訒)에게 수업하였으며, 1558년(명종 13)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의금부도사, 주부(注簿)를 거쳐 1592년(선조 25)에 상의원정(尙衣院正)이 되었다.
1594년 연안부사가 되었으나 탄핵당하였고, 이듬해 봉산군수로 재임중 파직당하였다.
1599년에 인의(引儀)가 되었고, 이때 중전이 수안(遂安) 유주(留駐)때 이의 호위를 하였다 하여 가자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南溪集(朴世采)

상의원 정(尙衣院正). 연안 부사. 봉산 군수(鳳山郡守). 인의. .돈령부도정(선조36 3/15)    

수(壽) 75
배(配) 숙부인 밀양변씨
묘(墓) 연천군 전곡리➜ 1973년 대곡동 천봉
비석; 잠곡 김육 찬 약재 유상운 서


<조선왕조실록 기록>
●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24일(신사) 7번째기사
박응인(朴應寅)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박동언(朴東彦)을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에, 정

● 선조 50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4월 17일(을축) 4번째기사
연안 부사 박응인

● 선조 66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8월 15일(을묘) 1번째기사
봉산 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 선조 115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7월 24일(신미) 7번째기사
인의(引儀) 박응인(朴應寅), 선전관(宣傳官) 봉림도정(鳳林都正)

김제남과는 낭관이 되었을 때부터 과연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만, 그가 국구(國舅)가 된 뒤로는 발자취가 저절로 소원해졌습니다. 정미년 10월에 선왕의 병환이 위독해진 뒤로 신의 숙부인 반성(潘城) 집안의 여종 경춘(景春)이 의인 왕후를 모셨다가 경자년 이후로는 대군의 궁방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하루는 신의 종형 박동언(朴東彦)의 처에게 와서 말하기를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의인 왕후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따라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咀呪)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인 왕후의 가상(假像)을 만들어 놓고 대군 궁방의 하인인 거마송(巨亇松)과 순창(順昌) 등에게 의인 왕후의 어휘(御諱)를 쓰게 했더니, 거마송은 당초 은덕을 받은 일도 없는 사람인데 한사코 피해 달아났고, 순창은 숙부 박응인의 집 여종의 남편으로서 임진년에 수고하며 일행을 호위해 준 공로가 있다 하여 특별히 숙노(稤奴)668) 로 차임해 준 망극한 은덕을 받았는데도 도리어 팔뚝을 걷어붙이고 어휘를 쓴 뒤 필경에는 활을 쏘아 차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할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문중 전체가 이 말을 듣고는 절치부심하였는데, 이 세상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복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일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669) 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감히 김제남과 드러내놓고 서로 따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창이 한 일에 대해서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김제남과 차마 조금이라도 상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집안이 이미 그 일에 대한 분을 풀지도 못하고 또 분명히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들 몰래 오열하며 눈물만 흘려온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이렇게 죽음을 논하는 날을 당해서야 비로소 발설하게 되었으니 그 정상이 불쌍하고 가엾기만 합니다.



13세 박동기(朴東紀) 1557-

선조정축년 사마시
임진왜란 왜적을 맞나 자결

配 합천이씨
繼 전의이씨
墓 초재 전곡 1900년 도정공묘하 천봉
             1973년 김포 도정공묘하 천봉



13세 박동위(朴東緯) 1576-1657

광해임자년 진사
官: 첨정. 절충위 호군
壽: 82세
配: 화순최씨
墓: 도정공묘후
    1973년 김포 도정공묘하 천봉
有碣: 族從孫 世堂 撰



13世 휘 朴東善(1562--1640)(명종17--인조18)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동선(朴東善)에 대하여
1562(명종 17)∼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 사간 소(紹)의 손자로,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의 아들이며, 금주군(錦州君) 정(炡)의 아버지이다.
1589년(선조 22) 28세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남포현감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현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그뒤 성균관전적·직강·예조좌랑·병조좌랑·사복시정 등을 차례로 지내고, 경기도사·수안군수에 이어 인천·부평·남양 등의 부사를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그를 대사간에 임명하자 그의 패륜행위를 못마땅히 생각하여 사양하였으나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공주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고,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형조판서·좌참찬·우참찬·지돈령부사·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지의금부사·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늙고 병든 몸으로 왕손을 호종하고 강화·교동·호서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에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다.

저서에 《서포기문 西浦記聞》이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선수29 7/1 이때 남포 현감(藍浦縣監) 박동선(朴東善)이 변란의 소문을듣고 수사(水使)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로 나아가 홍주를 구원하자고 하니, 수사는 동선에게, 자기에게 와서 상의하라고 했다. 동선은 즉시 군병을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진군하자고 하자, 수사 최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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