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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성(朴弼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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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12-24 11:23 조회4,530회 댓글0건

본문

박필성(朴弼成)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652-1747(효종3-영조23)

본관 반남(潘南)

자 사홍(士弘)

호 설송재(雪松齋)

시호 효정(孝靖)

활동분야 문신

박필성(朴弼成)에 대하여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朝鮮名臣錄. 〈朴定子〉

효종6녀 숙녕옹주.반남박씨 대종중 3대 도유사.[1739-1765]

박필성(朴弼成) 시대 조선 생몰년 1652-1747(효종3-영조23) 본관 반남(潘南)

자 사홍(士弘) 호 설송재(雪松齋) 시호 효정(孝靖) 활동분야 문신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궤02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17세 휘 박필성(朴弼成) 1652(효종 3)~1747(영조 23). 응복--동열--호--세모--태장--필성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효종의 사위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장(泰長)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錦平尉)에 봉해졌으나,

1668년에 숙녕옹주는 두환(痘患)으로 죽었다

숙종 때에는 1685년부터 1717년까지 네 차례나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그의 장수(長壽)를 치하하여

1738년(영조 14)에 시(詩)를 내리고,

1741년에는 오언시와 궤장(#궤02杖)을 내렸으며,

1746년에는 그를 우대하여 영릉도위(寧陵都尉)에 봉했다.

1747년 7월 97세의 나이로 죽자 8월에 효행을 치하해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현종3 8/04 박필성(朴弼成)을 금평위(錦平尉)로,

【숙녕 옹주(淑寧翁主)에게 장가들어 직을 제수한 것이다.】

현종7 9/17 숙영 옹주(淑寧翁主)가 죽었다. 선왕(先王)의 후궁 이씨의

소출로서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이다.

현종9 5/20 숙녕 옹주가 졸하였다. 옹주는 상의 서매(庶妹)이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시집갔는데,

두역을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상이 몹시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금창위(錦昌尉) 박태정(朴泰定)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도록 하라.??하였다.

숙종11/8/15 사은사(謝恩使) 박필성(朴弼成)

숙종29/9/21 임금이 박필성은 의빈(儀賓)이라 하여 인견(引見)하고 선온(宣 )하였는데,

숙종29/10/17 사은사(謝恩使) 박필성(朴弼成)이 선천(宣川)에 도착하여 병세가 위중하므로

영조 4 4/08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과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 등이 상소하기를,

??역적(逆賊)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박사관(朴師寬)은 동종(同宗)에서 나왔지마는,

나라를 배반하여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차마 이 도적과 더불어 그 형제 까지

함께 일컫는 이름을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등의 이름 글자 중에서 ??필(弼)??자와 ??사(師)??자를다른 글자로 고치게 하소

서.??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놘處)케 하였는데,고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17 (1741) 90세로 ?(궤)杖(장)을 하사 받았으며 죽은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영조22/1/1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의 뜰에 나아가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진하(陳賀)하였다. 전상(殿上)에서 하례(賀禮)를 받고 교서(敎書)

를 반포하였다.

조신(朝臣) 가운데 70세 이상, 서인(庶人) 80세 이상된 자와 왕증손부(王曾孫婦)

왕외손부(王外孫婦)로서 연로하여 세상에 생존해 있는 자에게는 아울러 식물(食物)?

의자(衣資)를 차등 있게 내렸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특별히 넉넉한 상을 내리게 했는데,

(寧陵都尉)로서 나이가 95세였기 때문이었다.

영조23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졸(卒)하였다.

박필성은 효묘의 도위(都尉)로 두루 다섯 조정을 섬겼는데,

나이 90세가 넘었으므로 은총과 대우가 융숭하고 지극하였었다. 임금이 직접 가서 조문하려고하였는데, 약원에서 간하여 중지하였다.

영조23/8/22 영의정 김재로가 금평위 박필성의 효행을 아뢰자 정문하도록 명하다 》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정문(旌門)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진신(搢紳)?

사림(士林)들이 박필성의 효행을 합사(合辭)하여 예조에 알렸으나, 수당(首堂)이 혐의하여 부

당하게 여긴 까닭에 정부(政府)에 알릴 수 없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를 아뢰자

이러한 명이 있게 되었다.

현종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4월 10일(계축) 1번째기사

숙령 옹주의 부마는 유학 박태장의 아들로 정하라고 정원에 하교하다

사은-사謝恩使

<역사>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국의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비슷한 말] 진헌사.

삼 년 뒤에 사은사가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말 새로이 발간된출처 :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오니…

.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나라에 베푼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한다는 뜻으로 외국(外國)에 보내던 사신(使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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