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욱 종인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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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학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10-10 23:39 조회4,133회 댓글0건본문
승욱 종인님, 너무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신빙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사 자료에 따르면 밀직공의 계축호적이 최고(最古)이기 때문에 호장공 이전의 선조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모릅니다. 사실 지난 500여년 동안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였습니다. 접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사 자료들을 다 살펴 보셨겠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호장공 형제분(4촌 등 모두 포함)들과 그 선대분들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분들께서 고려조에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본관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고려 초, 중기에 우리의 선조들이 미미한 존재들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 초, 중기에 반남박씨 인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께서 모두 미미한 존재들이어서라기 보다는 "반남"이라는 관향으로 득관한 시기 자체가 고려 후기로 매우 늦었기 때문(계축호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남박씨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명문으로 발돋음한 것은 사실상 고려말의 문정공(휘 상충: 5세)과 아드님이신 평도공(휘 은: 6세)께서 초석을 깔아 놓으셨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조선 전기에 반남박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특히 평도공과 세 아드님들(휘 규, 강, 훤), 공순공(휘 숭질), 그리고 인성왕후(인종비: 금성부원군 휘 용의 따님) 등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야천공(휘 소)과 소고공(휘 승임)께서 등장하셨고, 특히 야천공의 후손들 중에 왕비(빈)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명실 공히 삼한갑족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선전관공(휘 문찬)의 기록이 정확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밀직공의 계축호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제가 보는 견해로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며 그것이 곧 사실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미 선인들에 의해 밀직공의 계축호적은 역사적 자료로 인정을 받았지만, 선전관공의 기록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현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추측만으로 우리의 선대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추측을 증명할 만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축호적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연구는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옛 조상의 영광이 오늘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명문의 후예라고 떠들면서, 하는 행동은 시정의 잡배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이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되어 민망스럽습니다. 종중과 종중사에 대한 승욱 종인님의 관심과 열정에 다시 한번더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가 신빙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사 자료에 따르면 밀직공의 계축호적이 최고(最古)이기 때문에 호장공 이전의 선조들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모릅니다. 사실 지난 500여년 동안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였습니다. 접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역사 자료들을 다 살펴 보셨겠지만 별 소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호장공 형제분(4촌 등 모두 포함)들과 그 선대분들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분들께서 고려조에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본관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고려 초, 중기에 우리의 선조들이 미미한 존재들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 초, 중기에 반남박씨 인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께서 모두 미미한 존재들이어서라기 보다는 "반남"이라는 관향으로 득관한 시기 자체가 고려 후기로 매우 늦었기 때문(계축호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남박씨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명문으로 발돋음한 것은 사실상 고려말의 문정공(휘 상충: 5세)과 아드님이신 평도공(휘 은: 6세)께서 초석을 깔아 놓으셨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조선 전기에 반남박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특히 평도공과 세 아드님들(휘 규, 강, 훤), 공순공(휘 숭질), 그리고 인성왕후(인종비: 금성부원군 휘 용의 따님) 등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야천공(휘 소)과 소고공(휘 승임)께서 등장하셨고, 특히 야천공의 후손들 중에 왕비(빈)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명실 공히 삼한갑족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선전관공(휘 문찬)의 기록이 정확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한 것은 밀직공의 계축호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제가 보는 견해로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며 그것이 곧 사실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미 선인들에 의해 밀직공의 계축호적은 역사적 자료로 인정을 받았지만, 선전관공의 기록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현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추측만으로 우리의 선대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추측을 증명할 만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축호적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연구는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옛 조상의 영광이 오늘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명문의 후예라고 떠들면서, 하는 행동은 시정의 잡배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이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되어 민망스럽습니다. 종중과 종중사에 대한 승욱 종인님의 관심과 열정에 다시 한번더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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