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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시우씨의 댓글답변에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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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12-26 13:06 조회4,1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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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10-12-26 04:38

금평위를 추켜 세우다니요/

근거 없이 하는말과 같이 생각하는데

명우씨는 년세는 어떻게 대며 어느 소파인지요/

나는 38녀생이고 15세 참판공 후손으로 소종중 일을

맏아서 종중을 책임지고 일을 함니다.

금평위:근거는 석천암을 가보았으면 알수있고.

90세가 넘도록 종중 일을 맏아 하신 근거도 경신보 세적편을

보았으면 근거가 있지요/ 또 96세인데 97새로 하느냐는 우리 나이로는

97가 데기도하지요/

상로제는 금평위 때 설계를 해도 시작한 거고 또 상로제를 언제 준공 했는지

알고 질문을 해도 좋습니다. 두루 살펴보고 질문을 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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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평위를 추켜 세우다니요/

근거 없이 하는말과 같이 생각하는데

명우씨는 년세는 어떻게 대며 어느 소파인지요/

나는 38녀생이고 15세 참판공 후손으로 소종중 일을

맏아서 종중을 책임지고 일을 함니다.

금평위:근거는 석천암을 가보았으면 알수있고.


금평위의 무슨 근거가 석천암에 어디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요


소종중일을 맡아서 종중을 책임지고  일하시는 분이면

더우기 근거없는 말을 해서는 안돼지오



90세가 넘도록 종중 일을 맏아 하신 근거도 경신보 세적편을

보았으면 근거가 있지요/ 또 96세인데 97새로 하느냐는 우리 나이로는 97가 데기도하지요/


금평위가 (1652)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사셨는데

1747-1652=95

만으로 95세 사셨고  

우리나이로 96세 사셨습니다.

세적편 어디에 종중일을 보셨다는 근거가 있나요


상로제는 금평위 때 설계를 해도 시작한 거고 또 상로제를 언제 준공 했는지 알고 질문을 해도 좋습니다. 두루 살펴보고 질문을 했으면 해요/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두리뭉실 너머 가려고 하시지 말고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 질문했으니

정확한 근거에 의해 대답하시오

역사적인 사실, 근거 문헌을 밝히기 바랍니다.


상로제는 금평위 때 설계를 했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대시오


세적편에 보면 상로제는 학생공 휘 사신 할아버지께서 세우시고

금평위의 이야기 없는 상로제는 본래 찬성공의 후손이 찬성공의 묘소를 모시기위해 세운것으로  금평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금평위 돌아가신 다음해 완공하였다고 금평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말도않되고


반남면에 찬성공의 위토가 근래까지도 찬성공 후손 소유로 있다가

토지 20 두락을 종중으로 소유로 보내어 찬성공의 산소가 종중에서 관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돌아가신 분들로 부터 들은 일이 있고   20두락을 종중소유로 한 문서가 종중에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신보 세적편에 있는 상로재기를 보고 참고 하십시오



상로재기(霜露齋記) 

그 후에 남곽공(南郭公)의 손자 찬성공(贊成公)이 회진(會津)에 우거할 때 풍수설을 듣고서 그 암자를 동쪽 기슭 취봉(鷲峯) 아래로 옮기고 그 터를 장지로 삼았다. 자손들이 그 아래에 대대로 살았는데 학생공(學生公) 사신(師莘)이 이 재실을 세우고 청하공(淸河公) 충수(忠壽)가 이 편액을 써 붙였다.

재실의 시초는 비록 스스로 조상을 위하는 일파(一派) 자손의 정성에서 나왔지만 묘가 선영 안에 있고 재실도 분암(墳庵)의 터에 자리 잡았으니 감히 아버지 사당으로만 삼을 수 없었기에 대종(大宗)이 치재(致齋)하는 곳으로 정하여 철따라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여기에서 보살폈다. 파손되면 보수하는 것에서 대종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도리와 사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산 아래 사는 자는 오직 남곽공 일파뿐이나 종중의 일을 관리하는 데는 서울에 있는 여러 후손이 번갈아 멀리서 주관하였으니 그들은 멀리 살아서 비록 시절에 따라 성묘하며 머물러 있지는 못하였지만 먼 지방에 와서 제물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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