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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연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박한주
박한주(?-1504)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천지,
호는 오졸자이다. 6, 7세가 되자 글을 짓고 시를 읊었다.
성종 16년(1485)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을 역임하고 예천군수로 나갔는데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좋아했다. 이에 연산군이
그를 내직으로 불러들여 간관으로 임명하였다.
박한주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종묘, 사직과 능침에는 한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무상으로 베풀어서 밤을 낮으로 삼아 계속하시니
효도하는 도리에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산군이 말하였다.
"눈병이 있어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후원 안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를 하며 용봉장막을 쳐 놓고
연회를 벌일 때가 그처럼 많은데 주상께서 어찌하여 눈병이 났다고
말씀하십니까"
연산군이 발끈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박한주가 대답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이어서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함을 논하다가 마침내
모함을 받아,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무오사화 때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홀아비로 살 적에 기생을 거절한 이자건
이자건(1455-152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건지이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를 모시던 기생이 있었는데, 이자건이 홀아비가 되자 그의 집에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집에 딸아이가 둘이 있어 기생과 함께 살 수 없다"
이자건은 기생을 물리치며 돈과 물품을 후히 주어 돌려보냈다.
연산군 때 직언을 하다 미움을 받아 선산에 귀양갔는데, 선산
부사가 매우 박대하였다.
하루는 의금부의 관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부사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이자건이 살고 있는 집을 에워싸고 이자건을 불러 뜰 아래에 꿇어
앉혀 놓고 온갖 방법으로 다그치고 욕보였다.
그런데 의금부 관리는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의금부
관리가 지나간 뒤에, 부사는 열쩍어 하며 돌아갔다. 뒤에 이자건이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그 수령이 마침 안악군수로 있다가
이를 알고 사직하고 떠나려 하였다. 이자건이 안악군에 당도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해 타이르니 그 수령이 감읍하였다 한다.
벼슬은 공조,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간이다.
병풍에 시를 썼다가 죽음을 당한 임희재
임희재(1472-1504)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여,
호는 물암이다. 간신 임사홍의 아들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는데, 이 해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텐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나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 알지 못하고
오랑캐 막으려고 부질없이 만리장성 쌓았구나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씌어 있는 시를 보고
물었다.
"누가 쓴 것인가?"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이 성을 내며 말하였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사홍이 꿇어앉아 말하였다.
"이 자식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은 상감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바로잡으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임희재는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비 임사홍은 희재가 사형 당한
그날도 평일과 다름없이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먹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연산군이 그런 사실을 탐문해 알고는 임사홍을 더욱 총애하였다.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었고, 넷째 아들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었다.
임숭재는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다가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다.
임금이 자주 임사홍의 집에 들렀는데, 어느 날 임사홍이 울면서 고해 바쳤다.
"폐비 윤씨가 엄 숙의, 정 숙의의 참소로 인하여 사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엄 숙의와 정 숙의를 죽이고 조정의 선비 백여
명을 죽였다.
시인이 시를 지어 임사홍 부자를 비방하였다.
작은 임가 숭재와 큰 임가 사홍은
천고의 간웅 중에 가장 큰 간웅이네
천도가 돌아오면 갚음 응당 있으리니
네 뼈 또한 바람에 흩날려짐을 알겠도다
처사 조광보가, 연산군이 임사홍을 총애하여 그가 권한을
휘둘러서 조정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송당 박영에게 말했다.
"너는 무부인데, 어찌하여 이놈을 죽이지 않느냐. 네가 죽이지
않으면 나는 너를 죽이겠다"
"한 적을 목베어 나라의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지만, 후일 역사에 '도적을 죽였다'라고 쓰면
어찌하겠소"
송당이 답변하자, 조광보가 웃으며 일어났다.
연산군으로부터 큰 소인이라고 비난받고 시체가 강물에 던져진 조지서
조지서(1454-1504)의 본관은 임천이고, 자는 백부,
호는 지족정이다. 성종 5년(1474)에 생원시에 장원, 진사시에
2등을 하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동왕 10년 중시에
장원하였다. 집안 대대로 진주에 살았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에 허침은 필선으로, 조지서는
보덕으로 같이 강관이 되었다. 연산군은 날마다 놀이나
장난을 일삼고 학문에는 전념하지 않았다. 조지서는 빗대어 타이르기를
간절히 하다가 세자로부터 미움을 많이 당하였다. 세자에게 강의를
할 적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힘써 타일렀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연산군은 그를 매우 괴롭게 여겨 원수처럼 대했다. 하루는 강의를
하기 위하여 동궁에 입시 하였다가 벽 쪽을 쳐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조지서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조지서는 외직의 보임을 청하여 창원부사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지리산
아래에 터를 잡아 정자를 짓고, 편액을 '지족정'이라 하였다.
만흥시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을이면 맑은 밤에 시간쪽지만 세고
아침이 되면 발을 걷어 뾰족한 산 대하네
꾀꼬리는 저녁빛 머금고 깊은 숲에서 울고
제비는 얕은 그늘 후리치고 짧은 처마에 들어오네
초야에 은거함은 게으름에 익숙한 것임을 알겠고
집이 가난함은 내 청렴을 위해서가 아니네
평생의 장대한 뜻 다 사그라져 없어지니
거울에 늙은 수염 비춰 보니 부끄럽구나
갑자사화 때에 정성근과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강물에
시체가 던져지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조지서의 부인 정씨는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갑자사화 때 조지서가 정성근과 함께 잡혀갈 때 스스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술잔을 들어 부인과 작별하면서 말하였다.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조상의 신주를 어찌하겠소?"
부인이 울면서 대답하였다.
"죽음으로써 내가 보전하겠습니다"
조지서가 죽고 가산이 적몰되자, 조지서의 장인 정윤관이
딸에게 말했다.
"집이 이미 패망하였는데 어찌 친정으로 돌아오지 않느냐"
"죽은 그분이 나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제가 죽음으로써
보전하겠다고 승낙하였으니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정씨 부인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초야를 떠돌아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고, 손수 나무 열매를
주워서 아침, 저녁으로 곡읍하고 전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중종은 조지서를 도승지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정려문을 지어 정씨의 열행을 표창하였다.
익살과 풍자로 연산군에게 간언한 표연말
표연말(?-149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소유,
호는 남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17년에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호당에 들어가서 사가독서(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제도)하고
검열이 되었다. 벼슬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하루는 강가에 나가 놀다가 배를 타고 용산으로 내려가려
하였는데, 표연말이 노를 붙잡고 간하였다.
"육지로 해서 가면 안전하고 배를 타고 가면 위태로우니,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로 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사공을 시켜 노를 빼앗게 하니, 표연말이 물속에
뛰어들었다.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건져낸 후 물었다.
"네가 무엇하러 강물에 들어갔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초희왕의 신하 굴원을 만나려고 뛰어든 것입니다"
연산군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과연 굴원을 보았느냐?"
표연말이 대답하였다.
"그를 만나 보았는데, 굴원이 시를 주었습니다"
"무슨 시냐?"
나는 어두운 임금 만나 강물에 빠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 만나 무슨 일로 왔느냐
익살로 넌지시 간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뒷날 함양의 전사에 물러가 살았는데, 연산군이 군현에
명하여 역마를 주어 불러 올리니, 표연말이 시를 읊었다.
새로 지은 서당의 벽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발굽이 나를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가게 하네
아이 때엔 벼슬하는 것이 좋다고만 말했는데
늙어 가니 세상살이 어려움을 알겠네
천리 밖의 고향은 천리 밖의 꿈이요
한번의 비바람에 한번의 추위 닥치네
어느 때에 산림 속에 조용히 앉아
푸른 대나무, 오동나무 자세히 살펴보려나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경원에 유배되어 죽었다.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말라"하며 사들인 땅을 되돌려 주게 한 윤석보
윤석보(?-1505)의 본관은 칠원이고, 자는 자임이다.
풍기군수로 있을 적에 아내와 자식들은 풍덕의 시골집에
그대로 살았는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부인 박씨가 대대로 전해 오던 비단옷을 팔아 한 마지기의 땅을 사들였다.
윤석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사들인
땅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옛날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도 더 늘리지 않음으로써 그 임금을
저버리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지금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면
서 임금의 녹을 먹고 있는데 전지와 주택을 마련하도록 해서야 되겠소"
부인이 할 수 없이 그 땅을 되돌려 주었다.
벼슬은 직제학에 이르렀다.
자라 여덟 마리를 살려주고 아들 여덟을 얻은 이원의 아버지
이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낭옹, 호는 재사당이다.
성종 20년(1689)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다. 사람됨이 당당하여 절의를 위해 죽을 만큼 지조가 있고,
나이 어린 임금도 맡겨 부탁할 만한 사람이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으로 하자고 의논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원지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처형 당했다. 추강 남효온이 늘 그를 칭찬하였다.
"익재(이제현의 호)의 후손이고 취금헌(박팽년의 호)의
외손자로 두 집의 어짊이 이 한 사람에게 모였다"
아버지 현감 공린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가 나타나 말하였다.
"내 자식 여덟이 바야흐로 삶겨 죽으려 하니, 원컨대 풀어 주어 삶기지
않게 해주소서"
공린이 꿈에서 깨어나서 이상하게 여겨 그 아내에게 묻자, 아내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를 주기에 내일 아침에 국을 끓이려 합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라를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 뒤에 과연 아들
여덟을 낳았는데, 별, 귀, 오, 타, 원, 경, 곤, 용으로
모두 재명이 있었다. 오는 진사가 되었고 귀는 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의제문으로 유배되고, 지난 일로 부관참시 당한 조위
조위(1454-150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태허,
호는 매계이다. 성종 3년(1472)에 생원과 진사가 되었고, 성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사국에 들어갔으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 4년(1498)에 하정사로 중국 연경에 가서 미처
돌아오기 전에 사화가 일어났다. 그가 일찍이 김종직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서 뽑아 내어 '점필재집'에 수록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연산군이 노하여 조위가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즉시 목베어 죽이라고 명하였다.
조위가 요동에 이르러 그 말을 들었는데, 일행들이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위의 아우 신이 요동 지방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길흉을 물어 보니, 점쟁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 줄 뿐이었다.
천충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나오지만 바위 아래에서 사흘 밤을 묵으리
조신이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조위가 말하였다.
"첫 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뜻인 듯하나, 다음 구절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다"
압록강에 당도하자, 정승 이극균이 힘을 써 죽음은 면하고
의금부 도사가 잡아가 국문 하였다. 곤장을 맞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에 이배되고 연산군 9년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자 고향인 금산에 장사지냈다.
갑자사화 때에 전의 죄를 추록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어 무덤 앞 바위 밑에 끌어내어 두고 사흘 동안이나 바깥에 드러내
놓게 되었다. 조신이 그제서야 그때의 점쟁이의 말이 징험이 있음을 알고
신기하게 여기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영의정의 청을 거절한 올곧은 부사 정붕
정붕(1469-1512)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운정,
호는 신당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가 되고 성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과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다.
무령군 유자광이 간교하고 탐욕한 짓을 하여 방자하였는데,
정붕이 고종사촌간이라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을 그 집에 보낼 적에는 반드시 감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그것을 풀어 주었다. 그것은 여종이
아픔을 느껴 급히 갔다가 빨리 돌아와서 그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영덕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교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가다가 중도에
병을 핑계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누차 나라의 부름이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뭇 마음을 놀라게 하는 무서운 일이 있으니, 나의 고향 마을에
물러 나와서 내 마음을 안정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교리로
대궐로 나아가는데, 서각대를 띤 재상이 앞에 있었는데, 그는
기묘사화 주모자의 한 사람인 홍경주였다. 내가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 물러 나왔다"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송부사에 제수 하였다.
성희안이 젊은 시절에 정붕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이어서 잣과 꿀을 요구하자, 정붕이 회답하였다.
"잣은 높은 산봉우리 맨 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안에 있으니,
수령된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구하겠습니까"
성희안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정붕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묘에 있는 신주의 위판이 절로 옮겨지는 꿈을 꾸었다"
이 말대로 연산군이 황음하고 난잡하여 성균관을 잔치하는
장소로 삼고 신주의 위패를 깊은 산중의 절로 옮겨 놓아
제사가 오랫동안 끊겼다.
강혼과 심순문이 모두 가까이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정붕이 두 사람에게 경계하였다.
"어서 그들을 멀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강혼은 그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정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죽었다.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평생 김종직을 미워하며 옛 원한을 앙갚음한 유자광
유자광(1441-1468)의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복이다.
부윤 유규의 서자이다. 날쌔고 힘이 세며
어려서부터 무뢰한 행동을 잘 하여 유규가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본이 미천한데다가 방종하고 패악스러웠다.
애초부터 갑사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천거하자 세조가 그 기개를 장하게 여겨 그를 발탁하여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세조 14년(1468)에 문과에 장원하고, 또 남이가
역모한다고 고발한 공으로 훈작을 받아 무령군에 봉해져서 1품에 뛰어올랐다.
천성이 음흉하고 잔악하였다. 한명회의 왕성한 활약을 시기하고,
또 성종이 간언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소를
올려 한명회가 권세를 휘두르는 정상을 고자질하였는데, 성종이 그것을
죄주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 박효원 등과 현석규를 모함하려다가
모의가 실패하여 동래로 귀양갔다.
한번은 함양에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에
새겨 걸어 두었다. 그 뒤 김종직이 이 고을의 군수로 와서는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 시를 판에 새겨 건단 말인가" 하고는 화를
내며 떼내어 불태워 버리니 유자광이 분히 여기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감종직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융숭하던 때라 도리어 교분을
맺었고, 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면서 당나라 한유와
수나라 왕통에 견주었다.
김일손이 김종직에게 수업했는데, 소를 올려 이극돈을
논박하였다. 사국(사관이 사초를 꾸미는 곳)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를 발견하고는 유자광과
함께 노사신, 윤필상을 찾아가 밀고를 기약하고 밤낮으로
죄안을 짜내어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무릇 김종직의 글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게 하여 빈청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각 도의 관청에 걸려 있는 현판을 모두 뜯어버리게 함으로써 함양
관청의 옛 원한을 보복하였다.
중종반정 후, 유자광이 훈적에 기록되었다. 얼마 못 가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탄핵하니 드디어 귀양을 갔는데, 두 눈이 전부
어두워진 지 수년만에 죽었다.
마부의 옷을 입고 중종을 위기에서 건진 연산군
영산군 전은 성종의 열 셋째 아들이다. 중종이 진성대군으로
있을 때에 연산군을 따라 곰 사냥을 했는데, 폐주 연산군이
진성대군에게 말하였다.
"나는 홍인문으로부터 들어오고 너는 숭례문으로부터
들어오되, 만일 나보다 뒤에 들어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중종이 크게 두려워하자 영산군이 비밀히 고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말이 임금의 말보다 훨씬 빠른데, 내가 아니면
몰지 못합니다"
그가 드디어 마부의 옷으로 바꾸어 입은 뒤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렸다. 대궐에 이른 지 조금 뒤에 연산군의 말이 이르러
진성대군이 마침내 죽음을 면하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영산군과 말이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나왔다"
연산군에게 극력 간하다가 호랑이 밥이 된 내시 김처선
김처선(?-1505)은 내시이다. 연산군은 그가 간할 적마다
노여웠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한번은 궁중에서 연산군이 처용
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김처선이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극력 간하였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
통해 상감처럼 하신 분은 없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한껏 당겨 김처선의 갈빗대를 쏘아 맞추자,
김처선은 말하였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하실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또 김처선에게 쏘아 맞히고 나서 그 다리를
잘라 버리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다. 김처선이 연산군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상감은 다리가 잘려지고서도 다닐 수 있으십니까?"
연산군이 그 혀를 잘라 버리고 친히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그 시체를 범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리고 조정과 민간에 명령을 내려
'처선' 두 글자를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 10년에 갑자정시에 충정공 권벌이
책문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얼마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자가 있음을 깨닫고 아뢰어 삭제해 버렸다.
그후 한 내시가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절에서 잤는데, 밤중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서자 한 늙은 내시가
고개를 들고 들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곧 김처선이었다. 놀랍고 두려워서
연유를 물었더니, 김처선이 말하였다.
"내가 원통하게 죽은 뒤로부터 혼백이 죽지 아니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이 산에 붙어 노닐고 있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 때의 제현이
모두 억울함을 풀었으나, 홀로 나에 대해서는 충심을 밝힐 수
없어 아직까지 신설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니, 그대는 이를 어여삐 여겨 주게"
그 내시가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어 중종 2년(1507)에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
홍귀달의 원혼을 따뜻한 술로 달래 보낸 송질
송질(1454-1520)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가중이다.
성종 8년(1477)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사화 때 문광공 홍귀달이 사사의
명을 받았다. 이때 송질이 용천역에서 유숙하였는데, 밤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멀리서 달려와 말하였다.
"가중은 자는가?"
송질이 그 소리를 듣고 홍귀달임을 깨닫고 물었다.
"겸선(홍귀달의 자)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며 홍귀달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였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날씨는 춥고 시체는 얼었으니, 따뜻한 술이나
한잔 주게"
송질이 곧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앞에 놓아두었더니, 훌쩍훌쩍 둘이
마시는 소리는 들리나 술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추운 기운이 조금 풀리었으니 매우 고맙네"
이윽고 홍귀달이 작별하고 떠나갔다.
3. 왕도정치의 시작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니,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 소리로 항언하였
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영욕이 번복되는 일생을 살았던 정광필
정광필(1462-1538)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사훈, 호는 수천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고 녹사, 직장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는데, 작은 벼슬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직무에 이바지하였다.
좌의정 이극균이 그를 한번 보고 재상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이극균이 성종실록 총재관이 되자 정광필을 도청으로 발탁하여
편찬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이로부터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렸다.
정광필이 탁영 김일손과 함께 호남, 영남 어사의 명을 받고 용인을
지나면서 같은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탁영이 시사를 강개히 비판하는데
과격한 말이 많으므로, 공이 누차 그를 말렸다.
"그렇게 과격하게 말하면 안 되네"
탁영이 분연히 말했다.
"사훈이 이런 비열한 논의를 하다니. 어찌 갑자기 기개와 절조가
없는 썩은 선비가 되려는가"
정광필이 암행하여 진도에 도착했는데, 벽파정에
이르러 짐짓 느긋하게 지체하며 해가 저물었음을 핑계하고 나룻가
여관에 유숙하였다. 나룻가 백성이 정광필이 비상한 인물임을 정탐해
알고 관아에 달려가서 이를 알렸다. 진도 군수는 각 담당 아전에게
명령하여 밤새도록 장부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 무렵에서야 천천히 진도군 관아에 들어간 정광필은
오직 공용의 숟갈 몇 벌을 조사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는데, 그 군수는
죄를 받아 파면되었다.
어떤 사람이 암행어사가 조사를 천천히 시행한 까닭을 물으니,
정광필이 말했다.
"진도군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고, 군수 또한 무관이므로
반드시 법규 이외에 횡령한 것이 많을 것이다. 만일 곧바로 관아에
들어가서 문부를 수색하여 잡아내면 저 군수의 죄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는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아량에 감복하였다.
연산군 때에 소를 올려, 여색과 사냥이 너무 과도함을 간하였는데
기탄없이 범하는 말이 많았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네가 어찌 나를 망국의 임금에 비하느냐?"
연산군이 역사에게 명하여 정광필의 머리를 꺼둘러 내려서 그를
치게 하고, 자신은 칼집에 든 칼을 가져다가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명하였다.
"내가 칼집에 든 칼을 다 뽑는 것을 보거든 곧 처형하도록 하라"
이어서 천천히 칼을 뽑는데, 서릿발 같은 칼날이 사람을 비추어서
번쩍번쩍하며 거의 다 뽑혀 나오니 옆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었고, 역사는 바야흐로 도끼를 들고서 그 칼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한치의 착오도 없었다. 연산군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며 감탄하였다.
"참으로 열사로다"
연산군은 그를 마침내 아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법령이 준엄하여
귀양간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정광필은 빗자루를
들고 관청의 문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빛이 없었다.
중종 즉위년(1506)에 함경도 관찰사로서 찬성이 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정승이 되었다. 동왕 14년 겨울에 공이 북문의 변고(기묘사화)를
혼자 당하여, 벽력 같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여 가면서 형벌을
완화하도록 간청하였다. 그 때문에 사림이 어육이 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의 하루 전 새벽에 남곤이 해진 갓과 거친 베옷을 착용하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정광필의 집에 와서 문지기를 불러 말하였다.
"급히 들어가서 손이 왔다고 말하여라"
문지기가 남곤임을 알고 들어와서 고하였다.
"손이 문 앞에 당도하였기에 그 얼굴을 보니 남 판서입니다.
그런데 의복과 갓이 초라하여 천인처럼 보입니다"
정광필이 나가서 보니 과연 남곤이었다.
"공이 어찌하여 이런 모습이오?"
이상히 여긴 정광필이 묻자, 남곤이 그런 차림을 하고 온 까닭을 다
말하였다.
"이 신진사류들을 만일 한 사람이라도 남겨 두면 그 해독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상께서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할 것이니,
공은 주상의 뜻을 힘써 따라서 그들을 남김없이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뒤에야 국가의 형세가 안정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위협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달래기도 하였다. 정광필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재상으로 천인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지나서 왔으니, 아주
놀랄 만한 일이오. 또한 사림을 해치기를 도모하는 것은 본디 내 의사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는 거요"
남곤이 크게 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날 밤 2고에 임금이
신무문을 열고 여러 재신들을 불러들였다. 정광필은
수상으로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왕을 대할 적에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였다.
"젊은 선비들이 시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옛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에 시행하려 하였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너그러이
용서해 주소서"
말할 적마다 눈물이 흘러 옷자락을 적시니, 임금이 벌떡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정광필은 왕을 따라가서 어의 자락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계속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공은 또 남곤 등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들이 성주를 보필하면서 어찌 유자광의 일을 행하려 하는가"
정광필은 정승 신용개와 친밀한 금란지교였다. 주상이 정광필에게 물었다.
"경에게 벗이 있소?"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신은 다른 벗이 없고 오직 신용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후일 신용개가 왕에게 들어가 대할 적에 임금이 또 그에게 물으니
신용개가 대답하였다.
"정광필이 곧 신의 벗입니다"
"두 사람은 지기지우라 할 만하다"
기묘사화 때에는 신용개가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정광필이 탄식하였다.
"만일 신공이 있었으면 반드시 이 화를 진정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가
일찍 죽어서 나로 하여금 혼자 담당하게 하였다"
당초 현량과를 설치하려 할 때에 정광필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현량과의 명목이 좋기는 하나, 삼대(하, 은, 주) 이후에는 진실로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듣지 않고 시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온 조정이 그 현량과 파하기를 청하되, 정광필이 홀로
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자 임금이 물었다.
"경의 소견이 매양 시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신이 당초에 굳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이미 현량과를
설치하여 홍패(대과의 합격증서)를 주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어찌
파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설치하고 파하는 것은 국가의 정령이니
이처럼 전도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끝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어 정광필은 정승의
직에서 파면되었다.
중종 22년(1527) 남곤이 죽자, 다시 정승이 되었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자, 정광필을 죄를 얽어서 죽이려는 속셈으로, "정광필이
일찍이 희릉총호사(희릉은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임)가
되어 선후(장경왕후)를 좋지 못한 곳에 장사지냈다"고 얽어
죄를 만들어 중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김해로 귀양 보내도록 명했다.
정광필이 이보다 앞서 이미 벌을 받아 파직되어 회덕현에
돌아가 있었는데, 뜻밖에 의금부 도사가 급히 달려왔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 눈물을 흘렸지만, 정광필은 바야흐로 손님과 육박(쌍륙) 놀이를
하면서 호로를 그치지 않았다. 육박놀이를 마치자, 유배의 명을
반포하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성상의 은혜가 지극하십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자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이튿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날 적에도 말이나 얼굴빛에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광필이 젊을 적에 꿈에 시를 지었다.
비방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되 마침내 용서받았으니
이승에서는 임금 은혜 보답할 길 없구나
높은 재 열 번 넘으니 두 줄기 눈물이요
큰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에는 검은 구름 피어오르고
망망한 큰 들판에는 항아리 쏟듯 비가 오네
저물녘에 바닷가 동쪽 성 밖에 투숙하니
초가집은 쓸쓸하고 대나무로 문 만들었네
비가 오는 가운데 유배지에 당도해 보니 그 정경들이 모두 꿈에 지은
시의 내용과 같았다.
유배지에서는 화가 조석 사이에 박두해 있어 자제들은 다 공의 배소에
문안을 오고 오직 부인이 집에 있어 울부짖으며 여종을 시켜
원계채에게 소식을 탐문하게 하였다. 원계채는 곧 연혼한
처지이다. 원계채는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점쟁이 김효명을 불러 점을 쳤다.
"아직 10여 년의 복록이 있으니 조정 의논이 준엄하기는 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점쟁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처벌을 주장하는 대간의 논의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 여종이 점쟁이를 붙들고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일이 이미 이와 같은데 네 말은 무슨 뜻인가?"
"나의 술법대로 추산해 보면 이런 이치는 만에 하나도 없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으니, 난달 어찌하겠는가"
감효명은 재빨리 달아났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대간의 계청이 윤허를 받았는데, 대간이 이미 흩어진 뒤에
'죽음에서 감형하라'는 전교가 특별히 내렸습니다"
중종 32년(1537)에 김안로가 세력을 잃자 임금이 공을 영중
추부사로 불렀다. 하인이 저보(관보)를 가지고 급히
달려 밤중에 배소에 이르렀는데,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서 쓰러진 채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두려워하며 주머니를 뒤져서 글을 보니
기쁜 소식이었다.
곧바로 아뢰니, 공은 다만 "그러냐?"라고 할 뿐, 그대로 코를 골며
달게 잤다. 이튿날 아침에 그 글을 보고 도성으로 돌아오니, 도성 사람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반기며 기대하였다.
정광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식사할 적마다 그 남은 밥상을
오직 손자 유길과 증손자 지연에게만 주어 먹게 하고
다른 자제들은 끼지 못하게 하였다. 가까운 친척 조카인 이헌국이
문안을 드리자, 공이 바야흐로 식사를 마치며 자세히 살펴보고
그에게 거두어 주었다. 여종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분도 정승이 될 것인가"
과연 뒤에 그도 정승의 지위에 이르렀다.
"젊어서 사직을 기울게 하였다"라고 시문을 고쳐 단 심정
심정(1471-1531)의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정지,
호는 소요당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8년(150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반정 때에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화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배하여 좌상에 이르렀다.
기묘사화(1519) 뒤에 소요정에 물러나 있을 적에 시를 지어
판에 새겨 정자 문미에 걸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젊어서 사직을 붙들었고
백수에 강호에 누웠도다
어느 날 밤 꿈에, 젊은 협객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심정의
머리카락을 꺼두르고 죄목을 열거하며 꾸짖었다.
"네가 사화를 일으켜 착한 선비들을 거의 다 죽여서 종묘 사직이
쓰러질 뻔하였는데, 네가 어찌 감히 '사직을 붙들었다'느니 '강호에
누웠다'는 등의 말로 시를 지어 건단 말인가. 네가 만일 '부'자와
'와'자를 빨리 고치지 않으면 내가 네 목을 벨 것이다"
심정이 엎드려 사죄하면서 말하였다.
"'부'자는 '위태롭다'는 '위'자로, '와'자는 '엎드려 숨어 있다'는
'칩'자로 고치는 것이 어떻겠소?"
젊은 협객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글자로 고쳐야 하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기 바라오"
"'부'자는 '기울어져 망하다'는 '경'자로 고치고, '와'자는
'더럽히다'는 '오'자로 고치라"
"명령대로 따르겠소"
심정은 협객이 말한 그대로 고쳐 놓았다.
심정의 5세손 노가 지은 '소요정감고시'의 한 연구에
옛 한은 바닷물도 씻기 어렵고
새 시름은 술로 풀려 한다
하였으니, 대개 선조(심정을 말함)의 허물을 생각하면서 한탄의
뜻을 담은 것이다.
꿈을 빙자하여 형의 재산을 빼앗은 심의
심의(1475-?)는 좌상 심정의 아우이다. 자는 의지이고 호는
대관재이며, 문장에 능하였다.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벼슬은
이조 좌랑에 그쳤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바보로 자처하며 자기 재능을 숨기고 삶으로써
화를 면하였다. 한번은 형 심정의 집에 이르러 쥐구멍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형에게 말하였다.
"형이 훗날 이 쥐구멍으로 나가려 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니, 오늘
시험삼아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심정이 복성군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심의가 와서 울며 말하였다.
"쥐구멍이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습니까"
심정이 비록 남을 시기하고 해치기는 했으나, 형제간의 우애는 천성으로
지극하였다. 심정이 한번은 남곤과 조그마한 정자에서 무슨
일을 상의하고 있는데, 심의가 창문을 밀어젖히며 말하였다.
"두 소인이로다"
남곤이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심정은 태연히 말하였다.
"내 아우가 본디 천치이니, 공은 용서하시오"
심의는 형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성대하여 전지와 동산을 많이 지닌
것을 보고 마음으로 매우 좋지 않게 여겨 꾀를 내어 속임수로 뺏으려
하였다. 하루는 심의가 새벽에 일어나서 울며 말하였다.
"꿈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작은
아들이어서 아무 데에 있는 전지와 아무 종을 너에게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 일이 가슴에 맺혔구나' 하시므로 제가
돌아가신 아버님 때문에 슬피 웁니다"
"부모님이 너를 생각함이 지극하셨는데, 내가 어찌 이 재산들을 아껴
지하의 부모님 영혼을 위로하지 않겠느냐"
심정이 크게 감동하여 즉석에서 문서를 만들어 심의에게 주었다.
심정이 뒤에 심의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 심의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거짓 슬퍼하는 체하면서 말하였다.
"꿈에 아버님께서 말씀하기를 '전지와 집, 노비를 너에게 모두 부쳐 주려
하였는데, 미처 조치하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하시니, 내가
이 때문에 슬피 운다"
"봄꿈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심의가 말하자 심정은 크게 웃을 따름이었다.
심의가 서경덕, 성세창과 벗이 되었는데, 성세창은
그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심의가 그의 정원에서 세 필의 명주를 볕에
바래는 것을 보고 몰래 가져가자, 성세창의 여종이 소리를 쳤다.
"심 좌랑이 명주를 다 가져갔습니다"
성세창의 부인이 재빨리 다른 명주 세 필을 보내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웃옷을 만들려 하던 것이니, 이것으로 바꿉시다"
"이미 웃옷감을 얻고 또 속옷감마저 얻었으니, 부인이 내 마음을 압니다"
심의가 짐짓 사례하고, 대여섯 몫으로 갈라 길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국 사신을 경탄케 한 시단의 노장 이행
이행(1478-153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택지,
호는 용재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26년(1530)에
좌상에 이르렀다. 이행은 신장이 10척이고 얼굴이
네모지고 얼굴에 수염이 더부룩하였는데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
아래 청학동에 집을 짓고 자호를 '청학도인'이라 하였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퇴청하고 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니는데 그 쓸쓸한 모습이 마치 시골 늙은이와도 같았다.
어느 날 의정부의 아전인 녹사가 어둠을 이용하여 기별을 전할
적에 어떤 사람 하나가 짚신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어린 동자를
거느리고 청학동 어귀에서 나오므로, 말을 타고 지나면서 물었다.
"정승이 있는가?"
"기별을 전하려는 것이냐? 내가 여기에 왔노라"
녹사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다.
이행이 한번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었다. 중국
사신이 이행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예를 잘 갖추지 않다가 그가 화답한
시를 보고서야 비로소 깊이 감복하였다. 그가 자기 부사에게
편지를 써서 주며 당부하였다.
"이 사람은 시단의 노장이니, 절대로 가벼이 시를 짓지 말라"
김안로가 모함하여 함종으로 귀양보내어 유배지에서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시호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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