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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선생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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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창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2-28 12:42 조회4,102회 댓글0건

본문


   새글박영효 선생의 평가?

 

                                      최초의 태극기太極旗  

                최초의 국기 '박영효

 고종 양위에 반대한 박영효

 박영효 태극기 산실 일본배 보존 확인

박영효 금릉위 (朴泳孝 錦陵尉 )

 박영효의 독립운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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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빛나는 조상에서 박영효 좀 지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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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10_face.gif 박은주

위 글은 박은주님의 진정[眞情]한 애족심이라고 믿고싶습니다.
박은주님 한번 생각해보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모님부터 윗대의 선조님 들은 훌륭한 분도 많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선대[先代]라는 것입니다.
선대는 나 자신이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운명(運命)입니다.

 

선대가 훌륭한 일을 하셨으면 자랑스럽고 그러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가 선대의 잘잘못은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대의 잘못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며 자랑스러운 것은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알고 바로 기록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는 시대적 배경과 관점[觀點]에 따라서는 평가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 100%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잘한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하고는 올바른 평가를 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숨긴다고 영원히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자랑만 한다고 자랑스러워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역사는 공과(功過)를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이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박영효 선대도 공과가 있을 것입니다. 
박영효 선대가 잘못했다고 공개된 자료는 많으나 잘 했다고 공개된 자료는 거의 없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아래의 글은 오창공파 종손 만춘씨가 올린 글로 2010.2.25일  [re]『전쟁하여 독립하려는 뜻 보여야…』라는 글로 본인의 승낙을 받아서 편집하여 올리면서 참고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0.2.23
http://cafe.daum.net/bannampark
        
pcs13191@hanmail.net
             카페지기 박창서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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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10_face.gif 박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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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 #1   t.gif
   parkmanchun.gif (893.5 KB)   Download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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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t.gif
   [re] 『전쟁하여 독립하려는 뜻 보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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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하여 독립하려는 뜻 보여야…』
        
세 사람 명의로 된 「청첩」과는 별도로 이승만(李承晩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통하여 일반 동포들에게 공개편지를 쓰고 있다. 이 편지는 만세시위운동이 국내외로 거세게 전개되고 있을 때의 李承晩의 시국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만세시위를 「독립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대한독립 선고는 천고에 희한한 일이외다. 이 기회에 이 일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오니, 다수한 동포의 피를 흘리고 저렇듯 시작한 독립전쟁을 그치지 말고 독립을 회복하는 날까지 계속하여야 할 터인데, 저 운동을 도우려면 세계의 공론을 돌리는 데서 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이승만(李承晩)은 편지의 서두를 이렇게 적고 나서 재외동포들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할 적에 다음 두 가지 요점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첫째로 〈우리가 전쟁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뜻을 보일지니, 이것이 지금 세상에 동정을 많이 얻는 본의라〉고 했다. 곧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전쟁을 대신하여 달라거나 日人을 대신 욕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평하기만 해달라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가 큰 단체를 만들어 각 처의 독립운동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보이면 사람들이 와서 뉴스거리를 구하려 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인심을 선동하는 자로 지목받기 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필라델피아 회의가 우리의 「실력」을 보여 주는 대회이므로 많은 동포들이 참석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번 필라델피아 독립관에서 총대표회를 열자는 것이 이 세계에 우리의 실력을 보이고자 함이니, 이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하고 앉아서 남더러 동정만 달라고 하자는 것이 아니요, 다수한 한인들이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기어히 회복하고야 말 결심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서 남의 동정이 스스로 발하게 하야 신문상에 공포하야 한인이 어떠한 인민인 것을 알리자 함이니,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이 기회를 잃지 말고 다수한 우리 동포가 참여하심을 바라나이다.〉21)

李承晩은 이러한 공개편지뿐만 아니라 각지의 친지들에게 전보를 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을 촉구했다. 유학생들에게도 연락이 닿는 대로 통보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임병직(林炳稷)이 「미주한인학생단 서기」 명의로 이 회의에 유학생들이 많이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신문광고가 나기도 했다.22) 林炳稷은 李承晩의 YMCA 학원 제자였고, 1913년에 미국유학을 올 때에는 하와이에 들러 李承晩의 집에 머물렀었다.

현순으로부터 손병희(孫秉熙)를 대통령, 박영효(朴泳孝)를 부통령, 李承晩을 국무경(국무총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재미동포들에게 전해진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현순의 전보에는 독립군 600명이 두만강을 건너 본국으로 진격했다는 감격적인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주(滿洲)에서 대한공화국(大韓共和國) 임시정부가 수립돼


3•1 운동의 후속조치로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재미동포들은 4월5일자(535호) 「新韓民報」에 3월1일에 선포된 독립선언서 전문과 함께 보도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고 그들의 기대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만주에 있는 각 단체 대표들을 소집한 후에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경― 리승만
내무경― 안창호    
탁지경― 윤현진
법무경― 남형우    
군무경― 리동휘
강화전권대사― 김규식〉23)

이 기사는 현순(玄楯)의 전보에 따른 것이었다. 玄楯은 3월29일에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李鍾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일본은 간교한 수단으로 뇌물을 주어 세 사람의 친일파를 고용했습니다. 시천교도와 보부상패들이 우리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자치단을 조직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독립에 반대한다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26일과 27일에 서울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언덕들은 태극기로 단장을 했습니다. 200명이 체포되었고, 양쪽에서 비슷한 사상자가 났습니다. 매일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600명의 독립군이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격했습니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대표들에 의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경 이승만, 내무경 안창호, 재무경 윤현진, 사법경 남형우, 군무경 이동휘, 총사령 유동렬, 파리 강화대사 김규식. 곧 공표할 예정이니까 급히 당신의 의견을 회답하기 바랍니다. 70만 엔이 일본인들에게 몰수당했습니다. 재정지원이 시급합니다. (보내준) 자금은 받았습니다. 김규식은 이름을 Chin Chung Wen(金仲文)으로 바꾸었습니다. 현순〉24)

현순은 같은 전보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중앙총회로도 보냈는데, 「新韓民報」의 기사는 이 전보를 요약한 것이었다. 현순의 전문에는 「임시정부」라고만 되어 있는 것을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라고 한 것은 번역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만주에서 수립되었다고 한 것도 독립군 600명이 두만강을 건너 본국으로 진격했다는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와이에서는 〈한-청-러시아 접계되는 간도〉에서 대한공화정부가 조직되었다고 번역했다.25)

이 전보를 받은 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白一圭)는 이튿날로 4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에,「대한독립단(Korean Independent Union) 특별대표」玄楯으로부터 만주에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전보를 받았다면서 대통령 孫秉熙 이하 각료명단을 통보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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