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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공후 매괴공 제정 묘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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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4-09 16:57 조회3,7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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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정려를 받은 매괴당 반남박공(제정)묘갈문
         (梅槐堂 潘南朴公(齊政)墓碣文)
公의 諱는 齊政이고 字는 華汝며 自號는 梅槐堂이다
朴氏는 潘南에서 나왔는데 그의 17代祖 諱 尙衷은 贈領議政이고 諡는 文正公이고 16代祖의
諱는 訔이니 左議政으로 시호는 平度公이며 15世祖의 諱는 葵이니 禮曹參判이고 14世祖의 諱는 秉文이니 司直이며 13世祖의 諱는 林楨이니 府使고 8世祖의 諱는 惟智니 正郞이며 考의 諱는 天羽고 妣는 原州邊氏며 純祖27年 丁亥(西紀 1827年)에 公을 梅山里 집에서 生하니
幼時부터 特異하여 6,7歲때 이미 拜揖하고 進退하는 節次를 謁告 10歲때 外艱을 當해서 울부짖음이 成人과 같았다. 母夫人을 섬기는데는 즐거운 기색으로 하여 居處와 飮食에 그의 성심을 다해서 좋은 음식을 만나면 감히 먼저 먹지 안하고 비록 작은 일이라도 獨斷으로 하지 않으며 오직모친의 마음에 맞도록만 하니 향리에서 모두 특이하게 여겨서 郡守가 자주 米와 肉을 주고 襃獎하는 賞狀을 주기 위해 公議로서 그이 효행을 모두 列記하려하니 공이 듣고서 失色해 말하되 『子息이 養親함은 例事인데 내 무엇이 남과 달라서 이런일을 하는가요.이것이 나의不孝를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고 하고 간곡히 만류 하였다.
母夫人이 병이 드니 주야로 侍湯하여 대변을 맛보아 病의 차도를 알아보고 밤이면 沐浴하고 하늘에 빌어서 자신이 代死하기를 원하였다. 한때는 병이 위독함에 손가락을 끊어서 수혈을 하니 更生하였는데 그 후 수년만에 또 병이 나니 나이도 높고 병도 더욱 더하여 백약이 무효하니 공이 또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해서 병이 나아 7년이나 더 살다가 天壽로 생을 마치니 哭泣하고 毁瘠(훼척)하여 3년을 蔬食하고 20리 밖에 있는 墓所에 매일 참배하여 애통하는데 風雨와 寒暑를 가리지 않았으며 3년을 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朔望으로 省墓하였다 國喪에도 조석으로 擧哀하고 3년 동안은 宴會에 가지 않았다.
早年의 失父로 공부를 못해서 더욱 분발하여 과거 공부를 해서 여러번 시험을 봤으나 합격되지 못하고 만년에는 山林에 隱居하였다.高宗27年 庚寅(1890년) 10월 11일卯時에 卒하니 享年 64세로서 醴泉郡 서쪽 梧巖山 午坐의 原에 葬事하였다.
그래서 鄕道內의 搢紳(진신)들이 公의 篤孝至行을 泯滅시킬수 없다하여 連名으로 上疏를 하여 特別한 優待로 朝奉大夫 童蒙敎官의 贈職이 내렸다.配는 英陽南氏로서 令人으로 贈職되고 因해서 그이 門에 旌閭를 세우도록 命했다. 六男一女를 두었으니 男은 台陽 奎陽 箕陽 斗陽 軫陽 心陽 등이고 女는 士人 秦秉灝에게 시집갔다,台陽이 그의 懿蹟(의적)이 나타나지 않음을 痛惜히 여겨 奔走하게 呼訴한지 여러 해 만에 이미 贈職이 내려지고 旌閭를 세웠다. 그리고 또 墓道에 碑石을 세우려 하니 이또한 효자다.
나를 평소에 친분이 있다고 해서 碑文을 請託하니 여러 번 辭讓해도 더욱 부지런히 요청하기에 行狀을 참고 하여 위와같이 敍述하였으니 거의보는 자들은 묘소인 줄은 알 것이다.

                                         前司憲府持平 聞韶 金興洛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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