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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열하일기』, ‘거제(車制)’에 나타난 박지원의 북학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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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9-18 18:06 조회4,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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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거제(車制)’에 나타난 박지원의 북학 사상

2010. 9. 13. (월)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친척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쓴 것이다. 당시 박지원의 나이는 44세.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지만 당시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열하는 박지원의 기록에서도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인후(咽喉)를 누르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언급했듯이, 열하는 몽고, 위구르, 티베트의 세력을 제압하는 중심공간이자, 중국문명과 이국문명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을 거친 경험과 특히 열하에서의 경험을 주목하고,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한양을 출발한 것이 1780년 5월 25일이었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27일로, 5개월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열하일기』에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과 주요 지역에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예리한 눈으로 청의 문물을 관찰했고, 거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담았다.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청나라의 풍경과 풍속, 요술 구경, 라마 불교 등 그가 관찰한 내용은 실로 다양하였다.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에 큰 충격을 받은 한편으로 청의 문물을 조선에 새롭게 수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하였다. 『일신수필(馹汛隨筆)』1)에 실린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이란 글에는 그의 북학 사상이 구체화되어 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큰 쓰임에 수레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보니, 『주례(周禮)』2)에는 임금의 재부를 물을 때 반드시 수레의 수효로써 대답하였다. 수레는 단지 짐수레나 사람 타는 수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수레, 공사에 쓰는 수레, 불 끄는 수레, 대포를 실은 수레 등 그 제도는 수백, 수천 가지로 갑자기 이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이 타는 수레나 짐수레는 사람의 생활에 더욱 중요한 물건이므로 급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大凡車者 出乎天而行于地 用旱之舟而能行之屋也 有國之大用莫如車 故周禮問國君之富 數車以對 車非獨載且乘也 有戎車役車水車砲車千百其制 而今不可蒼卒俱悉 然至於乘車載車 尤係生民先務 不可不急講也]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바위가 많아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다.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니, 어찌 거리가 비좁고 고개가 험준함을 근심하겠는가?(중략)

[我東未嘗無車 而輸未正圓 轍不入軌 是有無車也 然而人有恒言曰 我東巖邑 不可用車 是何言也 國不用車 故道不治耳 車行則道自治何患乎街巷之狹隘 嶺阨之險峻乎]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로서, 입으로만 수인(輸人)이며, 여인(輿人)이며, 거인(車人)이며, 주인(輈人)이라 하지만,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도통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책을 헛읽는다는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다.

[方數千里之國 民氓産業若是其貧 一言而蔽之 曰車不行域中 請問其故 車奚不行 一言而蔽之 曰士大夫之過也 平生讀書則周禮聖人之作也曰輸人 曰輿人 曰車人 曰輈人 然竟不講造之之法如何 行之之術如何 是所謂徒讀 何補於學哉 鳴呼嘻噫]

- 『열하일기』권3,「일신수필(馹迅隨筆)」,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 중에서

 

1) 1780년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9일 동안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56 리의 일정을 기록한 글이다.
2) 주나라 초기 재상인 주공이 지었다는 책, 주나라의 문물 제도와 예법을 정리했다.

 

 ▶ 열하일기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조선 최고의 명저들 인용)

 

  이 글에서 박지원은 조선이 빈곤한 주요한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서 찾았다. 박지원은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는 의론에 대하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직접 수레를 만들어 활용하면 수레를 이용할 길은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현대의 실물 경제와도 통하는 측면이 많다. 1970년대 경제개발 기간 중 산을 깎고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망을 확보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과도 그 맥락이 통하는 논리이다.

  기존에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들의 선진문명을 적극 수용하려한 박지원의 북학사상은 의리나 명분보다는 부국(富國)과 민생의 안정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은 「허생전」이나, 「호질」 등에서 양반 사회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북벌(北伐)이 대세였던 시대에서 북학(北學)으로 사상이 전환되던 시대, 박지원은 북학 사상의 중심에서 시대를 이끈 지식인이었다.

  2009년과 2010년 8월 2차례에 걸쳐 필자는 박지원 일행이 230년 전에 거쳐 갔던 『열하일기』 여정을 그대로 밟아가는 답사를 다녀왔다. 박지원이 그토록 놀랐고 흠모했던 높은 문명은 아니었지만 박지원 일행이 거쳐 간 옛 길을 따라간다는 즐거움으로 넘쳐났던 답사였다. 관광버스를 전세 내서 하는 답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길고도 힘들었다. 그런데 1780년 박지원은 그 험한 길을 말을 타고 때로는 걸으면서 모든 일정을 소화해냈다. 그것도 현장의 모든 장면들을 생생한 기록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그의 열정과 능력에 찬탄을 금할 수 가 없었다.

  230년 전 박지원이 기록한 『열하일기』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이 열하를 따라가는 여정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의 시대에도 『열하일기』처럼 치밀하고도 완벽한 ‘신열하일기’와 같은 기록물이 탄생되기를 바란다. 후손들이 21세기 초반 중국의 모습을 관찰하고 진단한 ‘신열하일기’를 들고, 한국과 중국의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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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백 서른 한 번째 이야기

『열하일기』, ‘거제(車制)’에 나타난 박지원의 북학 사상

2010. 9. 13. (월)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친척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쓴 것이다. 당시 박지원의 나이는 44세.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지만 당시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열하는 박지원의 기록에서도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인후(咽喉)를 누르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언급했듯이, 열하는 몽고, 위구르, 티베트의 세력을 제압하는 중심공간이자, 중국문명과 이국문명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을 거친 경험과 특히 열하에서의 경험을 주목하고,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한양을 출발한 것이 1780년 5월 25일이었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27일로, 5개월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열하일기』에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과 주요 지역에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예리한 눈으로 청의 문물을 관찰했고, 거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담았다.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청나라의 풍경과 풍속, 요술 구경, 라마 불교 등 그가 관찰한 내용은 실로 다양하였다.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에 큰 충격을 받은 한편으로 청의 문물을 조선에 새롭게 수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하였다. 『일신수필(馹汛隨筆)』1)에 실린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이란 글에는 그의 북학 사상이 구체화되어 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큰 쓰임에 수레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보니, 『주례(周禮)』2)에는 임금의 재부를 물을 때 반드시 수레의 수효로써 대답하였다. 수레는 단지 짐수레나 사람 타는 수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수레, 공사에 쓰는 수레, 불 끄는 수레, 대포를 실은 수레 등 그 제도는 수백, 수천 가지로 갑자기 이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이 타는 수레나 짐수레는 사람의 생활에 더욱 중요한 물건이므로 급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大凡車者 出乎天而行于地 用旱之舟而能行之屋也 有國之大用莫如車 故周禮問國君之富 數車以對 車非獨載且乘也 有戎車役車水車砲車千百其制 而今不可蒼卒俱悉 然至於乘車載車 尤係生民先務 不可不急講也]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바위가 많아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다.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니, 어찌 거리가 비좁고 고개가 험준함을 근심하겠는가?(중략)

[我東未嘗無車 而輸未正圓 轍不入軌 是有無車也 然而人有恒言曰 我東巖邑 不可用車 是何言也 國不用車 故道不治耳 車行則道自治何患乎街巷之狹隘 嶺阨之險峻乎]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로서, 입으로만 수인(輸人)이며, 여인(輿人)이며, 거인(車人)이며, 주인(輈人)이라 하지만,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도통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책을 헛읽는다는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다.

[方數千里之國 民氓産業若是其貧 一言而蔽之 曰車不行域中 請問其故 車奚不行 一言而蔽之 曰士大夫之過也 平生讀書則周禮聖人之作也曰輸人 曰輿人 曰車人 曰輈人 然竟不講造之之法如何 行之之術如何 是所謂徒讀 何補於學哉 鳴呼嘻噫]

- 『열하일기』권3,「일신수필(馹迅隨筆)」,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 중에서

 

1) 1780년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9일 동안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56 리의 일정을 기록한 글이다.
2) 주나라 초기 재상인 주공이 지었다는 책, 주나라의 문물 제도와 예법을 정리했다.

 

 ▶ 열하일기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조선 최고의 명저들 인용)

 

  이 글에서 박지원은 조선이 빈곤한 주요한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서 찾았다. 박지원은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는 의론에 대하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직접 수레를 만들어 활용하면 수레를 이용할 길은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현대의 실물 경제와도 통하는 측면이 많다. 1970년대 경제개발 기간 중 산을 깎고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망을 확보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과도 그 맥락이 통하는 논리이다.

  기존에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들의 선진문명을 적극 수용하려한 박지원의 북학사상은 의리나 명분보다는 부국(富國)과 민생의 안정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은 「허생전」이나, 「호질」 등에서 양반 사회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북벌(北伐)이 대세였던 시대에서 북학(北學)으로 사상이 전환되던 시대, 박지원은 북학 사상의 중심에서 시대를 이끈 지식인이었다.

  2009년과 2010년 8월 2차례에 걸쳐 필자는 박지원 일행이 230년 전에 거쳐 갔던 『열하일기』 여정을 그대로 밟아가는 답사를 다녀왔다. 박지원이 그토록 놀랐고 흠모했던 높은 문명은 아니었지만 박지원 일행이 거쳐 간 옛 길을 따라간다는 즐거움으로 넘쳐났던 답사였다. 관광버스를 전세 내서 하는 답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길고도 힘들었다. 그런데 1780년 박지원은 그 험한 길을 말을 타고 때로는 걸으면서 모든 일정을 소화해냈다. 그것도 현장의 모든 장면들을 생생한 기록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그의 열정과 능력에 찬탄을 금할 수 가 없었다.

  230년 전 박지원이 기록한 『열하일기』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이 열하를 따라가는 여정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의 시대에도 『열하일기』처럼 치밀하고도 완벽한 ‘신열하일기’와 같은 기록물이 탄생되기를 바란다. 후손들이 21세기 초반 중국의 모습을 관찰하고 진단한 ‘신열하일기’를 들고, 한국과 중국의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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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백 서른 한 번째 이야기

『열하일기』, ‘거제(車制)’에 나타난 박지원의 북학 사상

2010. 9. 13. (월)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친척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쓴 것이다. 당시 박지원의 나이는 44세.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지만 당시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열하는 박지원의 기록에서도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인후(咽喉)를 누르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언급했듯이, 열하는 몽고, 위구르, 티베트의 세력을 제압하는 중심공간이자, 중국문명과 이국문명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을 거친 경험과 특히 열하에서의 경험을 주목하고,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한양을 출발한 것이 1780년 5월 25일이었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27일로, 5개월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열하일기』에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과 주요 지역에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예리한 눈으로 청의 문물을 관찰했고, 거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담았다.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청나라의 풍경과 풍속, 요술 구경, 라마 불교 등 그가 관찰한 내용은 실로 다양하였다.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에 큰 충격을 받은 한편으로 청의 문물을 조선에 새롭게 수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하였다. 『일신수필(馹汛隨筆)』1)에 실린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이란 글에는 그의 북학 사상이 구체화되어 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큰 쓰임에 수레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보니, 『주례(周禮)』2)에는 임금의 재부를 물을 때 반드시 수레의 수효로써 대답하였다. 수레는 단지 짐수레나 사람 타는 수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수레, 공사에 쓰는 수레, 불 끄는 수레, 대포를 실은 수레 등 그 제도는 수백, 수천 가지로 갑자기 이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이 타는 수레나 짐수레는 사람의 생활에 더욱 중요한 물건이므로 급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大凡車者 出乎天而行于地 用旱之舟而能行之屋也 有國之大用莫如車 故周禮問國君之富 數車以對 車非獨載且乘也 有戎車役車水車砲車千百其制 而今不可蒼卒俱悉 然至於乘車載車 尤係生民先務 不可不急講也]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바위가 많아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다.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니, 어찌 거리가 비좁고 고개가 험준함을 근심하겠는가?(중략)

[我東未嘗無車 而輸未正圓 轍不入軌 是有無車也 然而人有恒言曰 我東巖邑 不可用車 是何言也 國不用車 故道不治耳 車行則道自治何患乎街巷之狹隘 嶺阨之險峻乎]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로서, 입으로만 수인(輸人)이며, 여인(輿人)이며, 거인(車人)이며, 주인(輈人)이라 하지만,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도통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책을 헛읽는다는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다.

[方數千里之國 民氓産業若是其貧 一言而蔽之 曰車不行域中 請問其故 車奚不行 一言而蔽之 曰士大夫之過也 平生讀書則周禮聖人之作也曰輸人 曰輿人 曰車人 曰輈人 然竟不講造之之法如何 行之之術如何 是所謂徒讀 何補於學哉 鳴呼嘻噫]

- 『열하일기』권3,「일신수필(馹迅隨筆)」,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 중에서

 

1) 1780년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9일 동안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56 리의 일정을 기록한 글이다.
2) 주나라 초기 재상인 주공이 지었다는 책, 주나라의 문물 제도와 예법을 정리했다.

 

 ▶ 열하일기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조선 최고의 명저들 인용)

 

  이 글에서 박지원은 조선이 빈곤한 주요한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서 찾았다. 박지원은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은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를 쓰기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는 의론에 대하여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을 제기하여 수레를 만들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정신 자세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직접 수레를 만들어 활용하면 수레를 이용할 길은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현대의 실물 경제와도 통하는 측면이 많다. 1970년대 경제개발 기간 중 산을 깎고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망을 확보한 것이 여러 측면에서 경제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과도 그 맥락이 통하는 논리이다.

  기존에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들의 선진문명을 적극 수용하려한 박지원의 북학사상은 의리나 명분보다는 부국(富國)과 민생의 안정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은 「허생전」이나, 「호질」 등에서 양반 사회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북벌(北伐)이 대세였던 시대에서 북학(北學)으로 사상이 전환되던 시대, 박지원은 북학 사상의 중심에서 시대를 이끈 지식인이었다.

  2009년과 2010년 8월 2차례에 걸쳐 필자는 박지원 일행이 230년 전에 거쳐 갔던 『열하일기』 여정을 그대로 밟아가는 답사를 다녀왔다. 박지원이 그토록 놀랐고 흠모했던 높은 문명은 아니었지만 박지원 일행이 거쳐 간 옛 길을 따라간다는 즐거움으로 넘쳐났던 답사였다. 관광버스를 전세 내서 하는 답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길고도 힘들었다. 그런데 1780년 박지원은 그 험한 길을 말을 타고 때로는 걸으면서 모든 일정을 소화해냈다. 그것도 현장의 모든 장면들을 생생한 기록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그의 열정과 능력에 찬탄을 금할 수 가 없었다.

  230년 전 박지원이 기록한 『열하일기』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이 열하를 따라가는 여정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의 시대에도 『열하일기』처럼 치밀하고도 완벽한 ‘신열하일기’와 같은 기록물이 탄생되기를 바란다. 후손들이 21세기 초반 중국의 모습을 관찰하고 진단한 ‘신열하일기’를 들고, 한국과 중국의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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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백 서른 한 번째 이야기

『열하일기』, ‘거제(車制)’에 나타난 박지원의 북학 사상

2010. 9. 13. (월)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친척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쓴 것이다. 당시 박지원의 나이는 44세. 애초 목적지는 연경이었지만 당시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열하는 박지원의 기록에서도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인후(咽喉)를 누르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언급했듯이, 열하는 몽고, 위구르, 티베트의 세력을 제압하는 중심공간이자, 중국문명과 이국문명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을 거친 경험과 특히 열하에서의 경험을 주목하고, 제목을 『열하일기』라 한 것이다. 한양을 출발한 것이 1780년 5월 25일이었으며,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27일로, 5개월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열하일기』에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과 주요 지역에서 견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박지원은 가는 곳마다 예리한 눈으로 청의 문물을 관찰했고, 거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담았다.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청나라의 풍경과 풍속, 요술 구경, 라마 불교 등 그가 관찰한 내용은 실로 다양하였다.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에 큰 충격을 받은 한편으로 청의 문물을 조선에 새롭게 수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생각하였다. 『일신수필(馹汛隨筆)』1)에 실린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이란 글에는 그의 북학 사상이 구체화되어 있다.

 

 

 「무릇 수레라는 것은 하늘이 낸 물건이로되 땅 위를 다니는 물건이다. 이는 뭍 위를 달리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 할 것이다. 나라의 큰 쓰임에 수레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보니, 『주례(周禮)』2)에는 임금의 재부를 물을 때 반드시 수레의 수효로써 대답하였다. 수레는 단지 짐수레나 사람 타는 수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쓰는 수레, 공사에 쓰는 수레, 불 끄는 수레, 대포를 실은 수레 등 그 제도는 수백, 수천 가지로 갑자기 이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사람이 타는 수레나 짐수레는 사람의 생활에 더욱 중요한 물건이므로 급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大凡車者 出乎天而行于地 用旱之舟而能行之屋也 有國之大用莫如車 故周禮問國君之富 數車以對 車非獨載且乘也 有戎車役車水車砲車千百其制 而今不可蒼卒俱悉 然至於乘車載車 尤係生民先務 不可不急講也]

  우리 조선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에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조선은 바위가 많아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다.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니, 어찌 거리가 비좁고 고개가 험준함을 근심하겠는가?(중략)

[我東未嘗無車 而輸未正圓 轍不入軌 是有無車也 然而人有恒言曰 我東巖邑 不可用車 是何言也 國不用車 故道不治耳 車行則道自治何患乎街巷之狹隘 嶺阨之險峻乎]

  그래도 사방의 넓이가 몇 천 리나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수레가 나라에 다니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이것도 한마디로 대답하면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것이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로서, 입으로만 수인(輸人)이며, 여인(輿人)이며, 거인(車人)이며, 주인(輈人)이라 하지만,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하며,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도통 연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책을 헛읽는다는 것이니,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다.

[方數千里之國 民氓産業若是其貧 一言而蔽之 曰車不行域中 請問其故 車奚不行 一言而蔽之 曰士大夫之過也 平生讀書則周禮聖人之作也曰輸人 曰輿人 曰車人 曰輈人 然竟不講造之之法如何 行之之術如何 是所謂徒讀 何補於學哉 鳴呼嘻噫]

- 『열하일기』권3,「일신수필(馹迅隨筆)」, ‘수레 만드는 법식[車制]’ 중에서

 

1) 1780년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9일 동안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56 리의 일정을 기록한 글이다.
2) 주나라 초기 재상인 주공이 지었다는 책, 주나라의 문물 제도와 예법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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