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正臣 南溪 朴世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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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7-05 14:19 조회4,390회 댓글0건본문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대략 말하기를.
신이 삼가 격쟁(擊錚)한 사람인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동춘 송준길의 문집(文集)을 감정(勘定)할 때에 선정(先正)이 산제(刪除)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진실로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간파(看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서한이 있는 뒤로 3.40年 사이에 宋俊吉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가정(家庭)에서 거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子孫들이 들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것이 송준길의 정론(定論)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인용하여 선정(先正)을 공척(攻斥)하는 자부(資斧)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
사이에 변(變)이 발생하여 처음에 조정하여 보합(保合) 시키러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선정에 대해서 때때로 면계(勉戒)한 것이 있었지만 그가 윤증(尹拯)을 배척하는 입장은 본디 스스로 매우 중하였다는 것이 왕복한 서한에서 많이 나타 났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양좌(羅良佐). 조득중(趙得重) 등이 남계(南溪)박세채(朴世采)의 기사년(己巳年)숙종(肅宗) 1689년.갑술년(甲戌年)1694年 뒤의 일을 기록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나양좌(羅良佐)는 그 가운데서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선정(先正)이 대의(大義)를 제기 했다가 사화(士禍)에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선정(先正)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소인(小人)으로 만들려 하였다 '고.했고.
또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가 선정(先正)을 추대하여 마침내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병향(竝享)하게 하였다고 지척(指斥) 하였습니다.
조득중은 그 가운데서 남계 박세채(南溪 박世采)가 선정을 위하여 사설(師說)을 만들어 세도(世道)를 그르첬다고.'고 하였고. 또말하기를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가 전조(銓 曹)에서 윤증(尹拯)을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그들이 (南溪 朴世采)의 후래(後來)의 의론(議論)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 었는데도 지금 완전히 덮어 숨겨 버리고 도리어 그것을 원용(援用)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격쟁(擊錚)한 사람인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동춘 송준길의 문집(文集)을 감정(勘定)할 때에 선정(先正)이 산제(刪除)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진실로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간파(看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서한이 있는 뒤로 3.40年 사이에 宋俊吉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가정(家庭)에서 거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子孫들이 들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것이 송준길의 정론(定論)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인용하여 선정(先正)을 공척(攻斥)하는 자부(資斧)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
사이에 변(變)이 발생하여 처음에 조정하여 보합(保合) 시키러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선정에 대해서 때때로 면계(勉戒)한 것이 있었지만 그가 윤증(尹拯)을 배척하는 입장은 본디 스스로 매우 중하였다는 것이 왕복한 서한에서 많이 나타 났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양좌(羅良佐). 조득중(趙得重) 등이 남계(南溪)박세채(朴世采)의 기사년(己巳年)숙종(肅宗) 1689년.갑술년(甲戌年)1694年 뒤의 일을 기록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나양좌(羅良佐)는 그 가운데서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가 선정(先正)이 대의(大義)를 제기 했다가 사화(士禍)에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선정(先正)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소인(小人)으로 만들려 하였다 '고.했고.
또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가 선정(先正)을 추대하여 마침내 도봉서원(道峯書院)에 병향(竝享)하게 하였다고 지척(指斥) 하였습니다.
조득중은 그 가운데서 남계 박세채(南溪 박世采)가 선정을 위하여 사설(師說)을 만들어 세도(世道)를 그르첬다고.'고 하였고. 또말하기를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가 전조(銓 曹)에서 윤증(尹拯)을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그들이 (南溪 朴世采)의 후래(後來)의 의론(議論)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 었는데도 지금 완전히 덮어 숨겨 버리고 도리어 그것을 원용(援用)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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