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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서원중건기(龜湖書院重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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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4-06 15:32 조회4,3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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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춘서


  
작성일 : 2010-04-05 오전 9:20:43   

구호서원중건기(龜湖書院重建記)
전주 북쪽 30리쯤 되는 곳에 독우산(督郵山)이 있으니 위가 높고 크며 바위를 이고 있어 마치 거북이가 물로 들어가는 형상과 닮았는데, 층층의 바위와 기이한 암석이 빽빽이 나무처럼 서 있다. 아래는 못이 있어 깊고 넓으며 또한 맑아서 수영도 할 수 있고 배도 띄울 수가 있다. 때로는 가마우지 갈매기가 모래톱에 춤추며 내려왔다가 뱃노래를 듣고는 혹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기도 하고 혹은 오락가락하면서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기도 하니, 사람이나 새들이 서로 물아(物我)를 잊은 것으로 참으로 한가한 세계이고 세속 밖의 절경이다.
인접한 촌락은 구호촌(龜湖村)이라고 하는데 바로 우리 박씨가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옛부터 사당과 서원, 집과 정자를 지을 때는 자연 경관과 세거지와 교화를 베풀었던 곳을 택하니, 송대(宋代)의 무이(武夷)와 고정(考亭), 우리나라의 백운(白雲)과 화양(華陽)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옛날에 물헌(勿軒) 웅씨(熊氏)가 고정서원(考亭書院)의 기문을 썼는데 “주(周)나라가 동쪽으로 옮긴 이후로 공자가 탄생하였고 송나라가 남쪽으로 피난한 뒤에 주희가 탄생하였으니 이는 세운(世運)이 흥하고 쇠하는 사이에는 하늘이 반드시 위대한 성인과 현인으로서 여기에 맞설 수 있는 자를 준비한 것으로 인륜 강상의 도리를 기탁한 존재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거짓되지 않는 말이다.
우리 돌아가신 문정공(文正公)은 여말에 태어나서 목은에게 사사하여 대도(大道)를 들었고 정포은(鄭圃隱) 김척약(金惕若) 등의 제현(諸賢)과 함께 교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연역하고 유생들을 교도하니 비로소 정주(程朱)의 학문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 서원은 영조 경술년에 창설되어 문정공 반남선생의 신주를 봉안하고 정순공(靖順公) 서암(怒菴) 이선생, 평도공(平度公) 조은(釣隱)선생[바로 문정공의 맏아들], 운곡(雲谷) 송선생,귀래정(歸來亭) 임선생, 문강공(文康公) 야천(冶川)선생[평도공의 5세손] 등을 동서로 배향하였다. 정조 원년 정유년에 상범(相範)이 처형될 때 무뢰배들에 의해 불에 탔다가 정조 22년 무오년에 완주(完州)의 사림이 다시 옛터를 개척하고 모금하여 착공하니 수개월도 안 돼서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제기를 경건하게 차리고 풍성한 제수와 맑은 술을 올려 신이 감통하셨으리니 우리의 도가 백성들에게 곡물이나 옷감처럼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종 무진년에 중첩해서 설치한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문정공은 반계서원(潘溪書院)에 함께 모시고 있었기에 헐리게 되었다. 그때에 사림들은 그 근거지를 상실하고 또한 도를 존숭하고 현자를 받드는 곳도 없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기사년에 신주(神主)를 옮기고 비석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고 추모의 정을 부치니 이를 백산단(栢山壇)이라고 하였다. 우리 할아버지 송석공(松石公)이 명사(明史)를 읽을 때마다 주희의 8세손인 순(洵)과 주(澍)가 분연히 선조를 계승하는 것으로 뜻을 삼아 각기 재산을 내어 사당을 중건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순(洵)과 주(澍)는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저 사람이 회암 선생의 후예라면 나도 반남 선생의 후예인데 머뭇거리며 세월만 보내니 저승에서 가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뵐까”라 하였다. 이렇게 자책할 때는 누워 자는 일이나 휴식하는 것도 잊었다.
갑진년에는 공의 고조인 창백선생(蒼栢先生) 종호재(從好齋) 임선생(林先生) 추재(秋齋) 유선생(柳先生)을 배향[追配]하고 구호(龜湖)라는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공이 사재를 기울여 강당을 만들고 중문당(中門堂)을 수리하니 모두 네 칸인 바, 동쪽과 서쪽에는 방을 만들고 나머지는 중앙의 대청으로 만들었다. 이 당(堂)의 이름을 백산(栢山)이라 하고 문에 편액을 달아 입덕문(入德門)이라 하여 백가(百家)의 책을 간직하였는데, 사방에서 온 유생들이 여기에서 숙식하고 공부하면서 좋은 날 좋은 시기에 향약(鄕約) 향음(鄕飮)의 예를 거행하니 문풍이 점차 진작되었다. 공의 뜻이 어찌 선조를 존숭하고 현자를 숭상하는 데만 그친 것일까. 그의 진의는 풍속을 바꾸는 데 있었던 것이다. 공이 돌아간 지 33년 경술년 봄에 몇몇 선비들이 서원 복구를 발의하니 고을의 사림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좋다고 하면서 즐거이 그 의견을 좇았다. 각기 재물을 내어 좋은 날을 가리고 공인을 모집해서 사월에 시공하여 팔월에 준공하였다. 오호라 서원 건물이 72년이나 적막하였다가 오늘 성대하게 지어져 다시 새롭게 될 줄 누가 기약하였으랴. 철폐되었다가 복원되고 복원되었다가 다시 철폐되었으며 서원이었다가 단(壇)이 되고 단이었다가 다시 서원이 되니 그 사이에 무슨 유감이 있을 것인가.
천도(天道)의 밝음과 어두움, 세운(世運)의 흥함과 망함, 그리고 오도(吾道)의 성함과 쇠함은 이수(理數)의 자연스러움이니 앞에 말했던 바 “우리 도(道)가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주실(周室)이 동쪽으로 옮겨갈 때에도 경술년이고 송조(宋朝)가 남쪽으로 피난갈 때도 경술년이며 이 서원이 창설된 때도 경술년이고 회복할 때도 경술년이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랴만 이치와 운수는 내 감히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선생의 도학과 훈업은 원지(院誌)에 실려 있고 게다가 부와(俛窩) 이도형(李道衡)의 상량문과 박사문(朴斯文) 인규(仁圭)의 원기(院記)에 자세하니 이에 췌언하지 않는다. 이 공사를 주도한 이는 장병룡(張炳龍) 전태연(全泰然) 이형구(李亨求) 전길권(全吉權)이고 감독한 이는 정완섭(丁完燮) 유창희(柳昌熙) 장대규(張大奎)이며, 일을 도운 이로는 이종명(李鍾明) 송경량(宋炅亮) 임병춘(林秉春) 임재홍(林在洪) 유한옥(柳漢玉) 박상양(朴祥陽) 박승운(朴勝雲) 박승렬(朴勝烈)이다. 나도 이 일에 외람되이 참여하여 전말을 자세히 알지만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기에 그 경개만을 기록하여 후세 문헌의 고증을 도우려 한다.
경술년 중양절(重陽節) 문정공 후손 박찬호(朴贊浩)는 삼가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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