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암 상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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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암과 상로재에 관한 세적편 자료는 글자 한자 안 빼고 전문을 올린것입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것 같습니다.
경신보 세적편과 대조를 해보십시오
경신보 세적편의 내용이 현대인이 보기에 힘들기 때문에
보기 쉽게 다시 번역을 하여
본래 세적편의 내용을 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였지 내용을 뺀것은 없읍니다.
시우씨 경신보 세적편이 없으시면 대종중에 오셔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금평위의 내용은 연암이 쓰신 화양병사기에 올라 있고
화양병사기는 석천암과 상로재와는 관계가 없기에 올리지 않았읍니다.
화양병사기를 아래에 올리겠습니다.
화양병사기(華陽丙舍記)
선조 야천(冶川) 선생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묘는 합천(陜川) 화양동(華陽洞) 남쪽에 있으니 군(郡) 치소(治所)에서 사십 리 떨어진 지점이다. 제전(祭田)은 백성의 경작지로 들어가고 지키는 집도 가난하고 단촐하니 애초에 재사(齋舍)가 없었다. 본 군수 이의일(李義逸)이 묘에 와서 참배하고 두루 보고는 탄식하며 “선생의 높은 도의(道義)는 후학들의 존경을 받는데 하물며 나는 외후손으로 마침 이 땅의 군수가 되었으니 묘사(墓事)에 힘을 다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선생의 후세 자손으로는 내손, 외손 구별 없이 대대로 더욱 번창하여 세상에서 고귀한 가문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먼저 반남(潘南) 박씨를 내세우니, 모두 선생의 여경(餘慶)이 아님이 없고 이 분께 음덕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 서울과의 거리가 팔백 리이고 시대로는 이백 년이 지나 성묘해서 제때에 수호하지 못했고 방법을 얻지 못해 향화(香火)도 오랫동안 식었으며 나무꾼과 목동들도 금하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후손으로서 크게 황공한 일이다. 외손인 이군수만 시켜 홀로 좋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어찌 우리 본손(本孫)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선생의 후손으로서 같은 지역에 수령이 된 자 다섯이 스스로 먼저 해야 할 것이기에 이에 종제(從弟) 선산부사(善山府使) 수원(綏源), 족제(族弟) 문경현령(聞慶縣令) 이원(彛源), 족질(族姪) 진주목사(晉州牧使) 종후(宗厚), 영덕현령(盈德縣令) 종경(宗慶)에게 멀리 편지를 보내어 이군수의 의거를 칭송하며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다투어 봉급을 덜어 도우려 하니 대구판관(大邱判官) 이단형(李端亨)도 이 말을 듣고 “나도 외손이다. 어찌 합천군수만 좋은 일을 독차지하게 하리오” 하였다. 그때 감영에 있던 7대손 사인(師訒)과 족제 임천군수(林川郡守) 지원(知源)도 각기 돈을 내어 전후 들어온 돈이 삼백 삼십 량이었다. 그래서 팔렸던 제전(祭田)을 다시 사고 도기로 된 제기 가운데 깨진 것을 옻칠한 목기로 바꾸었다. 또 남은 돈으로 재사(齋舍)를 새로 지으려 하였다.
그 고을에서 의논하는 자가 “화암서원(華岩書院)은 선생만을 향사하는 곳으로 선조(先朝)에서 사액한 사당이다.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는 매년 한 번에 불과하지만 서원은 백대(百代)에 제사하는 곳으로 또한 한 동네에 있으니 어찌 이 전지(田地)를 그 소속으로 하지 않는가”라 하였다. 이후(李侯)는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고 예절은 각기 사정이 다른 것이다.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후인이 조상을 추모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이고 제기를 늘어놓고 우러러 보는 성의를 표시하는 것은 제생들이 현인을 사모하기 위한 예절이니 이것이 묘와 서원이 다른 소이인데 어찌 이것을 옮겨 서원에 소속시키리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선산, 문경, 진주의 수령들이 앞뒤로 사직하고 가니 이군수는 탄식하며 “관의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재사를 완공치 못했으니 내 뜻을 이루어야겠다”고 하였다.
장인을 모아 재목을 주며 산에 의지해 묘역을 넓혀 집 다섯 칸을 지으려 하였는데 좌우로는 방을 만들고 중간에는 대청을 두려 하였다. 일을 그림으로 그려 지원(趾源)에게 보이며 “나는 오직 지주(地主)로서 이 일을 도울 뿐이고 이것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방도는 오직 그대에게 있을 뿐이니 그대는 아는가”라고 하였다. 지원이 “예. 선생의 신주가 합천으로 돌아올 때 우리 조부께서 그때 경기 도백이셨는데 종족이 모두 감영으로 모였습니다. 금평위(錦平尉)는 나이 구십이라 안석과 지팡이를 가지고 오셨고 문경공(文敬公)도 강외(江外)에서 오셔서 서로 선생의 일을 이야기하니 둘러 앉아 듣는 이가 모두 노인이었습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훗날의 일은 너희들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비록 어렸어도 수레와 말을 연이어 타고 오면 맞아서 동작동(銅雀洞)에 이르렀던 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때 후손으로 절하고 하직한 이가 사백여 명이 되었으니 어찌 그리 성대했던지요”라고 하였다.
아아, 선생은 큰 덕과 깊은 학문으로 이른 나이에 이름을 떨쳐 보옥이 빛을 머금은 듯 위의 있는 모습으로 정색하고 토론하여 장차 군왕을 도와 큰 공헌을 하려 했더니 끝내 소인에게 배척을 받아 은둔하고 떠돌았다. 오직 외가에 의지하였으니 윤씨(尹氏)는 파평(坡平)의 큰 가문으로 합천에 살았다. 그 후 선생이 세상을 떠나니 고아들은 어려 고향으로 운구할 수 없었는데 윤씨 문중에서 불쌍히 여겨 묘지를 주니 우거하던 집 뒤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니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였고 손녀는 선조의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되었다. 그 뒤 홍씨 부인이 세상을 떠남에 양주(楊州)의 장지를 하사받았으니 선생의 묘와 천리나 떨어져 장사를 치루었다. 거리는 멀고 사력(事力)이 나눠진데다 세월도 오래되니 선생 묘를 살피는 데 게으르게 된 것은 필연의 형세였다.
지원(趾源)은 가까운 현의 수령이 되어 일찍이 한두 번 참배한 까닭에 지세의 형국을 살펴볼 수 있었으니, 산록이 중후하고 시냇물이 깊고 고요하여 마치 왕공, 귀인들이 중후한 풍채로 의젓하게 집에 있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외경하였다. 안색을 뵙고 언어를 들으면 온화하고 맑아 자연히 친애하게 될 듯하여 오래도록 떠날 수 없었다. 아아, 선생을 이곳에 장례 지냄이여. 당시 군자들은 깊이 슬퍼했으나 이미 명산과 큰 산악이 영기를 머금고 빼어남을 감춘 채 기다리어 후손들이 무궁한 세월에 세신(世臣) 귀척(貴戚)으로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게 되었도다. 당시 소인들 가운데 그의 복을 허무는 계책을 세운 이들은 도리어 발복의 땅을 마련해주게 되었으니 이것이 맹자가 말한 ‘부르지 않아도 이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선조를 위하는 장구한 계책은 전지(田地)를 사두는 것이 제일이고 수호하는 데는 재사(齋舍)를 두는 것이 제일이니 이제 몇 이랑의 밭과 일묘(一畝)의 재사는 묘를 지키는 자가 받는 것이고 후손들이 멀리 조상에 대해 그리움을 부치는 곳이다. 백년동안 이루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이군수를 만나 성취하였다. 그러나 나와 이군수는 모두 직책이 있는 자이고 직책이 있는 자는 때가 되면 돌아가기 마련이니 시종(始終)의 의(義)를 여기에 사는 윤씨에게 더욱 부탁하노라.
성상(聖上) 17년 12월, 8대손 안의현감(安義縣監) 지원(趾源)이 기록한다.
성조도감(成造都監) 유학(幼學) 윤지혁(尹之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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