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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박공과 부인 임씨의 합장 묘지명(大司憲朴公夫人林氏合葬墓誌銘)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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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6-20 06:59 조회4,6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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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박공과 부인 임씨의 합장 묘지명(大司憲朴公夫人林氏合葬墓誌銘) 병서

이 묘는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증(贈)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반남부원군(潘南府院君)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박공(朴公)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임씨(林氏)를 합장한 묘이다.

공의 휘는 응복(應福), 자는 경중(慶仲)이다. 박씨는 옛 신라의 국성(國姓)으로 동방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 상충(尙衷)이라는 분이 있어 곧은 절조로 명성이 드러나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 일컬어졌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은(訔)이 태종대왕을 섬겨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증조 임종(林宗)은 첨지중추부사이고, 조(祖) 조년(兆年)은 이조 정랑이며, 고(考) 소(紹)는 사간원 사간이다. 비(妣)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명망 높은 족벌로, 시정(寺正) 사부(士俯)의 딸이며 대사헌 흥(興)의 손녀이다.

정랑공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종유하여 세상의 명인(名人)이 되었다. 사간공은 전광(前光 전대(前代)의 미덕(美德))을 배태(胚胎)한 분으로서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일찍이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나아가 배웠고, 간관의 반열에 올라서는 김안로(金安老)를 간사하여 쓸 수 없다고 배척했다가, 마침내 그들에게 밀려나서 죽었다. 이분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곧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으로 의인왕후(懿仁王后)를 탄생시켰으니, 바로 선조대왕의 원비(元妃)이다. 반성부원군의 귀(貴)함으로 인하여 삼세(三世)를 추숭받았던 바, 첨지중추부사공은 이조 판서로, 정랑공은 좌찬성으로, 사간공은 영의정으로 각각 증직되었으니, 그 세덕(世德)이 이와 같았다.

공은 바로 사간공의 넷째 아들인데, 5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그러자 홍부인(洪夫人)이 공을 데리고 서울로 와서 스승을 찾아 수업하기를 청하게 하였는데, 날로 진취된 것이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이소(履素) 이중호(李仲虎)를 찾아 뵙고 사사하였는데, 이소가 공의 인품과 학문이 심원한 데 이를 것으로 기대하여 시를 지어서 면려하니, 공 또한 이소에게 의귀(依歸)하였다.

기유년(1549, 인종4)의 사마시와 갑자년(1564, 명종19)의 명경과에 합격하고 괴원(槐院)에 뽑혀 보직되었다가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이어 사직(史職)에 천거되어 검열, 대교, 봉교를 제수받았고, 전임되어 전적, 감찰, 예조ㆍ형조ㆍ병조의 좌랑과 정랑, 정언, 지평, 헌납, 장령, 사간, 집의, 사성, 사예, 내섬시ㆍ봉상시ㆍ종부시의 첨정, 사복시ㆍ예빈시ㆍ상의원의 정(正), 의정부의 검상ㆍ사인을 역임하였는데, 그중에 두 번이나 세 번, 혹은 여러 번 역임한 벼슬도 있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통정(通政) 품계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무인년(1578, 선조11)에 우부승지가 되었는데, 이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3년복을 마치자, 다시 승지, 공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의 참의와 참지에 제수되었다. 공이 정원에 있을 적에 찬성 이이(李珥)를 위해 소를 올려 그가 무함 입은 사실을 해명한 이가 있자, 동료 관원 가운데 정인(正人)을 싫어하는 자가 있어, 이 소를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공이 언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대번 인피하여 떠나버렸는데, 그 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가 끝내 죄를 얻었다.

기축년에 특명에 의해 가선(嘉善)에 올라 병조 참판이 되었다. 이에 앞서 이조 참판 자리가 비었을 적에 ‘조정에서 천거하라.는 분부가 있자, 여러 의논이 모두 공을 천거하였는데, 이윽고 이 제수가 내리니 사람들이 흡족해 하였다. 경인년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한 대신이 역옥(逆獄)에 관련되었는데, 신문을 받고 대답을 잘못하여 중형을 받게 되자, 공이 그를 억울하게 여겼다. 이에 사직장을 올리면서 그가 억울하다는 내용의 말을 진술하고, 인하여 대사헌의 직에서 물러나니, 식견 있는 이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그후 호조 참판에 옮겨져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에는 도이(島夷 일본을 가리킴)가 쳐들어와 도성에 육박해 오자 선조께서 서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공이 예조 참판으로서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여 작은 아들인 병조 좌랑 동량(東亮)과 함께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이르렀을 적에 왜구가 매우 가까이 뒤쫓아온다는 보고가 있으므로, 선조는 요동(遼東)으로 건너갈 계책을 정하고, 동궁(東宮 광해군(光海君))을 머물려 두어 군국(軍國)의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였다. 공은 명을 받아 동조(東朝 광해군이 있는 곳)로 가고, 좌랑은 장차 대조(大朝 선조가 있는 곳)를 따라 요동으로 건너가려 하였는 바, 창졸간에도 거취에 모두 대절(大節)을 잃지 않았으니, 옛사람으로서도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의논이 이윽고 정지되자, 공이 뒤따라 의주(義州) 행재소에 가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모든 풍간(諷諫)과 논의를 하는 데 있어 대체(大體)를 힘써 지켰다. 이어 공조 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옮겨졌으나 병으로 해면하고, 그대로 머물러서 곤전(坤殿 왕비)을 호위하다가, 을미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정유년에 왜구가 다시 침입하여 곤전이 수안(遂安)으로 나가 있게 되자, 공이 중추부사로 곤전을 따라가 있다가, 무술년 7월에 수안군의 교사(僑舍 타향에서 임시로 사는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에 태어나서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대왕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은혜를 내려 돌보아 주었다. 양주(楊州) 금촌리(金村里) 선부인(先夫人)의 묘차(墓次)에 귀장(歸葬)하였다.

공은 충직하고 진실하고 평온하고 조용하고 신중하고 온화하고 후하였으며, 종족에게 인자하고 붕우에게 신의가 있었다. 높고 낮은 벼슬을 막론하고 반드시 직무를 정성껏 수행하기를 생각하였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사리에 타당하게 하고자 하였으며, 스스로 왕실의 외척이라는 것 때문에 오직 사양하고 겸손하여 정성스러울 뿐이었다. 공의 형 참판 응남(應男)은 당세의 중망을 받은 분으로서, 한 시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간혹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자가 있으므로, 그가 늘 탄식하기를 “나의 아우는 이런 기습이 전혀 없어서 내가 공경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공은 밖에 나가도 화려한 환락이 없었고, 들어와도 총첩(寵妾)에 대한 즐김이 없었으며, 가족의 생업과 의복, 음식이 모두 벼슬하지 않았을 때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서적을 좋아하여 손에서 항상 놓지 않았고, 국조(國朝)의 고사를 많이 알아 자제들에게 말해주었는데, 자제들이 그것을 대대로 이어서 전고(典故)에 해박하기가 마치 장고(掌故 전례(典禮)를 맡은 벼슬아치)와 같았다.

홍씨 부인은 나이 80세에도 건강하였는데, 좌우에서 모시고 봉양하기를 그지없이 하였고, 홍씨 부인은 별세하여서는 여묘살이를 하면서 몸이 야위도록 애통해 하였으며, 너무 어려서 전상(前喪 여기서는 부친상을 가리킴)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 때문에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두터웠다.

공의 백형(伯兄)인 목사 응천(應川)이 여러 아우들을 매우 엄하게 가르쳤는데, 공은 백형을 아버지처럼 섬기되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끝까지 게으름이 없이 함으로써 온 가문이 본을 받아, 공의 자제로부터 여러 종형제ㆍ자매ㆍ조카ㆍ손자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보고 느끼어 익숙해졌다. 대수(代數)에 친소가 있고 상복(喪服)에 원근이 있으되, 공은 모두를 한 가족과 같이 여겼으므로, 대대로 돈목(敦睦)한 가문을 일컬을 경우 박씨를 으뜸으로 삼아 심지어는 만석군(萬石君)의 가문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공의 덕행도 이미 남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는데, 또 임 부인(林夫人)을 얻어 배필로 삼았다. 임씨는 선산(善山)의 대성(大姓)으로, 증조 수(秀)는 현감이고, 조는 우형(遇亨)이며, 고 구령(九齡)은 별좌이고, 비(妣) 박씨는 세간(世幹)의 딸인데, 신묘면 7월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덕성을 타고나서 8, 9세에 벌써 어버이 섬기는 데 도리가 있었는 바,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계집종들을 주의시켜 음식을 잘 장만하게 해서, 맛좋은 미죽(米粥) 등으로 부모를 봉양하니, 부모가 대단히 사랑하여 주부(主婦)의 일을 다 맡기었다. 그리하여 무릇 빈객을 접대할 적에 음식을 차려내는 일을 부인이 실로 주관하였다. 이에 백부인 석천(石川 임억령(林憶齡)의 호)이 항상 이르기를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여아이니 의당 단정한 선비 한 사람을 얻어서 짝을 지어주어야 할 것이라며 사간 박공의 넷째 아들이 가장 현명하여 반드시 그 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니, 혼인을 할 만하다.”하고는, 시를 지어 공을 맞이하여 마침내 공에게로 시집을 보내었다.

부인이 시집을 와서는 부모 섬기던 대로 시어머니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던 대로 동서들 사이에 우애하니, 모두가 기뻐하여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포의(布衣)로 있다 보니, 가세가 점점 기울어갔는데, 부인이 살림을 잘하여 마침내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공이 현달함에 미쳐서는, 현달함으로 인하여 재산을 불리지 않고, 오직 덕(德)을 귀(貴)로 여기고 인(仁)을 부(富)로 여기었다.

공의 이웃에 판서 이우직(李友直)이란 분이 있어 그가 술 잘 마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이기는 하나 청빈(淸貧)하기가 공과 서로 같았으므로, 그와도 서로 친하였다. 그래서 두 집이 서로 돈이나 물건을 꾸어주곤 하여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도와주었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고 봉록이 들어오면 공은 자기 집에서 사사로 쓰지 않고, 이를 쪼개서 족당(族黨)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하인들을 나누어서 홀로 된 자씨(姊氏)에게 주곤 하였는데, 공이 별세한 후에도 부인이 재물을 아끼지 않고 공의 뜻을 따라 도와주었고, 외롭고 곤궁한 자가 있으면 마치 친자식처럼 길렀다. 부인은 또 사람을 잘 알아보는 감식안(鑑識眼)이 있어, 내외종 등 여러 친족들을 한 번 보면 그 사람됨을 다 알아서 그들의 장단ㆍ수요ㆍ귀천에 대한 예견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세 아들이 모두 문학(文學)으로 진출하여 계속해서 문과급제의 영광을 차지했는데, 그중 막내 아들은 낭관으로 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을 호종하여 임금에게 인정받아 초천(超遷)되어 그해에 당상관에 올랐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관질(官秩)이 아경(亞卿)에 승진되었다. 그러자 공과 부인은 부귀와 권세가 너무 성만함을 두려워하여 근심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공이 별세하고 나서 부인만 생존했을 적에는 두 아들이 잇달아 큰 고을을 맡음으로써 서로 번갈아 화려한 수레에 모시고 다니면서 영화로운 봉양을 다하였다. 그리고 막내 아들은 더욱 높고 귀하게 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는데, 모친 봉양을 위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그때 둘째 아들은 황주목사(黃州牧使)로 있었는데, 평안도 감영과의 거리가 밥 세 번 먹는 시간이 걸리는 정도였는지라, 부인이 내왕하는 데에 성대한 광채가 있었고, 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히 봉양해드리니,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복록을 부러워하여 칭도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도리어 항상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너무 즐겁고 편안함을 스스로 경계하였다.

정미년 가을에는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가는 둘째 아들을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한번은 병이 위중해지자, 금상(今上)께서 태의(太醫)를 보내서 병을 치료하게 하고, 또 본도로 하여금 병의 상태를 계속해서 치계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수(恩數)이다. 무신년 겨울에 부인이 끝내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였다. 금계군은 이때 능관(陵官)으로 목릉(穆陵)을 수호하고 있었는데, 상께서 그에게 분상(奔喪)하여 친히 장례를 치르도록 특별히 허락하고, 양도(兩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장례를 도와주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하였고, 동궁 및 여러 왕자들도 모두 부의를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이어서 금계군의 공훈으로 은전을 추급(推及)하여 공에게는 상공(上公)의 작위를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봉하니, 슬퍼함과 영화로움이 극도에 달하였다.

공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동윤(東尹)은 부솔(副率)로 공보다 먼저 죽었고, 동열(東說)은 황해도 관찰사이며, 동망(東望)은 영흥부사(永興府使)이고, 동량(東亮)은 곧 금계군이다. 딸은 현감 정혜연(鄭蕙衍)에게 시집갔다. 부솔은 별좌 허사익(許思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종(淙)이고 딸은 권익(權瀷)에게 시집갔다. 관찰사는 동지(同知) 신발(申橃)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 아들은 호(濠)이고 다음은 황(潢)ㆍ정(渟)이며, 딸은 생원 윤순지(尹順之)와 문과 급제한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갔다. 영흥부사는 사인(士人) 노수근(盧守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인(潾)이고 다음은 유(瀏)이다. 금계군은 승지 민선(閔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미(瀰)는 선조대왕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고, 다음은 의(漪)ㆍ유(濰)ㆍ자(澬)이며, 큰딸은 문과 급제한 이명한(李明漢)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흠(欽)이 일찍이 공의 한 집안 사람의 말을 들으니,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었다.

부인은 젊었을 때 남중(南中)에 있으면서 을묘년의 왜변을 만나 피란차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는데, 배가 막 출발하자 적병이 당도하였다. 이때 어느 두 부인(婦人)이 뱃전을 부여잡고 부르짖어 울면서 매우 다급하게 살려주기를 요구하였는데, 뱃사공이 그들을 거절하였으나, 부인이 그들을 힘써 구활하고, 그들의 굶주림과 궁핍함을 도와주며 잠자리 등 거처까지도 함께 함으로써 두 부인이 끝내 온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왜적이 평정되자, 두 부인이 울며 작별하면서 절을 하고 축복을 드리며 떠나니, 듣는 이들이 의기를 분발하여 감탄하였다 한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부인이 산골짜기에 피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불러 말하기를, 왜적이 가까이 왔으니 빨리 피하라고 하므로 부인은 마침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함께 피란길을 떠났던 사람 중에는 심지어 왜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다 참살되기까지 하였으나, 부인의 집안만이 화를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이 라고 했다 하니, 어찌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흠이 바로 지난날 공의 문하인이었다. 그래서 기억하건대, 공은 인품이 관대하고 조행(操行)이 순박하고 성실하였으며, 부인 또한 공의 미덕에 짝이 될 만하였다. 그리고 공의 여러 아들들은 재능을 펴고 영기(英氣)를 발양하여 명망과 실상이 아울러 훌륭하고, 내외의 제손(諸孫)들은 난곡(鸞鵠 난세와 고니. 모두 영조(靈鳥)임)이 우뚝 서 있듯 모두 현사(賢士)의 지위에 있어서, 오복이 함께 이르고 훌륭한 명망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니, 이런 행복이 어찌 근원이 없이 오게 할 수 있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 지금 20년이 되었는데, 세도(世道)가 변하고 인사(人事)가 소란스러운 이때에 공 같은 큰 덕을 가진 군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는가. 흠은 본디 우둔하여 글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성대한 업적을 영구히 묻히지 않도록 잘 포양할 수 있겠는가마는, 관찰사 등 제공이 나와 형제의 의리가 있다 하여 부탁을 해오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명(銘)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다르지 않고 / 不畸於人

하늘과도 다르지 않아서 / 不畸於天

실천한 것은 복받을 조짐이었고 / 所履者祥

누린 것은 오복이 구비함이었다 / 所享者全

누리고 나머지를 미루어 / 而推其餘

후손에게 부여해 주어서 / 而畀之後

그 종족을 비호해주니 / 以亢其宗

자손들이 이에 번성해졌다 / 子姓乃阜

오직 저 큰 바다는 / 維海之大

반드시 강하에서 비롯되고 / 必源於河

오직 뿌리가 깊은 때문에 / 維根之深

가지도 따라서 무성함이라 / 聿鬯於柯

비하자면 한 나라의 만석군(萬石君)이요 / 漢之萬石

당 나라의 명가리로다 / 唐則鳴珂

삷은 천리를 따름이요 죽으면 편안해 지는지라 / 存順歿寧

내외가 한 무덤에 같이 묻혔으니 / 共兆同塋

앞으로 백세를 지나도록 / 有來百世

이 무덤 무너뜨리지 말라 / 無毁無傾

묘지명을 땅에 함께 묻으려고 / 埋文殉地

내가 좋은 돌에 명하노라 / 我銘以貞

[주D-001]만석군(萬石君) : 한(漢) 나라 석분(石奮)을 가리킴. 석분과 그의 아들 넷이 모두 효성스럽고 신중하였으며, 벼슬이 다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으므로, 한 경제(漢景帝)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만석군이라 호칭하였는데, 석분의 집안은 특히 효행과 돈목으로 이름이 높았다. 《漢書 卷46 萬石君傳》

[주D-002]당 나라의 명가리(鳴珂里) : 가(珂)는 귀인(貴人)이 쓰는 마구(馬具)의 구슬 장식. 명가리는 곧 가를 울리는 마을이란 뜻인데, 당 나라 때 장가정(張嘉貞)이 재상이 되고 그의 아우인 가우(嘉祐)가 금오장군(金吾將軍)이 되어, 형제가 함께 조정에 들어갈 적이면 수레와 추종(騶從)들이 마을에 가득 찼으므로, 당시에 그들이 사는 곳을 ‘명가리’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書 卷127 張嘉貞傳》 

관찰사 박공 신도비명(觀察使朴公神道碑銘)

흠이 상투를 올리고서 장안에 유학할 때 함께 사귄 이들은 다 당시의 명류로서 혹은 행실로 혹은 재주로 혹은 문장으로 벼슬길에 올라서 두각이 드러나 명사대부들이 되었으나, 이를테면 큰 사업을 이룰 기국과 천성적으로 얻은 덕을 지녀 걸러도 더 이상 맑아질 것이 없고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음으로써 겉치레를 파는 자가 만났을 때 그 장기가 무색해지고 기예를 담론하는 자가 만났을 때 그 화사함이 무색해지는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박공 열지(朴公說之)에게 사양하였다. 열지의 이름은 동열(東說)이고 호는 남곽(南郭)이다. 그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으며 신라 왕의 자손으로서 나주(羅州)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은 곧은 절개로 세상에 드러났고,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은(訔)은 공업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8대조이다. 증조 조년(兆年)은 이조 정랑에다 증 좌찬성이고 조부 소(紹)는 사간원 사간에다 증 영의정인데, 일찍 김안로(金安老)는 간사하므로 다시 서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가 조정에서 밀려나 영남에 은거하던 중 별세하였으며 호는 야천(冶川)이다.

선고 응복(應福)은 대사헌에다 증 반천부원군(潘川府院君)이고 선비 임씨(林氏)는 선산(善山) 명문으로 별좌(別坐) 구령(九齡)의 따님이다.

가정 갑자년에 공을 낳았는데, 어린아이 때 벌써 남달리 준수하여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겉은 질박하고 둔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은 총명하여 민첩하게 암기하였으므로 함께 공부하는 자들이 따라잡지 못하였으며, 제부(諸父) 반성군(潘城君 박응순(朴應順)의 봉호)과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의 호) 두 공이 매우 공을 중하게 여겨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면서 오직 일찍 명성을 얻을까 염려하였다. 차츰 자라면서 글을 짓고 학업을 닦아 문장이 날로 진보하였다. 신사년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고 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자 제생이 온통 우러르고 사모하여 난새나 봉황을 바라보듯 하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기축년에 정적 여립(鄭賊汝立)이 사대부 사이에서 나옴으로써 그 여파를 받은 자가 많아 조정의 논의가 날로 격해지고 성균관 유생들도 소장을 올려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다 두려워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공이 급히 상소하니 서로들 경하하기를 “이제 걱정이 없겠다.” 하였는데, 공은 과연 그 사이에 잘 조정하여 별문제가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어느 한 구상(舊相)이 귀양가 있었는데 그를 다시 서용하기 위해 그의 족형이 사간원 장관으로 있으면서 장차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죄를 추론(追論)함으로써 일시의 사류를 몰아내고 구상의 입지를 좋게 만들어주려 하였다. 이에 공은 그것이 무고임을 전달하여 시배들과 서로 어긋나 병조 좌랑으로 체직되고 해주(海州) 분사(分司)에서 중전(中殿)을 호종하다가 을미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신년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고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어사가 되어 북도(北道)를 순찰하였으며, 정유년에는 병조에서 지방으로 나가 영변 판관(寧邊判官)이 되는 등 수년 동안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인의 음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때 중국의 대군이 재차 나왔는데 백성을 갈라서 군량을 수송하고 사람 수를 헤아려 번갈아 쉬도록 함으로써 민력이 쇠진하지 않고 촌락이 평온하였다.

무술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경자년에 상기를 마치고서 시강원 사서가 되었으며 신축년에 홍문관의 수찬ㆍ교리가 되고 문학ㆍ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임인년에 검상ㆍ사인이 되고 사성(司成)ㆍ상례(相禮)ㆍ통례(通禮)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되고 황주 목사(黃州牧使)에 제수되었다. 황주는 의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하여 사람이 살기가 험난한 고을로 이름이 난데다 대대적으로 부역을 치르는 때를 만났으나, 재력의 대소를 비교하고 거리의 원군을 헤아려 일정한 한계를 세우고 서로간의 조화를 맞춰 하나같이 균등하게 하였으므로, 민가는 병들지 않고 관가의 용도는 항상 넉넉하였다. 힘써 먼 장래를 위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세밀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일이 다 성사되어 정사가 맑고 송사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하는 말이 “백년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 하였다. 어사가 특별한 치적이 있다는 것으로 계문하자 임금은 표리(表裏)를 주어 표창하였다.

임기가 차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서열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대마도의 왜노가 가강(家康)의 설에 따라 화친을 요구하고 두 병졸을 보내며 말하기를 “이들은 임진년에 능을 범했던 적이다.” 하였다. 이때 권상(權相 권세 있는 재상)이 국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삼기 위해 장차 종묘에 고하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려 하자, 공은 상소하여 말하기를 “교활한 적들은 거짓이 많습니다. 만일 서울까지 잡아 왔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적에게 기만을 당한 것이 되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정면으로 그 간교함을 꺾으소서.” 하였다. 선묘가 제재(諸宰)에게 각자 의논할 것을 명하였는데 오직 오성(鰲城) 이공의 헌의만이 공과 합치하였다. 결국 형틀에 묶어 잡아와 국문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가뭄이 들어 구언(求言)할 때 공이 누구를 대신하여 상소하면서 나라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깊이 개진하여 당시의 금기 사항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권상이 미워하였고 그 동류 중에 공을 쳐서 제거하려 하는 자가 있었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마침내 감히 가해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처결하면서 청렴을 권장하고 혼탁한 풍조를 없애 온 도내가 엄숙해졌으며, 다시 돌아와 형조 참의가 되었다. 무신년 겨울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되었고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했다. 상제를 마친 뒤에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간신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모사하여 소장을 울려 퇴계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공격하자, 유생들이 모두 분개하여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 아뢰자 폐주(廢主)가 진노하여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죄를 주려고 하니, 제생이 앞을 다투어 옥에 갇히겠다고 청하고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공은 요속을 인솔하여 유생들은 예로써 불러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말하였으나 폐주는 따르지 않았다. 공은 다시 봉사(封事)를 올리려고 하던 중 미처 올리기 전에 예조 참의로 체직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서 자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고을의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서로 배척함으로써 유감과 원한이 쌓여 원수간으로 변해 그대로 수십 년이 되었으나 관가에서 제어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그 고을의 장로(長老)를 불러다가 타이르고 우선 규율을 세운 뒤에 고을에서 준수한 선비를 뽑아 교화시키고 다듬어 인재를 만들고 글을 가르쳐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으므로 공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 토호(土豪)가 잠잠하고 유업(儒業)이 크게 일어나 엄중(淹中)ㆍ직하(稷下)와 같은 칭송이 있었다.

계축년 여름 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위할 계획으로 큰 옥사를 일으켜 선조(先朝)의 노신들이 거의 일망타진되었고 공의 아우 금계공(錦溪公 박동량(朴東亮))과 흠(欽)도 체포되었으며, 얼마 후에 그 화가 공에게까지 파급되어 심리에 부쳐져서 공초에 응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이 나 들것에 실려 나왔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14) 가을에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은 59세였다. 9월 병오일에 양주(楊州) 금촌(金村) 사좌(巳坐)의 자리에 장사지냈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인해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신씨(申氏)는 고령(高靈)의 대성(大姓)으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인데, 진실하고 청순하며 조촐하고 안존하여 내조를 잘 하였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호(濠)는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초취는 흠(欽)의 딸로서 2남 2녀를 두었고 후취는 윤헌민(尹獻民)의 딸이며, 그 다음 황(璜)은 사간원 정언으로 대사간 홍서봉(洪瑞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고, 그 다음 정(渟)은 목사 송일(宋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고, 장녀는 윤순지(尹順之)에게 시집갔는데 사간원 헌납이고, 차녀는 이행원(李行遠)에게 시집갔는데 예조 좌랑이며 1녀를 두었다. 남평 현감의 딸은 진사 이수인(李壽仁)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세모(世模)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은 겉모양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풍채가 옹골차고 원대하며 도량이 크고 넓었다. 솔직하고 천진스러워 어떠한 범위나 한계가 보이지 않았으나 의기가 드높아서 금석처럼 확고하였고 침묵을 견지하여 함부로 담소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서로 맞는 자에게는 한번 마음을 주면 변치 않았다.

부모 형제간에 효우(孝友)는 천성적으로 타고나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았고 친족간에 화목한 것은 자연적으로 우러나 그에 미칠 자가 없었다. 남의 선을 선으로 여기는 것은 잘 하고 남의 악을 미워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치밀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남들은 마음을 갖고 애써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공은 일상적으로 생활화하여 여유만만하였고 세속에서 지혜를 짜 권모술수를 부려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공은 비천하게 여겨 행여 때가 묻을 듯이 멀리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태평하고 온화하여 덕이 높은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선대는 명망과 덕을 대대로 이어왔다. 야천공(冶川公 박소(朴紹)를 말함)은 바른 도와 굳은 절개에다 학문을 겸비하였는데 소인의 배척을 받아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나, 그 법도가 남아 있고 가정 교훈이 폐해지지 않아 공의 제부(諸父)들이 다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일국의 국모가 되자 반성(潘城 의인왕후의 부친 박응순(朴應順)의 봉호)이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여러 종자제(從子弟)가 영달하여 줄줄이 관직을 가졌는데, 공은 그 사이에 처하여 진실되고 삼가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냈으므로 한 집안의 노소가 다 공을 표준으로 삼았다.

공은 문장에 힘을 들이지 않았으나 논조가 본디 높았고 제반 전적을 섭렵하였는데 단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갔다. 경사 백가(經史百家)에서부터 명 나라와 국조(國朝)의 제도, 역사 사실이며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능히 그 시비를 판가름하였으므로 아무리 고사에 밝은 박사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어제(御製) 문자를 맡아 지을 때는 화려하면서도 전중하고 시를 지을 때는 맑고 산뜻하여 법도가 있었다. 물러나 고향에서 살 때에 오성(鰲城) 이공(李公)도 동교(東郊)에서 지내며 수시로 내왕하였다. 이공이 귀양갈 때 공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증정하기를 “평생에 지닌 죽여의로 자릉대에서 그댈 보내네[平生竹如意 相送子陵臺].”하였는데, 이는 사고(謝翶)가 문산(文山)을 보낸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서 구사한 말이 처절하고 감동겨워 사람들이 다투어 전송(傳誦)하였다.

공이 작고했을 때 흠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 속에 “참으로 질박한 것은 꾸밈없이 원만하고 성실한 법인데 공은 그 전부를 타고났고, 매우 화기로운 것은 순수하고 평탄하며 크고 너그러운 법인데 공은 그 진수를 지녔다. 이름은 높아지는 데에 관심이 없이 내실을 기하려 했고, 행실은 겉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이 진실되게 하려 했고, 언어는 달변에 관심이 없이 바르게 하려 했고, 재주는 민첩한 것에 관심이 없이 신중히 하려 했으며, 속에 비단 옷을 입고서 행여 그 문채가 드러날까 꺼려하였고 청렴함을 간직하고서 행여 그 자질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였다. 공순한 만석(萬石)의 풍치이고 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 하였다. 아, 이 말은 과장한 것이 아니니 어찌 후세에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없겠는가. 공을 아는 사람이 흠만한 자가 없고 보면 공의 신도에 새길 글을 어찌 감히 짓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고금 인물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 世嘗謂古今人不相及

공 같은 이 그 어찌 고현보다 못할쏜가 / 如公者何遜於古賢

공의 벗이 명을 지어 / 有友銘公

이 신도를 빛낸다네 / 賁玆新阡

[주D-001]엄중(淹中)ㆍ직하(稷下) : 엄중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 도성으로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던 마을 이름인데 공자의 고향이고, 직하는 제(齊) 나라 도성으로 임치(臨淄)의 직문(稷門)에 있던 지명인데 제 선왕(齊宣王) 때 추연(騶衍)ㆍ순우곤(淳于髠)ㆍ전변(田駢)ㆍ접여(接輿)ㆍ신도(愼到)ㆍ환연(環淵) 등 당시의 수많은 학사들이 모여 활동하였음. 문풍(文風)이 성행하는 지방을 말할 때 흔히 인용함. 《梁書 卷25 徐勉傳》에 “치상(淄上)과 엄중의 선비들이 줄을 이어 선배를 따르고, 책상자를 지고 분필을 지닌 선비들이 조석으로 모여든다.” 하였음.

[주D-002]이공이 …… 것 : 이항복이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한 일로 광해군 10년(1618)에 북청(北靑)으로 귀양갈 때 박동열이, 목숨을 걸고 인륜을 부지하려는 이항복의 의기에 감동하여 송 나라 의사 사고가 금(金) 나라에 저항하다 순절한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애도한 일에 빗대어 이항복의 의기를 기렸음. 죽여의는 본디 중이 독경(讀經)이나 설법을 할 때 손에 가지는 대로 만든 긴 자루인데, 일반적으로 그 자루 끝을 사람 손가락처럼 깎아 만들어 등을 긁을 때 사용하였음. 사고의 자는 고우(皐羽)이고 호는 희발(晞髮)임. 문천상이 연평(延平)에서 관청을 열었을 때 향병(鄕兵)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문천상과 합류하여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으며, 나중에 문천상이 적에게 잡혀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서 산천을 떠돌다가 절동(浙東)의 엄자릉(嚴子陵) 조대(釣臺)에서 문천상의 신주(神主)를 만들어 놓고 잔을 올리고 통곡한 다음 죽여의로 바위를 치면서 비장하게 초혼사(招魂詞)를 지어 불렀다고 함. 《宋元學案 卷56 龍川學案》

[주D-003]공순한 …… 풍치이고 : 만석은 한(漢) 나라 석분(石奮)을 말함. 문제(文帝) 때 건(建)ㆍ갑(甲)ㆍ를(乙)ㆍ경(慶) 등 네 아들과 함께 각기 연간 2천 석의 녹을 받는 고관이 되어 5부자의 녹이 만석에 달함으로써 부귀의 극치를 누렸으나 천성이 매우 공순하고 진실하여 교만한 빛이 전혀 없었다고 함. 《史記 卷103 萬石傳》

[주D-004]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 : 양원은 진 무제(晉武帝) 때 재상 위서(魏舒)의 자임. 천성이 침중하여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남의 단점을 잘 덮어줬으며 욕심이 없어 나라에서 받은 녹을 친족에게 모조리 나눠줬는가 하면 무슨 일을 할 때는 행동을 앞세우고 말을 나중에 하였으므로 벼슬을 그만둘 때에도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고 함. 《晉書 卷41 魏舒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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