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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문정공 상촌신흠 남곽공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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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8-20 10:28 조회4,573회 댓글0건

본문

영의정 문정공 상촌신흠 남곽공 제문

祭朴羅州 東說 文

蓋余丱角。已聞世間有朴說之者而未際也。及余弱冠而成進士。榜中有說之名。余不喜成進士。而喜與說之同也。其際也非不早。而猶若晩且遲者。目擊而已莫逆矣。於是而始知爲說之焉。未言而契。不約而同。精融義符。金遜利而膠媲密矣。當公治博士業。無敢以十駕先公。公顧困於公車者十年。迺後果魁大庭。而朝宁得有說之焉矣。知公者稱公器。不知公者稱公文。以兩府三事期公。而石渠,白虎爲餘地矣。群飛刺天。營營其聲。繄余與公。俱被敲撼。余乘使傳。公佩銅符。而余糠在前。公璞不制。齟齬依隱三十載矣。而公今不淑。彼造物者。其有意於世耶。其無意於世耶。余居邇公。交臂相呼。憶丙戌夏。僑寓南郭外。其居尤邇。倒屣相迎日再三矣。甲午以後。公又來寓余閈。與公之季方第連甍。其相聚相樂。什於丙戌。其不得相聚者。唯在外時然也。當是時。不識相聚相樂之爲難得。且不識世道人事之有不可期者也。荷校就吏。余竄公廢。二豎阨公。公復枕席。人亦有言。天道福善。以而驗公。于何其差。惟吾有女。寔爲公婦。謂言永托。能血公祀。女夭公去。天不成全。余齒已脫。余髮已禿。生世日短。遷化日長。追女與公。無窮期矣。嗚呼哀哉。太樸之眞。混淪敦龐。而公稟其全。至和之精。粹夷宏厚。而公得其沖。造物之生公若是優餘。而其所以試公者。若是不究。抑獨何哉。名不必隆。要之以實。行不必華。要之以惇。言不必給。要之以直。才不必捷。要之以重。衣錦而惡其文之著也。蘊素而懼其質之漓也。恂恂乎萬石之風。默默乎陽元之度。公之所自有而未庸於世者也。嗚呼哀哉。疾而無以躬胗藥也。訃而無以躬往哭也。無車馬之財。以及公之生。無賵賻之資。以送公之終。嗟余之痛。曷其有極。去歲之夏。余自纍還。扁舟訪公。惜公美疢。今來祖公。素帷南首。長些莫招。懸劍何枝。嗚呼哀哉。說之亡矣。不晦者心。相感者精。尙饗。

제문(祭文) 25수

나주박동열 에 대한 제문[ 羅州 朴東說文祭]

내가 총각 시절에 이미 세간에 박열지(朴說之 열지는 박동열의 자)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만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약관 시절에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그 진사의 방(榜) 가운데 열지(說之)라는 이름이 있기에, 나는 진사가 된 것을 기뻐하지 않고 열지와 같은 방이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 때에 서로 만난 것이 이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늦게 만난 것처럼 여겨져서 한 번 서로 마주보자 이미 막역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열지란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말하기 전에 마음이 계합하고 약속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정신이 융합하고 의기가 부합되어, 사귀는 정분이 쇠보다 단단하고 친밀하기가 교칠(膠漆) 같았습니다.

공이 과거 공부를 할 적에는 누구도 감히 십가(十駕)로도 공을 앞설 이가 없었으나, 공은 도리어 10년 동안이나 과거에 실패했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과연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함으로써 조정에 열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을 아는 자는 공의 기국을 칭하고 공을 모르는 자는 공의 문제를 칭하면서, 양부(兩府 의정부와 중추부)와 삼공(三公) 지위로 공을 기대하였고, 석거각(石渠閣)ㆍ백호관(白虎觀) 따위는 기타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찌를 듯이 떼로 날며 윙윙거리는 쉬파리처럼 참소 잘하는 소인들에 의해 나와 공이 함께 그들의 침해를 받았으되, 나는 사신이 되었고 공은 지방관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쭉정이 같은 내가 지위를 앞서 갔고, 공은 숨은 덕이 있음에도 중용되지 않았으므로, 세상과 뜻에 맞지 않아 조정에 있으면서도 항상 은퇴하려는 마음을 가진 채로 30년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공이 지금 작고하시니, 저 조물주가 과연 세상에 뜻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리고 나의 집이 공의 집과 가까이 있었으므로, 서로 불러 손을 마주 잡고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생각건대 병술년 여름에는 공이 남쪽 교외에 우거하여 공의 우사가 더욱 가까워졌으므로, 하루에도 두세 번씩이나 허둥지둥 서로 반기어 맞이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오년 이후에는 공이 또 내 동네로 와서 우거할 적에는 공의 아우의 집과 서로 연해 있었으므로, 서로 모여 즐기는 것이 병술년보다 10배나 되었고, 서로 모이지 못한 것은 오직 외방에 있을 때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당시에는 서로 모여 즐기기가 어려운 것임을 몰랐고, 또 세도(世道)와 인사(人事)가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후 목에 칼이 씌워진 채로 하옥(下獄)되었다가 나는 유배되고 공은 폐해졌는데, 공은 질병이 들어 다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남들도 말하기를 “천도는 착한 이에게 복을 준다.” 하는데, 이 일을 가지고 공을 증험해 보면 어찌 그리도 어긋난단 말입니까. 오직 나의 딸이 공의 며느리가 되었기에, 영원히 맡겨서 공의 제사를 받들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내 딸은 요절하고 공도 서거하였으니, 하늘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치아 이미 다 빠지고 내 머리도 이미 다 벗겨져서, 살 날은 짧고 죽은 뒤에는 많은 날이 있으리니, 딸과 공을 따라가서는 서로 만나는 기간이 무궁할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태박(太樸)의 진(眞)은 혼전하고 돈후한 것인데 공이 그것을 온전히 품부받았고, 지화(至和)의 정(精)은 순수하고 굉후한 것인데 공이 그 원기를 얻었으니, 조물주가 공을 낼 적에는 이와 같이 넉넉하게 부여해 놓고서, 공을 쓰는 데 있어서는 이와 같이 제대로 다 쓰지 않고 만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란 말입니까.

이름이 꼭 높기를 바라지 않고 실상을 필요로 하며, 행실은 꼭 화려하기를 바라지 않고 돈후함을 필요로 하며, 말은 꼭 잘하기를 바라지 않고 곧게 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재주는 꼭 민첩하기를 바라지 않고 신중한 것을 필요로 하며, 비단옷을 입고서 그 문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순수한 흰 바탕을 축적하고서 그 바탕이 겉으로 배어날까 두려워하며, 신중한 만석군(萬石君)의 풍치와 묵묵한 양원(陽元)의 풍도는 공이 모두 소유하고서도 세상에 쓰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슬픕니다. 공이 병들었을 때는 내가 몸소 가서 약을 써줄 수 없었고, 부음을 받아서는 몸소 가서 곡할 수도 없었으며, 공이 살았을 때는 거마(車馬)의 재물 없어 도와주지 못했고, 공이 작고해서는 부의할 거리가 없어 장송(葬送)도 못하였으니, 아, 나의 아픈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지난 해 여름에 내가 배소에서 풀려 돌아와 일엽편주로 공을 방문했을 때는 공의 병든 것을 안타깝게 여겼었는데, 이제 와서 공을 영결할 때는 흰 휘장 덮인 채 남쪽 고향으로 머리 둘렀으니, 만가(輓歌) 소리 길게 내어 초혼도 할 수 없거니와, 칼은 어느 나뭇가지에 걸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열지는 죽었지만, 어둡지 않은 것은 마음이요, 서로 느끼는 것은 정신입니다. 흠향하소서.

[주D-001]십가(十駕) : 준마(駿馬)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노마(怒馬)는 열흘에 천리를 달려서 준마를 따른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범용(凡庸)한 사람이 재주 있는 사람보다 10배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苟子 勸學》

[주D-002]석거각(石渠閣)ㆍ백호관(白虎觀) : 석거각은 한(漢) 나라 초기에 승상 소하(蕭何)가 세운 장서각(藏書閣)으로, 모든 선비들이 모여서 여러 서적을 강론했던 곳이고, 백호관은 후한 장제(後漢章帝) 때에 박사(博士)ㆍ제생(諸生) 등을 모아놓고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의논하던 곳이었으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문학을 다루는 기관을 뜻한다.

[주D-003]만석군(萬石君) : 한 경제(漢景帝) 때 석분(石奮)이 그의 아들 건(建)ㆍ갑(甲)ㆍ을(乙)ㆍ경(慶)4형제와 함께 오부자(五父子)가 모두 이천석(二千石) 벼슬에 올랐으므로, 경제가 그를 만석군이라 불렀는데, 오 부자가 모두 주밀하고 신중하기로 이름났었다. 《漢書 卷46 石奮傳》

[주D-004]묵묵한 양원(陽元) : 양원은 진(晉) 나라 때의 재상 위서(魏舒)의 자. 위서는 인품이 워낙 출중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영수(領袖)로 추앙되었는데, 위 문제(魏文帝)는 일찍이 그를 주목하여 이르기를 “위서의 당당(堂堂)함은 남의 영수가 될 만하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묵묵이라고 한 말은 자세하지 않다. 《晉書 卷41 魏舒傳》

[주D-005]칼은 …… 걸겠습니까 : 역시 오(吳) 나라 계찰(季札)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본인이 친구의 장지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정공 호상촌 휘신흠은 본관은 평산 조선중기에 월사 이정구 계곡장유 택당 이식과 더불어 한문에 대가이며 4대 문장가로써 문명을 날림 임진왜란때는 신립장군을 따라

충주 탄금대 전투에 참전 했으며 선조께서 어린 영창대군을 보호를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중에 한사람

첨추공 호(濠)에 장인이며 종제 중봉공 의( 현석 세채아버지)장인, 남곽공과 오창공은 형제분이니 남곽공과는사돈간이며 오창공과도 사돈간이라 남곽공 형제분에 겹사돈으로 그당시 사돈으로써 뿐만아니라 매우 친분이 깊었는 듯함

계축옥사: 명문가에 서자들이 능력을 있으나 벼슬길이 막혀 사회에서 소외당하니

중국죽림 칠현 사건을 모방해 여주 남한강에 배를 뛰우고 자기들에 신세를 한탄하면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금전이 필요하니 영남에서 광해군에 받치는 은

등 귀중품 봉물을 문경세제 조령에서 탈취한 사건임 이서자들에 강도 사건을

대북 이익첨 일당이 영의정 박순에 서자 박응서에게 국구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웅립하기위한 군자금이 였다고 허위고변케 하여 계축년에 옥사가 일어나 집권세력

대북에 눈에 거스리고 바른 말하는 사람은 모조리 귀양보내고 국구 김제남 영창대군

을 죽이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 시킨 사건임

남곽공 오창공 형제 상촌 신흠도 귀양감 남곽공은 귀양가서 중풍으로 방면 되시고

오창공은 유릉<의인황후능 저주사건>조작으로 오랫동안 귀양 살이를 함

금양위 동생 중봉공에 부 오창공에 억울한 사정을 상소함으로 풀려나옴 형제분에

긴상소문을 읽어보니 종, 무당, 봉사, 점쟁이를 이용하여 모함함

이사건을 읽어보고 없는 사실로 남을 모함하고 음해한 자들은 한때 부귀영화를

누릴지 몰라도 그조상에 부덕함으로 자손 대대로 잘못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분명 진실은 언제 밝혀져도 밝혀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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