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燁 - 朝鮮의 萬里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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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燁 - 朝鮮의 萬里長城
(1) 박엽(1570~1623, 葯窓, 菊窓, 東豪의 子)은 반남 박씨이니 자는 숙야요, 야천 朴紹(1493~1534)의 증손이다. 엽이
나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빼어났으며 하는 말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조부 應川(1516-1581)이 한번
은 등불을 들이라 하고는 엽에게 시를 지어보라 한 적이 있었는데, 즉시 대답해 말하기를 '등불이 방안에 드니
밤이 바깥으로 나가네.'라고 하였다. 또 한 번은 이웃 아이들을 따라 崔有源(1561~1614) 공의 집에서 놀았는데,
마침 그가 외출하였기에 벽 위에다가 크게 쓰기를, ‘주인은 산 위의 산이요 손님은 입안의 입이로다(山上山은
出, 口中口는 回의 破字니, 뜻은 주인이 나가노니 나그네가 돌아옴이라).'라고 하였다. 최공이 돌아와 누구 짓이냐고 묻자
아이들은 모두 겁이 나서 감히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엽이 자신이 했노라고 하였다. 崔公이 시를 보고 마음속
으로 許與(허락하여 칭찬함)하고, 물음에 사실대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점차 커가면서
호걸스럽고 분방하여 틀에 구속되지 않고 남들을 업신여기니 여러 젊은이들이 두려워하고 기세에 눌리어 감
히 대들지를 못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엽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올려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길짐승이나 날짐승처럼 숨어버렸는데, 엽도 조모를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
가 여러 번 위급한 상황을 겪고(備經-모두 경험함)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明나라 將士(將帥와 兵卒)들이 장
기간 국경에 머물면서 엽이 중국말에 익숙하고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는 늘 시를 주고받으며 혀를 차며 칭찬
하였다. 정유(1597)년 문과에 올라 1618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명령하면 시행하고 막으면 그침으로 기강이
바로 잡히니 遠近이 모두 그 위엄에 복종하였다. 明나라 사람들이 그가 지방을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는 우
리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박엽으로 하여금 이곳에 오래 있게만 하면 조선에는 서쪽의 오랑캐를 돌아다
볼 걱정이 없으리라."고 했다 한다.
당시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에 金墉之變(仁穆大妃를 西宮에 유폐시킨 후 폐위시킨 일)이 있기에 이르니, 엽이 통분하
며 문득 얼굴에 나타내 말하기를 "이첨이 하는 짓을 보건대 끝내는 왕위까지 찬탈하리니 내가 도저히 앉아서
볼 수가 없다."고 하며 심지어 사람을 모아 가서 그를 찌르려 하였었다. 또 이이첨(1560~1623, 光海 세자빈 朴씨의
외조부, 朴自興의 장인)이 明나라 사신을 맞는 接伴使로 평안도에 오자 燁이 그 숙소로 찾아갔는데, 마침 어떤 어
미가 불효한 아들을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엽이 마침내 그 아들을 뜰에 이르게 해놓고는 말하였다. "어미와
아들은 하늘의 본성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면 이는 국법에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다. 천지가 있은 이래로 어미도 모르면서 수령 자리를 차지한 놈은 오직 이이첨이 하난데, 하늘 아래 어찌 두
놈의 이이첨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 자리에서 법에 따라 처형해버리니 좌우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이첨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으나 그러나 끝내는 감히 성을 내지 못하
였더라.
임술(1622)년에 建州의 여진족이 동쪽 땅을 빼앗고자 하여 압록강 북쪽에 군사를 주둔시키니, 엽도 군사를 거
느리고 전진한대, 오랑캐들이 朴燁임을 소문 들어 알고 이내 말하기를 “우리가 사냥하려고 이르렀을 뿐이다.”
하고는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그는 적을 염탐하는 일에 귀신같아서 오랑캐의 동정과 허실을 낱낱이
모르는 것이 없이 늘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하였고, 때로는 오랑캐 두목의 붉은 투구를 훔쳐 와 금으로 장식하여
되돌려주는 일도 있었으니 적들이 귀신이라 여길 정도였으며, 엽이 살아있는 동안은 내내 다시는 그 욕심을
드러내지 못하였더라.
계해(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내부의 혼란도 점차 안정되었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
스러워하였다. 여러 훈신들이 이르기를 “엽의 부인이 폐위된 왕(광해군)과 인척 관계가 되니 능히 폐주에게 사
사로운 정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 또 엽의 위세와 명성이 너무 큰 것을 우려하여 말하기를 “엽이 법
을 집행함이 잔혹하고 西道 일대를 위세로 제압하니 지금 처치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가올 후환이 두렵다."라
고 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를 씌워 마침내 賜死하게 되었다.
이 때 도원수 한준겸(1557~1627, 인조반정으로 딸이 仁烈王后로 책봉되자, 西原府院君에 봉해짐)이 평안도 중화군에 군영
박엽(葯窓 朴燁) 놀이터 2010/02/13 17:56
http://blog.naver.com/jbkim315/10080792038
을 차려두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도원수인 한준겸에게 명령하여 완전 무장한 군사를 동원해 엽을 체포케 하니,
한공이 말하기를 "숙야가 어찌 무장한 기병들을 기다려서 죽을 사람인가"하였다. 엽은 그 변고를 듣고도 조금
도 동요함이 없다가, 원수가 보낸 전령을 보고야 그제야 뜰 아래로 내려와 어명을 받았으나 아직껏 이미 仁祖
(綾陽君, 1595~1649)가 反正(=改玉, 옥쇄가 바뀜)한 것을 알지 못하고 金吾郞(義禁府 都事, 금부도사)에게 이르기를 “원
컨대 죄명이나 듣고서 죽고자 하오." 하자 금오랑이 반정이 일어났음을 말하니, 엽이 탄식하기를 "여러 功臣들
이 어찌 차마 나를 이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하였다. 형을 당할 즈음에 사람을 시켜 그 아내에게 이르
기를 "내가 짐짓 죄가 없는데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자못 부인이 왕과 인척인 때문일 따름이오(엽의 부인
柳氏와 광해군의 부인이 사촌간임)."라 알리고, 또 자기가 관리했던 군량의 출납부를 도원수의 군영으로 보내었으
니, 아마도 자신이 죽고 난 뒤 함부로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했다는 오명이 있게 될까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마
침내 재촉하여 목에 밧줄을 매고 줄을 잡아당기게 하여 죽었다.
김신국(1572~1657, 字 景進. 號 後瘳이 대신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백성들에게 엽에 대한 사사로운 원수를
갚을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었던 집안에서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 난동을 부렸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한공이 군량 출납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숙야처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도 끝내 재앙을
면치 못했구나." 하고는 난동을 일으킨 자들의 우두머리를 목 베었다. 조정에서도 이 사정을 알고 신국에게 죄
를 내리고 엽이 고향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에 엽이 승평부원군 김류(1571~1648, 字 冠玉. 號 北渚. 文忠. 汝岉의 아들)를 보고는 붉은 담요와 기름먹인 바가
지를 많이 주었는데 김류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다. 반정을 일으키던 날에 붉은 담요를 잘라 군사들의 信
標로 삼고 기름먹인 바가지로 사졸들이 목마를 것에 대비하였다. 이는 엽이 이미 반정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
고 있었다는 증좌이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화를 입기 바로 전 날, 감영 아래에 있는 法水橋에서 놀면
서 이런 시를 지었다. “한 길 평안도 감사가 되어 천 년 법수교 아래서 노네. 마땅히 알지니, 달 뜬 오늘 밤이
이제는 길이 슬픈 밤 될지라.” 앞일을 예언한 시(詩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蔣童子라는 이가 저자 거
리에 숨어 살았는데 엽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탄식해 말하기를, “이는 도적을 불러옴일지라." 하
고는 여러 날을 두고 한탄했다고 한다. 『매산집』
(2) 숙야는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어 천문과 지리, 병학과 술수에 모두 능통하였다. 젊을 적에는 또래 청년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청년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는데, 뜰 안에 갑자기 바깥에서 더운 물이 지붕을 넘어
날아 들어와 의관에 쏟아졌다. 청년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필시 박 숙야가 온 게로다." 하고 나가 본 즉,
엽이 행랑채 바깥 길에 서서 지붕 위로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엽의 외가가 충청도 목천 고을에 있어 서울과는 이백 리 남짓 떨어져 있었다. 소매 속에다 밥 한 그릇을 넣고
느지막이 소매를 저으며 길을 떠나면,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당도하였다. 그 길 가는 모습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다른 행인들과 다른 점이 없었으나 다만 바람결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날 따름이었다.
郡邑을 다스림에 미쳐서는 위엄과 명령이 몹시 높아서 관청 일이 그 자리에서 결정되고, 광해군(李琿, 1575-
1641)의 동서로서 관서(평안도)백이 된지 10년에 위엄이 온 도에 떨쳤고, 북쪽 오랑캐도 또한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였다. 일찍이 막비(裨將)를 불러 술과 안주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것을 가지고
중화 구현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가 채찍질하며 말을 타고 지나갈 것이니
내 말로 전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행역이
참으로 괴롭겠기로 술과 안주를 보내는 것이니 취하게 마시고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 ’고 하라.” 幕客(막비)이
즉시 가서 기다리자 과연 두 사람이 지나므로 엽의 말로 전하니 두 사람이 서로 돌아보면서 실색하여 말하기
를 “장군은 신인이로다.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다시 오리오.” 하고는 술을 마시고 사라지니 이들은 곧 용골대와
마부대로 몰래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허실을 정탐함이었는데 박엽 만이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총애하는 기생에게 이르기를, "오늘 밤에 네가 나를 따라가서 좋은 구경거리 하나를 보겠느냐"하니 기생이 쾌
히 응낙하였다. 밤이 되자 엽이 검푸른 노새에 타더니 앞에다 기생을 태우고 주단으로 자기 몸에다 기생의 허
리를 묶었다. 눈을 뜨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달리니 두 귀에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
었다. 한 곳에 이르러 눈을 떠서 보라 하는데, 서리가 덮인 광막한 큰 들판에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고,
군영 막사는 하늘에까지 잇닿아 있었고 등불이 휘황하게 빛났다. 이에 기생에게 장막 속에 숨어 있으라 하고
엽이 의자에 혼자 꼿꼿이 앉아 있으려니, 잠시 후 징 소리가 나면서 몇 리에 걸쳐 철기가 성난 파도처럼 길게
줄을 지어 몰려 왔다. 대열을 벌이어 진형을 갖추고는 두 패로 갈리어 용력을 과시함이러니 가운데 있는 한 장
수는 팔 척이나 되는 키에 머리엔 푸른 깃을 꽂은 붉은 투구를 쓰고 몸엔 용무늬 갑옷과 검은 상의를 입고 있었
으며 손에는 별 무늬가 새겨진 보검을 잡고 있었다. 그 자가 장막을 헤치고 들어오더니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왔구나. 오늘밤에 먼저 검술을 시험하여 자웅을 가리는 게 좋겠다." 하자 엽이, "좋다."고 응수했다.
이에 칼을 짚고 의자에서 내려 와 들판 위에 마주 보고 서서는 둘 다 공격하는 자세를 취했다. 얼마 뒤 두 사람
은 한 줄기 흰 무지개로 변하여 구름 덮인 하늘로 솟구쳐 들어갔는데, 단지 공중에서 서로 칼 부딪는 소리만이
들려 왔으며 가끔 붉은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마침내 그 장수가 땅에 떨어져 고꾸라지자 엽이 이내 공중에서
날아 내려와 오랑캐 장수의 가슴통에 걸터앉더니, "어떤가"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는, "장군의 신이한 용력
을 만 명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것을 오늘 더욱 잘 알게 되었소이다. 어찌 다시 장군과 우열을 다투겠소."라고
대답했다. 엽이 웃으며 일어나 같이 장막 안에 들어가 서로 술잔을 들어 권하고선 각자 몇 잔을 취토록 마시고
나더니, 그 장수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러나 일 里를 못 가서 갑자기 대포 소리가 한 방 울리자 포연과 화
염이 하늘에까지 뻗치더니 저들 한 부대의 떼 지어 있던 병사와 말들이 운무 속으로 말리어 들어가고 땅 위에
있던 자들도 역시 모조리 풍비박산(바람처럼 날리고 우박처럼 흩어짐)이 되어버렸다. 아까의 장수가 다시 혼자 말을
달려오더니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십사고 애걸하자, 엽은 웃으며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는 기
생을 불러 같이 노새를 타고 올 때처럼 돌아왔는데, 그 때까지도 하늘은 아직 밝지 않음이더라. 무릇 엽이 싸
운 그 장수는 곧 오랑캐 장수인 누루하치였으며, 그 곳은 곧 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연무장)였다.
계해(1623)년 삼월에 인조(1595~1649, 字 和伯. 號 松窓. 諱는 倧. 綾陽君, 선조의 손자이고 부는 定遠君(元宗으로 追尊,1580-
1619), 어머니는 仁獻王后 具氏(1578~1626)이다)가 반정한 뒤, 엽이 등불 아래 홀로 앉아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엽이 물었다. "누구냐" "아무개올시다." "무슨 일로 왔는고." "공은 장차
어떤 계책을 세우시렵니까." "나에겐 정해둔 계책이 없으니 어디 자네에게 물어봅세." "상책과 중책과 하책이
있으니 청컨대 이 중에서 택하십시오." "무엇이 상책인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방어하고 북으로 금나라
와 내통하십시오. 그러면 임진강 서쪽은 조정의 국토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며, 또 아래로 위타(姓 趙氏, 南越王으
로 반역하여 皇帝를 僭稱, 史記 南越列傳第五十三 참고)처럼 황제를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중책인가.” "급히
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제가 그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게 하신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습니다." "하
책은 무엇인고." "공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은 신하이니 순순히 나라의 명을 받드는 것이 가한 것입니다."
엽이 한참을 깊이 생각하다(沈吟)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하책을 따르겠노라." 그러자 그는 "그
러면 저(중국말로 평민이 관리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는 이제부터 종적을 감추겠습니다."하고는 간 곳을 알지 못
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용골대였다고도 말한다. 엽이 조정으로부터 사형의 명을 받을 적(後命, 귀양살이를 하는 罪
人에게 死藥을 내리는 일)에, 온 조정에서 모두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고 겁을 내어 감히 명을 집행하러
가려는 자가 없었다.
구인후(1578~1658, 인조의 외종형, 仁獻王后가 姑母임)가 예전에 그의 막하에 있어보아 엽의 사람됨을 익히 알기에
자청하여 평안도로 내려갔다. 엽이 원수를 진 집안이 많아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칼을 들고 쳐들어오자, 인후
가 엄하게 그들을 막고서 시신을 관에 넣고 염을 하여 이송(治靷=發靷)하였다. 상여가 중화군에 이르자, 마침 인
후가 御營大將으로 임명되어 먼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틈에 원수진 집안에서 쫓아와 관을 뻐개고 시
체를 들어내어 마디마디 잘라버리고 가버렸으니, 이는 곧 천인의 연고임에서라. 엽이 소시 적에 운수를 점쳐
보았더니, 천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온 일이 있었다. 千人은 바로 인후의 어릴 적 이름인
데도 엽이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애꿎은 사람을 무수히 죽여 천 명을 채우고자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었던
가.
엽이 죽음의 명을 받았을 때(賜死)에, 힘센 자로 하여금 목에다 줄을 매어 잡아당기게 하고서 목숨이 끊어짐에,
그 즉시 큰 길에서 行刑하는데, 이 때 창기들이 와서 구경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감사가 사
랑한 기생들인데, 죽는 것을 보고도 곡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서 구경만 하니 어인 일인가" 그러자 기생들은,
"새로 온 사또(使道)에게 수청(守廳, 隨廳)들러 왔소."하고 서로 즐겁게 웃으며 가버렸다. 이원명이 지은『동야휘집』
(1) 朴燁은 潘南人이니 字는 叔夜오 冶川紹의 曾孫이라 燁이 生而聰穎이 絶倫하야 出語에 輒驚人이러라 祖應川이 嘗夜呼
燈하고 命燁賦詩하니 應口而對曰 燈入房中夜出外라하고 又從隣兒하야 遊崔公有源家할새 値其出하야 大書壁上曰
主人山上山이오 客子口中口라하니 崔公이 歸問한대 群童이 皆畏不敢對어늘 燁曰 吾所爲也로라 崔公이 見詩而心許하
고 及問에 以實對하니 益奇之러라 稍長에 豪橫不羈狎侮하니 諸少年이 慴+伏無敢抗焉이라 母病革에 燁이 進指血而甦하
다
壬辰亂作에 人皆鳥獸竄하니 燁이 負祖母하고 避兵備經危亂得免하다 明朝將士久駐國境에 見燁이 嫺'華語하고 且善
屬文하야 每有酬唱에 嘖'嘖+稱賞이러라 丁酉에 登文科하고 爲平安道觀察使하야 令行禁止하니 遠近이 服其威러라 明朝
人이 聞其治行하고 每見我人이면 輒曰 使朴燁으로 久於此면 國無西顧之憂云이라하더라
時에 光海政亂에 至有金墉之變하니 燁이 痛忿輒形于色曰 觀爾瞻所爲컨대 終必簒奪하리니 吾不可以坐視라 至欲
募人往刺之하고 及爾瞻이 以儐+使로 至에 燁이 往爾瞻所하니 適有母告子不孝者어늘 燁이 遂致其子於庭曰 母子는
天性也라 人而不知愛其親이면 卽王法所不容이니 自有天地以來로 不知母而得保首領者는 惟爾瞻一人이니 天下
에 豈有兩爾瞻哉아 卽置之法하니 右莫不震慄하고 爾瞻이 亦俛'首眙+愕나 然이나 卒不敢有螫也러라 壬戌에 建虜謀東
搶'하야 屯兵於江北하니 燁이 亦擁兵而前한대 虜聞知爲燁하고 乃曰 吾爲遊獵而至耳라하고 遂引去하다 神於譏詗+하야
虜之動靜虛實을 無不通曉하야 常若目擊하고 或潛取虜酋紅兜하야 飾金而還之하니 虜以爲神하야 終燁之世世토록
不復逞其志러라
癸亥仁祖反正時에 內亂이 稍定而衆志危疑하야 諸勳臣이 謂燁之夫人이 與廢主로 爲姻親하니 不能無私於廢主라하
고 又慮威名太盛하야 乃曰 燁이 用法이 殘酷하고 威制西路하니 今不置辟'이면 恐有他虞라하야 以濫殺人命으로 爲罪하야
竟賜死할새
時에 都元帥韓浚謙이 開府中和라 命元帥하야 發甲兵捕燁하니 韓公曰 叔夜豈待甲騎而死者哉아 燁이 聞變不動이
라가 見元帥傳令하고 始下庭受命而猶不知已爲仁祖改玉하고 謂金吾郞曰 願聞罪名而死하노라 郞이 爲言改玉한대
燁이 歎曰 諸功臣이 豈忍致我於此極耶아 臨刑에 使人謂其妻曰 吾故無罪而至此者는 殆以夫人故耳라하고 又取
管餉錢穀簿하야 使遣元帥營하니 盖慮身沒而有所乾沒之名也라 遂促令繫頸하야 引索而絶하다
金藎國이 代爲觀察使에 許民報仇하니 於是에 怨家群起하야 構變無所不至라 韓公이 見錢穀簿하고 流涕曰 爲國家
任事如叔夜而亦不免於禍乎아 遂誅首亂者하니 朝廷이 聞之하고 亦罪藎國而許其歸葬하다
初에 燁이 見金昇平瑬하고 贈紅氈與油瓢甚多하니 昇平이 未解其意러니 及擧義日에 割紅氈하야 爲標信하고 用油瓢하
야 備士卒喉渴하니 盖燁이 已知有靖社之擧하니 可異焉이라 被禍前夜에 遊營下之法首橋할새 有詩曰 一路關西伯
千年法首橋 知應今夜月 長作可憐宵라하니 盖讖也러라 時有蔣童子者隱於市肆라가 聞燁殺死하고 歎曰 此는 盜之
招也라하고 慨惋+屢日云이러라 梅山集
(2) 叔夜有將略하야 悉通天文地理와 兵學術數하니라 少時에 從諸少年遊할새 一日에 少年이 咸聚某家러니 庭中에 忽
見熱水自外飛流過屋하야 瀉于衣冠하니 衆少年이 驚怪之曰 必朴叔夜來로다 出門觀之하니 燁이 立廊外路上하야 放
溺過屋矣라
燁의 外家在木川하야 距京二百餘里라 袖飯一器하고 晩에 揮袂而去하야 日未昏而至하니 其行이 不疾不徐하야 無異
於諸路人하고 只聞衣裾'隨風有聲而已러라
及治郡邑에 威令甚峻하야 官事立辦하고 以光海之同壻로 爲關西伯十年에 威振一路하고 北虜亦畏之하야 不敢越境
이러라 嘗呼幕裨하야 給以酒肴曰 汝持此하고 往中和駒峴留待則必有二健夫執策而過者리니 以吾言으로 傳諭曰
汝輩之來往我國을 謂人莫之知而吾則已知之라 行役良苦하리니 爲送酒肴하야 可一醉而速歸也하라 幕客이 卽往
而待之하니 果有二人之過者어늘 以燁言으로 傳之하니 二人이 相顧失色曰 將軍은 神人也라 吾輩何敢更來리오 因飮
酒而去하니 此는 卽龍骨大馬夫大潛來我國하야 爲探虛實而燁獨知之러라 又謂嬖妓曰 今夜에 汝隨我而一壯觀
乎아 妓曰 敬諾하나이다 至夜에 燁이 騎靑騾'하고 置妓于前하야 以紬緞으로 束其腰繫于身上하고 戒使闔眼하고 因加策
疾馳하니 但兩耳에 有風聲이라 到一處하야 使妓開眼視之하니 大野曠漠하고 霜月이 朦朧하고 帷'幕이 連天하고 燈燭이 煒'
煌이라 乃使妓로 隱伏於帳中하고 燁이 兀然坐榻上이러니 少焉에 有鳴鑼+聲하고 鐵騎彌亘數里하야 勢如怒潮長驅而至
하야 擺列陣形하고 投距賈勇이라가 中有一將이 身長이 八尺이오 頭戴翠羽紅兜하고 身穿繡蟒+黲'襖+하고 手執星文寶劍
하고 披帷'而入笑曰 汝果來乎아 今夕에 先試劒術하야 以決雌雄이 可矣니라 曰 諾다 因杖劒下床하야 對立於平原之
上하야 共爲擊刺之狀이러니 未幾에 兩人이 化爲白虹一道하야 聳入雲宵하야 但聞空中에 錚錚相搏聲하고 時有紫電이
閃閃而將墜仆'於地어늘 燁이 乃自空飛下하야 據坐胡將之胸腹曰 如何오 答曰 今日에 益知將軍之神勇이 萬夫莫
當이니 何可復與爭衡이리오 燁이 笑而起하야 同入帳中하야 酌酒相勸하니 各痛飮幾盃訖에 彼將이 告別起去어늘 未及
一里許하야 一聲砲響에 烟焰이 漲天이러니 彼兵一隊連人帶馬捲入雲霧中하고 其在地上者亦皆風飛雹散하니 彼將
이 復以單騎馳到하야 乞開歸路어늘 燁이 笑而許之歸하고 乃呼妓共騎騾+하고 如來時而還歸하니 天猶未曙矣러라 盖彼
將은 卽胡將奴花哈赤而此處는 卽其演武之場也러라
癸亥三月에 仁祖反正後에 燁이 獨坐燭下하야 撫劒發嘆이러니 窓外에 有咳嗽聲이라 問 誰也오 對曰 某也로라 曰 胡
爲而來오 曰 公이 將何以爲計오 曰 吾無定算하니 試問於汝하노라 對曰 有上中下策하니 請擇於斯하라 曰 何謂上策
고 曰 擧兵自衛하고 北通金人則臨津以西는 非朝家之有也오 且下不失尉佗+之計也니라 曰 何謂中策고 曰 急發兵
三萬人하야 使吾將之하야 鼓行而東則勝敗를 未可知也니라 曰 何謂下策고 曰 公은 世祿之臣也라 順受國命이 可矣
니라 燁이 沈吟良久에 喟+然嘆曰 吾從下策하리라 曰 小的은 從此逝矣라하고 仍不知處하니 或傳此是龍骨大云이러라 燁
이 受後命時에 擧朝皆其非常하야 無人敢去어늘 具仁垕+曾在幕下하야 熟知燁性이라 乃自請下往하니 燁이 多讐家하
야 諸人이 一時持刀而入하니 仁垕+幷嚴防之하고 棺斂治靷하야 行到中和하야 仁垕+除御將先還이러니 讐家追至하야 破
棺出屍하고 寸寸絶斷以去하니 此卽千人之故也러라 燁이 少時에 推數則殺千人이라야 乃生이라하니 千人은 卽仁垕'小
字而燁이 多殺不辜하야 欲充千人之數하니 何其愚也오
燁이 受後命之時에 令力士로 係頸引索하야 命乃絶에 卽於街上行刑할새 倡妓等이 來觀하고 或曰 汝皆以監司之愛
妓로 見其死不哭하고 恬然立視는 何也오 妓曰 使道前守廳이 來矣라하고 相與歡笑而去하더라 李源命著東野彙輯 - 朴
燁已知有靖社之擧<大東奇聞>
(3) 朴燁爲平安監司 占其命於華人 繇曰 殺一萬則活 於是縱殺戮 期滿萬而止 未滿而誅 金自點惎'之殺也
而自點之小字 乃一萬也,...故曰 誤解藥方 殺人於室 誤解讖筮 夷人於國 誤解經書 禍人於天下後世<靑城雜記 卷之三, 醒
言>
박엽(朴燁)이 평안감사가 되었을 때, 그의 운명을 중국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점괘에 “一萬을 죽이면 살 것이
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1만 명을 채우면 그만두려 하였으나 1만 명을 채우기 전에
처형되었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 그를 미워하여 죽였는데, 김자점의 어릴 때 자(字)가 바로 一萬이었
다,...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약방문(藥方文)을 잘못 해석하면 방 안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참설
과 점을 잘못 풀이하면 나라에서 사람을 죽이며, 경전을 잘못 해석하면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화를 끼친다.”
(4) 朴曄 字叔夜 爲人豪擧 少時善蹴踘 有幹能 料事如神 嘗遇神人 告曰 活千人可善終 誤以爲殺千人 恣
行殺戮 事光海君 許爲平安監司十年 凡八年 癸亥 仁祖靖難 遣使誅之 曄殺人凡九百九十九 方臨刑 大
同江邊 有大童過之 曄回首叱之使入水 童不敢避 蹈波而死 乃滿千矣 威令行於西道 建虜猖狂 不敢加兵
於我者 曄之力也 嘗遣刺客 偸建酋帽珠 賣於番市 虜由是慴+服 臨死嘆曰 何不活我十餘年 盖逆覩丁丑之
難也 嘗召匠搆'宅 將上樑 忽使孔於中 人莫知所以 後 曄營新門之闕 無樑 或言曄之家樑最大 工往掇+
其瓦 見而止 其家尙在會賢坊<靑莊舘全書 卷之五十三 耳目口心書[六]>
박엽(朴曄)의 자는 숙야(叔夜)니, 사람됨이 호걸스러웠다. 어릴 때 공치기를 좋아했으며 재간이 있어 귀신같이
일을 헤아렸다. 일찍이 神人을 만났는데 엽에게 고하기를, "천 사람을 살리면 잘 죽을 수 있다." 한 것을 천 사
람을 죽이라는 말로 잘못 듣고 살육(殺戮)을 자행했다. 광해군을 섬겨 10년 동안 평안 감사가 되기를 허락받아
8년을 지냈다. 계해 년에 인조가 정난(靖難)한 뒤 사신을 보내어 죽였다. 엽이 죽인 사람이 무려 9백 9십 9명이
었는데, 마지막 사람에게 刑을 가할 적에 큰 아이 하나가 대동강 가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엽이 머리를 돌려 꾸
짖어서 물로 들어가라 하니 아이가 피하지 못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므로 천명을 채웠다. 위령(威令)이 서
도(西道)에 행하여져서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창궐했으면서도 감히 우리나라에 침범하지 못한 것은 엽의 힘이
었다. 일찍이 자객(刺客)을 보내 건주 오랑캐 추장의 모자에 있는 구슬을 훔쳐와 번시(番市 오랑캐 시장)에다 팔았
는데 오랑캐가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죽음에 임하여서 탄식하기를,"왜 나를 10여 년만 살려 두지 않
는가."했으니, 정축(1637. 병자호란)년의 환란을 미리 알았던 것 같다. 일찍이 장인(匠人)을 불러 집을 지으면서
대들보를 올리려 할 때에 그 대들보 중간에 구멍을 뚫게 했는데(재차 사용하지 못하게 함),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
랐었다. 그 뒤 엽이 새문안 대궐을 맡아서 짓는데 대들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엽의 집 대들보가 가장 크다
고 하여 공장(工匠)이 가서 기와를 벗겼으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 집이 아직도 회현방(會
賢坊)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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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엽은 1864년 고종 1년에 官爵을 회복시키라는 전지를 받았다.
* 光海君(李琿, 1575-1641, 母는 恭嬪金氏)은 1587년(선조20)에 柳自新(1541-1612)의 셋째 딸(柳의 6남 4녀 중 8째,
1576-1624, 文城郡夫人)과 결혼하고, 유자신은 文陽府院君에 進封되었으며, 1592년(선조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
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柳自新은 希鏗+·希
聃·希奮·希發·希亮·希安 등 6남 4녀(趙國弼, 李德一, 光海妃, 金時輔)를 두었다. 또한 柳自新의 부인(1541~1620, 蓬原府
夫人)이 林塘 鄭惟吉(1515~1588)의 따님인데, 金尙容(1561~1637)과 金尙憲의 부친인 김극효(金克孝, 1542~1618)와
는 동서지간이 된다. 곧 유자신의 손아래 동서가 김극효이다. 광해비와 仙源이나 淸陰은 姨從間이 되는 것이다. 광해군 어
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光海君은 15년간 在位, 廢位 후로 강화도, 제주도 등에서 18년간을 유배생활을 하였다.
묘는 南楊州市 眞乾邑 松陵里에 있다.
朴燁(1570~1623, 菊窓, 葯窓)은 柳自新의 동생인 柳德新(1548~1617)의 딸을 아내로 하였다. 조부는 應川(1516-1581)
이요, 부는 참봉 東豪(1549~?)이다. 應川은 紹(1493~1534, 5應 17東)의 장자로 兄弟는 應順·應男·應福·應寅 등 5인이
다. 宣祖의 妃인 懿仁王后(1555~1600)는 應順(潘城府院君,1526-1580)의 따님이다. 朴世堂(1629~1703)은 應川의 曾
孫(東豪의 弟인 東善의 장자 炡의 아들이다)으로 燁과는 5촌간이니 곧 세당은 堂姪이다. 錦陽尉 朴瀰1592~1645)는 東
亮(1569-1635, 應福의 子)의 子이다. 박엽은 곧 광해와 姻戚間이 되는 것이다.
* 光海 世子 祗(1598~1623)의 嬪은 朴自興(1581-1623, 朴承宗의 자)의 따님이다. 박자흥의 장인이 李爾瞻
(1560~1623)이다. 梅山 洪直弼(1776~1852)은 朴燁傳을 남기었다. 朴燁傳에 “是所謂乃壞萬里長城者歟”라 하기도 하였
다. 朴燁은 2권 1책의 葯窓遺稿(약창유고)가 있다. 車天輅(1556~1615)의 五山集에 “送葯窓朴叔夜以元戎赴咸鏡南道(三
首)”라는 시가 있다.
* 번역은 이민수와 김성언의 국역대동기문과 한국 고전 번역원의 국역 청성잡기와 청장관전서를 참고하였음.
* 金墉之變(금용지변)- 金墉城은 洛陽 땅에, 위 명제(魏 明帝) 때 축조된 城으로, 晉 賈后가 폐위된 후 楊后(楊芷)가 옮겨
살았다. 임금과 후비(后妃)를 폐한 뒤 이 성에 유폐시킨 사례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여기서는 인목대비를 西宮에 유폐시
킨 후 폐위시킨 일을 말한다.
* 趙佗?~BC137)
중국 남월(南越)의 초대 왕.
진정(眞定: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정딩 현[正定縣]) 출신이다. 진(秦)나라 때 남해군(南海郡) 용천현령(龍川縣令)을
지냈으며, 진 말기에 남해군위(南海郡尉)가 되었다. 진이 멸망하자 남해군과 인근의 구이린[桂林]·상군(象郡)을 겸병해 남
월국을 세우고 무왕(武王)이라 칭했다. BC 196년 한(漢) 고조는 한나라를 일으킨 뒤 그를 토벌할 여력이 없자, 육가(陸賈)
를 파견해 그를 남월왕으로 봉했다. 후에 여후(呂后)가 철기 교역을 금지시키자 스스로 남월무제(南越武帝)라 칭하고 창사
[長沙] 등지를 공격했다. 문제(文帝) 때 제왕의 칭호를 버렸고 경제(景帝) 때 한의 신하임을 자처하고 사신을 파견해 조공
을 바쳤는데 지위는 제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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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燁傳 甲午 - 梅山先生文集 卷之五十一
朴燁 字叔夜 潘南人 文康公 紹之曾孫 參奉東豪之子也 燁生而聰穎絶倫 出語輒驚人 祖應川 嘗夜呼燈
命燁賦詩 應口而對曰 燈入房中夜出外 又從隣兒遊崔公有源第 値其出大書壁上曰 主人山上山 客子口中
口 崔公歸問 羣童皆畏不敢對 燁曰 吾所爲也 崔公見詩而心許 及聞以實對益奇之 稍長豪橫不羈 狎侮諸
少年出其右者 諸少年讋+伏無敢抗焉 母病革 燁進指血而甦 壬辰倭冦至 人皆鳥獸竄 燁負祖母避兵 備經危
難 旁救親族 得免於亂 時天朝將士久駐我境 見燁嫺'華語 且善屬文 每有酬唱 嘖'嘖+稱賞 至撤所乘 俾'赴試
圍 丁酉登文科 典職內外 功庸皆興 及從事于統制營 始統帥閱武 或數十日未能卒事 時吏又請期 燁曰 今
日須早閱會飮 統帥笑曰 此大事也 未嘗聞旬日而畢者 何言之易 燁曰 請爲公日中而畢 且從公遊 統帥許
之 燁令諸軍列戰艦洋中 從艦上各露兵刃向外 乃自從飛船擧砲而出 序列而閱其利鈍已 令出弓弩以待 擧
砲不數遭而事已訖 果日中而返 倐'忽如神 一營大驚 自是遂相踵 爲故事云 記性絶人 一見能終身不忘 以
量田使赴湖南 有問州縣田畒'多寡與其主名 占等高下者 輒應對如響 遂雜取田籍以問 亦不錯一字 人皆驚
服 爲咸鏡南道兵使 見城池矮陋 闢而大之 不踰月而告完 形勢壯偉 屹然爲關塞保障 及爲平山 亦諏形勝
築城 特命進秩 又爲平壤成川義州三邑 以黃海兵使陞平安道觀察使 燁莅'西土最久 令行禁止 遠近伏其威
及爲方伯 見關西爲朝天孔道 民物殷盛 又與女眞接壤 俗桀驁有與建虜闌+出入爲中詗'者 重以國家新去亂
上下苟幸姑息 以故邊郡無備 尤不可爲 於是益思振刷 凡有規畫鑿鑿中窾吏不能售'奸 每號令嚴峻 遇事
風生 一路股栗 皇朝人亦聞其治行 每見我人輒曰 使朴燁久於此 爾國無西顧之憂云 燁按道六載 爲治如
一日 於是名聲益著 虜相戒不敢近塞 時光海政亂 至有金墉之變 燁痛惋+輒形于色曰 觀李爾瞻所爲 終必
簒奪而後已 吾不可以坐視 至欲募人往刺之 及爾瞻以儐+使至 燁往瞻所 適有母告子不孝者 燁遂致其子於
庭曰 母子天性也 人而不知愛其親 卽王法所不容 自有天地以來 不知母而得保首領者 惟爾瞻一人 天下
豈有兩爾瞻哉 卽置之法 左右莫不震慄 爾瞻亦俛+首愕眙然卒不敢有螫也 壬戌建虜將謀東搶屯兵於江北
燁亦擁兵而前 虜問知爲燁 乃曰 吾爲遊獵而至耳 遂引去 神於譏詗虜動靜虛實 無不洞曉 常若目擊 或潛
取虜酋紅兜 飾金而還之 虜以爲神 終燁之世 不復逞其志 癸亥仁祖反正 時內亂甫靖 而衆志危疑 諸勳臣
謂燁之夫人與廢主爲姻親 不能無私於廢主 又慮威名太盛 乃曰 燁用法殘酷 威制西路 今不置辟恐有他
虞 有若變生於肘'掖 以濫殺爲罪 竟賜死 時都元帥韓浚謙開府中和 命元帥發甲兵捕燁 韓公曰 叔夜豈待
甲騎而死者哉 燁聞變不動 見元帥傳令 始下庭受命 而猶不知時事已改 謂金吾郞曰 願聞罪名而死 郞爲
言改玉 燁歎曰 諸功臣忍致我於此極耶 臨刑使人謂其妻曰 吾故無罪 今所以至此者 殆以夫人故耳 又取
管餉錢穀簿 使遺元帥營 盖慮身沒而有所乾沒也 遂促令繫頸 引索而絶 金藎國代爲觀察使 許民報仇 於
是怨家羣起 構變無不至 韓公見錢穀簿 流涕曰 爲國家任事如叔夜 而亦不免於禍乎 遂誅首亂者 朝廷聞
之 亦罪藎國而許其歸葬 始燁見金昇平瑬 贈紅氈與油瓢甚富 昇平未解其意 及擧義日 割紅氈爲標信 用
油瓢備士卒禦渴 燁已知有靖社之擧 可異焉 被禍前夜 遊營下之法首橋 有詩云 一路關西伯 千年法首橋
知應今夜月 長作可憐宵 盖讖也
外史氏曰 昏朝斁'倫 擧一世靡然和附 居廢主姻戚者 尤先意逢惡 惟恐或緩 而燁不惟不投合時論 又嫉之
如仇讎至面斥爾瞻而極矣 不究其情實 直以形跡疑似而置大辟是豈聖祖本意哉 金昇平諸人 恐不得辭其
責也 嚴酷嗜殺 固所以招禍 而嚴酷者豈盡死罪哉 功足以掩過 而不盡其用 惜哉 燁死後五年而有丁卯之
亂 又十一年有丁丑之亂 虜騎長驅 民莫敢格 人皆謂若使朴觀察在者 豈有是哉 閱二百載而一國之口同
豈有所私而然哉 當時有蔣童子者 隱於市肆 聞燁殺死歎曰 此盜之招也 慨惋+屢日云 是所謂乃壞萬里長城
者歟 曾謂元勳之謀國 反不若市肆之童子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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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毁 而後人毁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孟子 離婁章句上>
* 壞汝萬里長城<宋書, 檀道濟傳>
어리석은 생각에서 일을 그르치게 함.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 버린다는 뜻. 자신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는 사람을 순
간적인 욕심 때문에 없애버렸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송나라와 魏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송나라의 중신인 檀道濟의 위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아무도 그를 넘보지 못하
였다. 權臣과 왕족들이 이를 시기하여 왕명이라 사칭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할 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
을 내동댕이치며 “너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 하고 외쳤다. 과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계속 남쪽을 침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평안감사 朴燁을 仁祖가 죽였을 때 ‘괴여만리장성’이라고 통탄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박엽이 있는 동안은
감히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던 청나라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왔고,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청나라의 龍骨大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 한다. - 是所謂乃壞萬里長城者歟<朴燁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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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燁 少時 與余姪澈友善 與諸少年聚余家庭中 忽見縚熱水自外飛流過屋 瀉于衣冠 衆少年 驚怪之曰 必朴燁
夜來 出門觀之 燁 立廊外路上 撤溺過屋矣 燁 外家在木川 木川距京二百四十里 袖飯一器 日晩揮袂而去 日未昏
而至 其行 不疾不徐 無異於諸路人 只聞衣裾'隨風有聲而已 及治郡邑 威甚峻 官事立辦 所至有能聲 - 於于野譚,
宗敎篇 仙道(景文社 영인본 참고함). 外任, 慾心에도 박엽의 내용이 나옴.
※ 박엽의 시 한 수
南營送申敬叔還京(남영에서 신경숙을 서울로 보내면서)
歌低琴苦別離難 노래소리 갸날프고 거문고 소리 괴로워 헤어지기 어렵웁고
關月蒼蒼隴+水寒 관산의 달은 높다락히 아득하고 농수는 더욱 차가울진대
我與雪山留此地 눈 덮인 산과 더불어 나는 이 병영지에 남아있는데,
君隨西日向長安 그대는 저녁 해를 따라 임 계신 장안으로 돌아가심이여.
敬叔은 申欽(1566-1628)의 字이니 申敬叔은 象村 申欽을 말함이다. 朴燁과는 사돈간이기도 하다. 신흠은 평산
신씨로 반남 박씨 가와 姻戚관계이다. 박엽의 증조 冶川 朴紹(1493~1534)는 다섯 아들(應川, 應順, 應男, 應福,
應寅)이 있고, 손자에는 17명의 東字 항렬(東賢 東豪 東老 東俊 東民 東善 /東彦 懿仁王后朴氏 /東燾 東烋 東
點 /東尹 東說 東望 東亮 /東紀 東績 東緯)이 있는데, 朴燁은 應川의 둘째 아들 東豪의 아들이요, 應福의 아들
東說(1564~1622)과 東亮(1569~1635)은 象村과 사돈간이다. 상촌의 맏딸은 동열의 아들 朴濠에게, 셋째 딸은 동
량의 아들 朴漪'에게 출가하였다. 南溪 朴世采(1631~1695)는 곧 朴漪+의 아들이다. 상촌의 사위 박호, 박의와 박
엽은 6촌간이다. 또 상촌의 큰아들 東陽尉 翊聖(1588~1644)과 동량의 큰 아들 錦陽尉 朴瀰+(1592~1645)와는 동서
지간이기도 하다. 宣祖大王의 駙馬들이다. 선조(1552~1608)의 妃 懿仁王后(1555~1600)는 應順(1526~1580)의 따
님이기도 하니 燁의 姑母이다. 박엽(1570~1623)은 박소의 큰 아들 應川(?~1581) 계통이어서 출생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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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시는 大東詩選에서 가져온 것이나,
약창유고에는 <北靑送沈子順>(북청에서 심자순을 전송하며)이라 하였다.
沈子順은 友正의 아들 심집(沈諿+, 1569-1644, 字가 子順)을 가리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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